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권용훈 | |
대구출신의 테너 권태호(1903~1972)는 1925년 일본고등음악학교 성악과를 졸업한 엘리트 음악가였다. 1928년 그는 도쿄 히비야 청년회관에서 독창회를 열어 연속 4회의 앙코르를 받은 바 있으며, 그 해 5월에는 서울기독청년회관(서울YMCA)에서 슈베르트의 연가곡 '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아가씨'를 시연했는데, 그것은 독일 리트(Lied, 예술가곡)를 한국에 처음 소개한 음악회로 기록되고 있다.
그는 생전 500여 회의 연주회를 가진 성악가로서뿐만 아니라 100여 곡에 이르는 동요·교가·군가를 만든 작곡가로서도 익히 알려져 있다. 덧붙여, 그는 두주불사형의 애주가로서 술에 얽힌 적잖은 에피소드를 남겼다. 그 가운데 몇몇은 임종국·구자익이 엮은 '동서일화집(東西逸話集)'에도 실릴 정도였다.
도쿄에서 멋진 독창회를 끝낸 그가 자리를 옮겨 술집에서 뒷풀이를 가졌다. 평소에 가까운 지인들과 비루(맥주)를 마셨는데, 배가 불러오자 허리띠를 풀고 들이켰다. 며칠이 지나 일본의 한 일간지에 그에 관한 기사가 실렸다. '위대(胃大)한 권태호'라는 제목이었다.
평양 숭실전문·광성고보 교사를 지낸 그는 일본고등음악학교에서 교수생활을 하다가 광복이 되어 귀국, 마침내 고향땅에 정착했다.
어느날 음주가무를 아쉽게 작파하고 귀가하던 중이었다. 이미 통금시간이 훌쩍 지났고 그는 만취한 상태였다. 연신 비틀거리던 그가, 순간 발을 헛디디는 바람에 그만 하수구에 빠지고 말았다. 양복은 흠뻑 젖었고, 온통 퀴퀴한 시궁창 냄새가 코를 찔렀다. 생쥐꼴로 겨우 하수구를 빠져 나온 그는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그런데 몽롱한 의식 속에서도 저만치서 야통순경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낀 그가 재빨리 팔을 뻗어 담벼락에 바짝 달라 붙었다. 순경이 지나다 웬 사람이 담벼락에 대(大)자로 붙어 서 있기에 "누구요?" 하고 불렀다. 그는 "빨래요"하고 대답했다.
또 다른 어느날이었다. 역시 만취한 그가 통금을 어기고 중앙파출소 앞을 휘청휘청 걸어가고 있었다. 파출소 순경이 웬 간 큰 자가 호랑이 굴을 어슬렁거리나 싶어 "거, 누구요?"하고 물었다. 멀쩡히 걸어가던 그가 순간 두 손을 땅에 짚고 엉금엉금 기어가며 하는 말, "나 개(犬)요."
어느 날 또 다시 대취한 그가 통금이 넘은 새벽, 대로를 걸어 귀가하고 있었다. 누군가 그의 앞길을 가로막고 섰다. 무거운 눈꺼풀을 겨우 올리고 앞을 바라보니, 그는 얼마 전 "거, 누구요?"하던 그 순경이 아닌가. 그는 불현듯 대로 한 가운데 대자로 쓰러져 누우며 순경에게 말했다. "나는 사체(死體)요!"
잠시 경주에 살던 때의 일이었다. 달빛이 교교한 어느 야밤, 여전히 술에 대취한 그가 황오리 집으로 가던 중 쪽샘이 있는 언덕받이에 이르렀다. 앞에는 푸릇푸릇한 잔디밭이 펼쳐져 있었는데, 그는 무심코 거기에 들어가 냉큼 드러누웠다. 걱정 근심없이 시원한 그곳에서 그는 지그시 눈을 감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옛날에 금잔디 동산에 매기 같이 앉아서 놀던 곳…"
얼마나 지났을까. 경주고교 학생 넷이 등교하는 중인데, 어디선가 익숙한 노래소리가 들려왔다. 주위를 휘 둘러보니, 누군가 풀섶에서 '매기의 추억'을 부르는 게 아닌가! 그들 가운데 둘이 바지를 걷고 들어와 그를 부축했다.
"선생님, 빨랑 일어나이소. 와 미나리밭에 누워 계십니껴?"
"뭐, 미나리밭이라고?"
겨우 일으켜 세워진 그가 방금 자기가 누웠던 자리를 내려다 보니, 그곳은 잔디밭이 아니라 미나리꽝 진흙탕이었다.
벗들은 그를 소천(笑泉)이라 불렀다. 그와 함께 있으면 웃음이 샘물처럼 솟아난다는 의미였다. 무엇보다 술은 그 웃음의 원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