삽화 = 권용훈 | |
꼭 10년 전의 일이다. 지난 96년 성악을 전공한 어느 합창지휘자가 이탈리아에서 귀국, 음악평론가 탁계석(21세기 문화광장 대표) 씨를 찾아왔다. 그는 여태껏 남들이 하지 않은, 뭔가 차별화된 합창을 하고 싶어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평론가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종래 시·군·구의 어머니합창단과 대비되는 아버지합창단을 만들어 보면 어떨까 하는 것이었다.
'어린이'나 '소년소녀'가 아닌, 그렇다고 '여성'도 아닌 '아버지' 합창단이라니, 지휘자는 실소를 금치 못했다. 생뚱맞은 이름도 그러하려니와 세계에서 그 유례를 아무래도 찾아보기 어려웠던 까닭이었다. 더구나 '술'과 '잠'으로 상징되는 오늘, 이땅의 아버지들이 과연 몇이나 참여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구심도 한 몫 했다.
며칠을 고민한 끝에 지휘자는 드디어 '우리아버지 합창단'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아버지들을 불러 모았다. 놀랍게도, 서울 자하문 근처의 어느 소규모 연주홀에는 모두 20여 명의 아버지들이 모였다. 이 소리없는 쿠데타가 일어난 것은 공교롭게도 5월 16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곧이어 12월에 진주아버지 합창단이 만들어지고, 분당·서울·광주·의정부·부천·대구 등지에서 아버지합창단이 잇따라 생겨나 어느새 전국에 12개가 창단되었다. 아버지가 문화의 중심에 서야 비로소 화목한 가정문화가 꽃 핀다는 신념을 가진 아버지합창단은 그간 예술의 전당이나 세종문화회관에서 수 차례의 연주무대를 가졌다. 그럴 때마다 객석은 전석 만원이고 입장권이 모자랄 판국이었다(물론 입장권 수익은 전액 불우이웃돕기에 쓰여졌다).
한 번은 국회의원회관에서 연주회가 열렸다. 국회의장을 비롯해서 국회의원·보좌진·사무직원 등과 그의 가족들이 객석을 가득 메웠다. 지체 높은 분들이 대거 자리했던 터에, 그것은 여느 음악회와는 달리 자연스럽지 못했고, 분위기 또한 적잖이 경직되어 있었다. 아버지 단원들이 차례로 무대에 등장하고 있는데, 객석에서 별안간 "앗, 우리 아버지닷!"하며 일곱 살 쯤으로 보이는 꼬마 하나가 일어나 소리쳤다. 순간 여기저기서 새하얀 웃음꽃들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긴장된 객석의 분위기가 일순 누그러지면서 음악회도 차츰 무르익어 갔다. 무대 위에서 노래하는 아버지를 지켜 본 그 아이는 아버지와의 소중한 추억은 물론, 차마 잊을 수 없는 또 하나의 문화를 경험한 셈이다.
아버지합창단은 아마추어 합창단이다. 그러나 오히려 아마추어이기 때문에 직업합창단이나 전문적인 프로합창단이 못하는 것을 할 수 있는 경우도 많다. 가령 직업 합창단(혹은 전문합창단)이 경원시하는 쉽고 재미있는 레퍼토리와 프로그램을 개발, 무대화할 수 있는 점이 그러하다.
또한 아버지합창단의 연주회에는 어머니합창단이 정중하게 초청되는 때가 많다. 거꾸로 어머니합창단의 음악회에는 아버지합창단이 '러브콜' 당하는 사태(?)가 심심찮게 벌어지기도 한다. 여기에 어린이합창단이 가세할 경우, 그야말로 패밀리합창단이 되는 것이다.
탁계석 평론가는 이러한 아버지합창단을 전국에 100개 이상 만들려는 포부를 갖고 있다. 부산에서도 지난 2005년 8월, 직업이 각각인 30여 명의 아버지들을 불러 모아 '부산푸른 아버지합창단'(지휘 이성훈)의 창단식을 가졌고, 창단 1년 2개월 만인 오는 11월 4일 동래문화회관 대강당에서 대망의 창단연주회를 갖는다. '동행' '웃어요' '기도' '살짜기 옵서예' 등 널리 알려진 노래가 선보일 이번 음악회에는, 특히 옥샘여성합창단이 초청됨으로써 명실공히 '어버이'의 합창무대가 될 전망이다.
고단한 시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아버지들이여! 술잔을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나 일차 왕림해 보지 않으시겠는가. 음악의 너른 품이 그대들을 쉬게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