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메일 한 통을 받았다. 인터넷을 검색하다 우연히 내 이름을 발견하고, 여기저기 검색을 거듭한 끝에 겨우 내 메일을 알아냈다는 것이다. 그러나 혹시 동명이인(同名異人)일지도 모르는 까닭에, 만약 내가 맞다면 답장을 달라는 것이었다. 아, 늘품 없는 서생(書生)도 어김없이 찾아주는 문명의 이기(利器)여! 그는 20여 년 동안이나 까맣게 잊고 지낸 친구였다. 이따금 그의 소식이 궁금했으나, 찾을 길이 없었다. 전화번호 수첩을 강가인지 바닷가에서인지 잃어버리면서 그도 덩달아 잊힌 것이다.
잊고 지낸 친구로부터 받은 메일 한 통
누구나 그러하듯 내게도 문학소년 시절이 있었다. 까까머리 시골 중학생 때 처음 만난 그와는 3년 내내 같은 반에서 지냈다. 학교 도서관에 갈 양이면, 그는 저녁해 지는 줄도 모른 채 무협지에 탐닉했고, 나는 시나 소설, 혹은 수필을 읽었다. 이때 김유정의 '봄봄'에 '동백꽃'이 피었고, 이은상의 '무상(無常)'에서 꽃이 떨어졌다.
3학년 때 나는 '토지'라는 단편소설을 쓴 적도 있다. 평화로운 농촌에 경지(耕地) 정리가 시작되면서 오랜 이웃 간에 불화가 생기고, 급기야 이웃의 아들과 딸인 소년과 소녀조차 남남이 된다는, 자못 심각한 줄거리였다. 지금 생각하면 유치찬란한 이야기지만, 당시에는 밤도 하얗게 지새울 만큼 내 나름대로 공 들였던 작품(?)이다.
우리는 시(詩)라느니, 소설이라느니를 끼적거리며 놀다가 둘 다 같은 고등학교까지 진학했다. 그러나 한번도 같은 반이었던 적이 없었기에, 어깨너머로 그의 동태를 지켜 볼 따름이었다. 어쩌다 내가 청소 않고 도망갔다가 걸려 이튿날 교무실에 끌려갈 양이면, 그는 수업료를 못 내서 바닥에 꿇어앉아 두 손을 들고 있었다. 가난한 살림 탓에 그는 도시락은커녕, 점심값도 없어 수돗물로 배를 채우는 일이 잦았다.
이 무렵 나는 즐겨 그의 고향에 놀러갔다. 이순신 장군이 해전을 벌였다는 안골포(安骨浦) 언덕배기에는 아직 성터가 남아 있고, 그곳에서 동네 친구들과 어울려 소주를 마시는가 하면, 포터블에 '섹시 뮤직'이나 '펑키타운'을 걸어 놓고 흐드러지게 춤도 추었다. 그날 밤 술에 취한 그가 퀭한 눈으로 바다의 은빛 비늘을 바라보며 내게 말했다. 자기는 엄마가 셋이나 된다고, 그러나 친모는 벌써 죽었다고.
가끔 우리는 가곡 '그네'의 작곡가인 금수현 선생이 언덕 중턱에 지은 안골 음악촌에 놀러갔다. 금 선생님은 이곳에서 "안골포 언덕에서 가덕도 바라보니, 바다가 호수인가 호수가 바다인가…"로 시작되는 가곡 '안골포'와 오페라 '장보고(張保皐)'를 썼다. 여름방학이 되면, 음악촌에는 으레 작곡이나 연주연습을 위해 서울에서 내려온 쟁쟁한 음악가들도 있었다. 우리는 소주와 오징어를 사 들고 금 선생님을 만나 음악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나는 곧장 대학에 들어갔고, 대학 갈 처지가 못 되었던 그는 한겨울 매운 바람을 맞으며 서해안 오징어잡이 배를 탔다. 서너 달 고생 끝에 번 돈으로 그는 내가 다니던 학교까지 찾아와 거나하게 술을 샀다. 어느 때는 낚싯바늘 공장에서 봉급을 탔다며 회도 사 주었다.
"곁에 있어도 그댄 나를 모르네"
급격히 시력을 잃게 된 그는 곧 낚싯바늘 공장에서도 쫓겨났다. 부득이 시각장애인 시설에 들어가 안마와 침술을 배웠다. 20년이 지난 지금, 침술에 명리학까지 익힌 그는 서울에서 제법 명망을 가진 '지당 선생(知堂 先生)'이 되었다. 다시금 보내온 메일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밥은 방금 한 밥이 맛있고, 술은 오래된 술이 맛있고, 괴기는 비싼 괴기가 맛있다지만, 친구는 금방 사귄 친구도 오래된 친구도 돈 많은 친구도 아닌,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최고라네.'
그리고 요즘 그가 좋아한다는 심신의 '그림자'라는 히트곡도 보내왔다. "…곁에 있어도 그댄 나를 모르네. 아무 것도 난 해줄 수가 없네. 영원히 그대 사랑 한 번 받지 못하는 나는 어두운 그림잡니다. 나는 어두운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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