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浩溪 金昌旭 2011. 1. 27. 12:16

 


얼마 전, 어느 작은 술자리 모임에 나갔다. 20대의 새파란 청춘들이 대부분을 차지했고, 주뼛주뼛 겨우 자리를 잡은 나는 희끗한 40대의 중년이었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안주 삼아 몇 순배의 술잔을 들이켰다. 청춘들이 권하는 술잔에 중년은 어느새 불콰한 얼굴이 되었고, 젊은 남녀들의 희희낙락하는 품새에 중년은 문득 잃어버린 옛사랑이 그리워졌다.
 
님에서 그대, 너로 바뀐 가요 노랫말
 
간밤을 하얗게 새우며 쓴 편지를 빨간 우체통에 넣고, 비둘기떼 부산스레 모이를 쪼는 공원 벤치에서의 첫 약속, 며칠 간의 가슴앓이 끝에 가까스로 고백한 사랑, 다시 몇 차례의 만남과 헤어짐. 문득 나는 '그대'가 그리워졌던 것이다. 때마침 눈에 띈 맞은 편 젊은 처자에게 나는 넌지시 "그대"라 불러보았다. 한없이 낮고 짐짓 부드러운 목소리로.
 
웬 그대? 젊은 그 처자는 이내 생뚱맞다는 표정을 짓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차, 술은 옛술 그대로이되 사람은 옛사람이 아니었더라. 그 옛날 사랑의 대상을 지칭했던 '그대'라는 말도 어언 낡은 책갈피 속에서 누렇게 변색된 네잎 클로버일지 모른다.

그러고 보면, 대중의 삶을 가장 잘 반영한다는 대중가요 노랫말에서의 '그대'도 여러 차례의 변화를 겪었다. 일제 강점기와 광복 이후 1960년대까지의 노랫말에는 유달리 '님'이 많이 붙여졌다. '흘러간 그 옛날에 내 님을 싣고…'(김정구, 눈물 젖은 두만강), '선창가 고동소리 옛님이 그리워도…'(백년설, 나그네 설움), '님께서 가신 이 길은 영광의 길이옵기에…'(심연옥, 아내의 노래), '미아리 눈물 고개 님이 넘던 이별 고개…'(이해연, 단장의 미아리 고개)가 그것이다. 노래가 나온 시기는 조금 다르지만, '눈물 젖은 두만강'과 '아내의 노래', 그리고 '단장의 미아리 고개'의 님은 아내의 남편을 지칭하고, '나그네 설움'에서의 님은 나그네의 이별한 여인을 가리킨다.

1970~1990년대에 이르러서 이전의 '님'은 '그대'나 '당신'으로 대체된다. '커피 한 잔을 시켜 놓고 그대 올 때를 기다려 봐도…'(펄시스터즈, 커피 한 잔), '사랑해 당신을 정말로 사랑해…'(은희, 사랑해), '창가에 서면 눈물처럼 떠오르는 그대의 흰 손…'(조용필, 창 밖의 여자), '당신도 울고 있네요 잊은 줄 알았었는데…'(김종찬, 당신도 울고 있네요) 등이 그렇다. 이 시기의 노랫말은 상대가 남자든 여자든, 사랑하는 대상에게 존중의 의미를 담은 경어를 쓴다.  

그러던 것이 1990년대 이후에는 상대방을 '너' 혹은 '니'로 부르기 시작한다. '믿을 수 있나요 나의 꿈속에서 너는 마법에 빠진 공주란 걸…'(클래식, 마법의 성), '난 너를 믿었던 만큼 내 친구도 믿었기에…'(김건모, 잘못된 만남), '언젠가 니 곁에 가게 되는 날 그때 내가 너의 손에 끼울게…"(조성모, 슬픈 영혼식) 등이 그러하다. '너'와 '니'는 이전의 '님'이나 '그대', 혹은 '당신'보다 더 가깝고 친근한 느낌을 주지만, 사랑의 대상에 대한 존중이나 배려는 오히려 약화되었다.  

낮고 작고 느린 '무거운 삶' 살고 싶어 

2000년대 이후, 특히 댄스가수의 노래는 이전에 비해 훨씬 파격적이다. 빠른 비트에 선정성은 물론, 상대방에 대한 반말과 막말, 조롱을 담은 노랫말을 여과없이 내뱉는다. '이리 걸어오겠지 살짝 올려 보겠지 헤이 걸 오늘밤 어떠냐고 내게 묻겠지…'(이효리, 헤이 걸), '헤이 헤이 걸 왓 튜 원트 포 미 새로운 세계로…'(빅뱅, 크레이지 독), '넋이 나간 녀석들은 침을 흘리고 아주 웃기고 하하하하…'(서인영, 신데렐라) 등이 그렇다. 상대방에 대한 존중은커녕, 그들 상호 간은 오직 성적 욕망과 소비를 위해 존재할 따름이다. 아,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여! 

아날로그적 삶이라 비웃어도 좋다. 나는 조금은 더 무거운 삶을 살아가고 싶다. 낮은 것에, 가까운 것에, 작은 것에, 느린 것에 좀 더 관심을 두련다. 때때로 나는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리라. 길고 오랜 편지를 쓰리라. 만년필로 꾹꾹 눌러 쓴 편지에서 나는 '그대'를 부르리라. 마침내 빨간 우체통을 찾아 편지를 넣고, 가슴 설레며 답장을 기다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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