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욱의 '음악의 날개 위에' ⑥
사랑의 묘약 약발 ... 두 달만에 여의사와 웨딩마치
『국제신문』 2006. 8. 14
음악평론가
테너 K씨는 부산을 대표하는 오페라 가수라 할 만하다. 그는 지금까지 400여 회에 이르는 크고 작은 무대에 섰고, 특히 베르디·푸치니·마스카니·도니제티 등 19세기 이탈리아 오페라의 주역가수로 빛을 발했다. 강력하고 매끄러운 성질(聲質), 폭넓은 음역과 매력적인 고음, 자유로운 다이내믹과 극적인 표현력 등이 그를 무대의 중심에 우뚝 서게 만든 것이다.
그런 그가 장가를 든 것은 다소 늦은 나이였다. 서른 여섯에 늦깎이 혼례를 가까스로 치렀기 때문이다.
여지껏 그는 오페라 무대에서 숱한 여자들 속에 파묻혀 지냈다. 그러나 그의 즐거움은 오래 가지 않았다. 누군가로부터 목 졸려 죽거나, 총 맞아 죽거나 매번 죽음을 당하는 것이 그가 맡은 배역의 대부분이었던 까닭이다.
푸치니의 '외투'(Il Tabarro)에서 그(루이지)는 화물선 선원이었고, 선주 미켈레의 아내 죠르제타를 꼬여 내서 불륜의 관계를 맺는다. 이 사실을 눈치챈 미켈레의 손에 그는 목졸려 죽는다. 또한 같은 작곡가의 '토스카'(Tosca)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주인공인 그(카바라도시)는 정치범 안젤로티를 숨겨주었다는 이유로 경시총감 스카르피아의 총에 맞아 숨을 거둔다.
그뿐이 아니다. 마스카니의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Cavalleria Lusticana)에서 그(군대에서 갓 제대한 투리뚜)는 옛 연인 롤라가 마부 알피오와 결혼한 사실을 알고 알피오와 결투를 벌인다. 그러나 힘센 알피오의 손에 결국 죽임을 당하고 만다.
오페라에서 다소 행복한 죽음을 맞은 경우라면, 베르디의 '아이다'(Aida) 정도라고나 할까. 여기서 그(이집트의 라다메스 장군, 아이다의 연인)는 아이다의 연적인 암네리스의 질투로 말미암아 연인과 함께 감옥에 갇혀 죽음을 맞는다.
기껏해야 죽음뿐인 오페라 무대에서 겨우 해방된 것은 1990년 10월에 공연된 도니제티의 희가극 '사랑의 묘약'에서였다.
'사랑의 묘약'은 그를 순박한 시골총각 네모리노로 만들었다. 그는 대농장주의 어여쁜 딸 아디나를 사랑하지만, 끝내 사랑 고백도 못하는 숙맥이다. 그러던 그가 엉터리 약장수 둘카마라에게 속아 사랑의 묘약(妙藥)을 사는데 돈을 몽땅 다 날려버린다. 이 묘약을 먹기만 하면 누구라도 자신이 원하는 사랑을 얻을 수 있다는 둘카마라의 새빨간 거짓말에 귀가 솔깃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웬걸, 아디나의 사랑은 좀처럼 오지 않았다. 그래서 약이 좀더 필요했지만, 그는 더 이상 돈이 없었다. 부득이 약값을 구하기 위해 입대를 결심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아디나는 그의 순수한 열정에 감동, 마침내 그와의 결혼에 이르게 된다.
그는 오페라 밖의 현실 속에서 그런 일이 좀 생겼으면 싶었다. 둘카마라 같은 자에게 속아 돈을 탕진하더라도 제발 장가 한 번 가 보고 싶었다. 인생이 비극이든 희극이든 그에게는 무엇보다 장가 드는 일이 중요했다.
그러던 어느날, 성가대를 지휘하는 교회의 목사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가끔 들르는 치과에 여의사가 있는데, 여간 예쁘고 상냥한 게 아니라는 거였다. 더구나 아직 미혼이라 하니, 한 번 만나 볼 생각이 없느냐는 것이었다. 그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만사를 제쳐 놓고 주선에 응했고, 곧 약속이 정해졌다.
처자가 수줍은 듯 고개를 들어 인사했다. 이따금 그녀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녀가 웃을 때마다 흐린 불빛이 환히 밝아져 왔다. 그녀는 어여뻤고, 마음 씀씀이도 넉넉했다. 더구나 그녀는 그에 대한 적잖은 호감을 보였다.
'오페라 때 먹은 묘약이 이제야 약발을 받는 건가?'
두 사람은 불과 2개월 만에 웨딩마치를 울렸고, 남부럽지 않을 만큼 아이도 가졌다. 그러나 무심한 세월은 어느덧 15년이나 흘렀다. 묘약의 약발도 웬만큼 떨어진 탓일까.
"가까이 오지 마, 나 오늘 되게 피곤하거든!"
이제는 묘약보다 보약(補藥)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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