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문화

어느 음악학자 이야기

浩溪 金昌旭 2011. 2. 7. 18:17

국제신문 2006.11.13

 

 

김창욱의 음악의 날개위에 <20> 어느 음악학자 이야기
손태룡씨 개척정신, 지역음악사 연구 바꿨다



 

 
  삽화=권용훈
음악하면 으레 작곡이나 연주 쪽을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음악에는 이들 외에 또 다른 분야가 있으니, 바로 음악에 관한 학술적 작업인 '연구'가 그것이다. 음악연구(음악학)는 음악을 관찰·정리·분류·평가하며, 개개의 음악·작곡가·문화권·시대 등에 의미를 부여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분야이다.

대구에 사는 손태룡(성광고교 교사) 씨는 한국음악사 연구에 다대한 성과를 남긴 음악학자이다. 그는 '한국의 전통악기', '한국음악논전' 등은 물론 '대구음악사', '영남음악사 연구' 등을 씀으로써 특히 지역음악사 연구의 탁월한 본보기를 보였다. 그는 야산을 일궈 옥토를 만드는 개척자와 비견될 수 있겠는데, 그러한 과정에서 겪은 의외의 경험도 적지 않다.

언제였던가. 그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대구 출신 음악가들의 호적을 조사한 적이 있었다. 처음 그는 중구청 대민 서비스 창구에 찾아가 이들 음악가의 주소를 써서 호적등본을 신청했다. 그러나 벌써 작고한 지 오랜 이들인지라, 신청한 호적등본이 나올 리 만무했다. 그래서 그는 창고에 보관되어 있는 구(舊) 호적을 모두 확인하는 작업에 매달리게 되었다.

어렵사리 창고 출입을 허락받은 그는 방학 내내 창고 속의 구 호적을 이 잡듯이 뒤지기 시작했는데, 그는 매일 아침 직원이 출근하기 최소 30분 전에 출근해서 창고로 향했다. 그들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곳은 사람들이 드나들지 않아 먼지가 수북히 쌓여 있었고, 벼룩에 물린 탓인지 온몸이 근질근질해서 작업을 끝낼 양이면 항용 목욕탕에 들러야 했다. 각종 서류로 꽉 찬 창고에서 그가 원하는 호적을 찾는다는 일은 무모하기조차 했다.

그러나 꼬박 한 달을 여기에 매달린 결과, 그는 마침내 대구 출신 음악가 3명의 호적등본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 순간, 그는 혼미한 정신을 놓아버리고 자리에 그만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이 무렵 그를 만나는 직원들은 그를 호적계 직원으로 알았다. 연배가 낮은 어떤 이는 그에게 허리를 굽혀 깎듯이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의당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짐짓 격려의 덕담도 잊지 않았다.

"흐음, 수고가 많군!"

자칫 신분이 탄로 나면, 작업을 지속하기 어려울 수 있는 까닭이었다.

한편 오래 전에 그는 대구제일소학교 대강당에 관한 자료를 찾기 위해 중앙초등학교(대구제일소학교의 후신)에 취재를 나간 적이 있었다. 그곳은 1926년 8월 30일 한국 최초의 바리톤 가수인 김문보(金文輔, 1900년생)가 부부연주회를 열었고, 1927년 7월 2일 테너 권태호(權泰浩, 1903-1972)가 대구에서 처음으로 독창회를 열었던 곳이라 초창기 대구양악사 연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연주 공간이었기 때문이다(권태호는 '나리 나리 개나리 입에 따다 물고요…'하는 동요의 작곡자이기도 하다).

어느 한 겨울, 그는 검은 채권장사 가방을 달랑 옆구리에 끼고 중앙초등학교 교무실에 들어섰다. 남녀 교사들이 난로 주변에 빙 둘러 앉아 불을 쬐고 있었다. 이따금 잡담에 폭소가 터지기도 했다. 그는 교사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그가 이곳을 찾아 온 이유를 간단히 설명했다. 그리고는 인터뷰에 필요한 필기구와 메모지를 꺼내려고 가방을 열었다. 그런데 그 순간, 난데없이 한 여교사가 달겨들더니 다짜고짜 가방을 낚아챘다.

"우린 이런 거 필요없어욧!"

그녀의 날선 목소리는 매섭고도 차가웠다.

"저, 그게 아니라, 저는, 그러니까 제가 …."

워낙 갑작스런 일이라, 그는 뭐라 항변도 못하고 우물쭈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사이, 그녀의 금속성 목소리가 또 다시 귓전을 때렸다.

"어서 나가라니깐요!"

이번에는 그녀가 그의 팔을 막무가내로 낚아챘다. 그녀의 아귀는 여간 드센 게 아니었다. 아무런 성과도 없이, 억울하게 교무실 밖으로 쫓겨난 그해 겨울은 유난히도 추웠다.

그는 최근작 '사진으로 읽는 음악사'로 2006 문화관광부의 우수학술도서 저작자로 뽑혔다. 오랜 산전수전 끝에 얻은 작은 보람이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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