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시절이었을까? 울산에 살던 이쁘장한 사촌누이가 우리집에 놀러온 적이 있었다. 들풀이 무성한 시골의 어느 여름날이었다. 귀뚜라민지, 쓰르라민지 모르겠다. 어쨌든, 가까이서 벌레소리가 들려오는 어느 여름밤이었을 게다. 나는 갓 배운 클레멘타인을 나즈막히 노래했다. 내가 노래하던 그때, 그녀는 더 나즈막한 목소리로 화음을 실어주었다. 바로 그때, 나는 화음의 풍요로움과 그 매력을 처음으로 느꼈다.
그러나 그때만해도 "넓고 넓은 바닷가에 오막살이 집 한채 / 고기잡는 아버지와 철모르는 딸 있네 / 내 사랑아 내 사랑아 나의 사랑 클레멘타인 / 늙은 아비 혼자 두고 영영 어디 갔느냐"는 노랫말에도 적잖이 매료되었다. 알고 보니, 본디 노래의 의미는 그것이 아니었다. 의미를 알고 싶은 분은 아래를 참조하시라. 2014. 3. 21 들풀처럼
Clementein은 미국 서부개척시대의 "포티-나이너(forty-niner)"들이 슬픔을 달래기 위해서 불렀던 노래였다. 노래에 나오는 "포티나이너"란 일확천금의 꿈을 안고 황금을 캐기 위해 캘리포니아의 광산으로 몰려든 사람들을 말한다.
1840년대 후반, 캘리포니아의 어느 제재소에서 일하던 목수에 의하여 시작된 골드러시는 당시 미국 사회를 열병으로 끓어 오르게 하였다. 각국 각지에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황금을 찾아서 북부 아메리카의 강변으로 몰려들었다.
모두가 직장을 팽개치고 노다지를 캐기 위해 광산으로 향했다. 그중에는 공무원도 있었고 신문기자도 있었으며, 군인·의사·판사 등도 섞여 있었다. 때문에 공장과 사무실은 휴업을 하고, 선원들이 모조리 빠져나가는 바람에 선원들을 구하지 못해 선주들은 배의 운항을 중지할 정도였다고 한다.
미국인뿐만아니라 유럽·남미·중국 등 외국에서도 수십만의 사람들이 캘리포니아로 몰려들었다. 이들은 광부가 되어 1848년부터 1858년까지 약 10년 동안 5억5천만 달러어치의 금을 캘리포니아의 광산에서 캐냈다. 물론 당시로서는 아주 큰 돈이었지만, "포티나이너"들 모두가 거부의 꿈을 이룬 것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포티나이너"들은 열악한 조건에서 가혹한 노동과 혹독한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렸다.
거친 노동과 부실한 식사로 인한 영양실조와 인디언의 습격으로 죽어가는 사람도 수없이 많았다. 힘들게 일을하고 집에 들어가면 숭숭 구멍뚫린 지붕에선 비가 새고 편안히 쉬어야 할 방안에는 독사가 또아리를 틀고 있기가 일쑤였고, 옷은 제대로 입을 수도 없었다.
그렇게 자신들이 피땀 흘려 캐낸 황금이 뉴욕과 샌프란시스코 등 돈많은 자본가들의 배를 불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허탈감에 사로잡힌 "포티나이너"들 사이에서는 자조적인 노랫가락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동굴과 계곡에서 금맥을 찾는 한 포티나이너에겐 클레멘타인이라는 딸이 있었지..... "
이렇게 시작하는 '나의 사랑, 클레멘타인'이라는 노래는 "포티나이너"들의 슬픔과 눈물이 담긴 상실의 노래였던 것이다. 이 노래가 우리나라에 전해진 것은 3·1운동 직후부터라고 한다. 소설가 박태원씨에 의해 우리의 정서에 맞게 가사가 바뀐 이 애조 띤 노래는 당시 나라 잃은 슬픔에 절망하고 있던 우리 민중 사이에서 널리 애창되기 시작했다.
※ 위의 밑줄 친 부분은 아래와 같이 수정하겠습니다. 대구음악연구의 태두이신 손태룡 선생님(한국음악문헌학회장)께서 수정사항을 지적한 까닭입니다. 지적에 깊이 감사드리옵니다.
'나의 사랑, 클레멘타인'의 가사를 번역한 사람은 대구출신 음악가 박태원(朴泰元 1897-1921)이다. 그는 '오빠생각', '동무생각'을 작곡한 박태준의 친형으로, 대구 계성학교와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와세다대학 영문과에서 수학하던 도중 폐병으로 24살에 요절하였다. 그는 "켄터키 옛집에 햇빛 비치어, 여름날 검둥이 시절"로 시작하는 포스터의 '켄터키 옛집'을 번역하기도 했다. 손태룡, "박태원, 대구지역 혼성합창의 창시자", 『음악문헌학』창간호(한국음악문헌학회,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