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문화

다시 읽기: 산새, '응새' 되어 날다

浩溪 金昌旭 2017. 6. 16. 08:31

 

 

김창욱의 '음악의 날개 위에'

배포 좋은 성악가도 잊어버린 가사엔 진땀

국제신문 2006. 9. 11


음악평론가


이미 세상을 떠난 테너 손동석은 만학의 성악도였다. 1935년생이었던 그는 1967, 그러니까 33세의 나이에 계명대 성악과에 입학했다. 그런 그의 음악적 열정은 실로 대단한 것이어서 44세에 대학원 졸업하고, 내친 김에 미국유학을 떠날 정도였다


그는 유별나게 음감이 뛰어났다. 뿐만 아니라 그의 부드럽고 섬세한 목소리는 능히 탁월한 리릭 테너의 반열에 올릴 수 있을 만하다. 특히 그는 음악 이외에 또 하나의 비상한 재능을 갖고 있었으니, 그것은 우스갯소리를 누구보다 잘 구사한다는 것이었다. 그의 능수능란한 재담은 항용 주위 사람들을 불러 모았고, 그들 가운데 배꼽이 빠져 자지러지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벌써 15년은 되었으리라. 어느 날 대구문화예술회관에서 창작가곡발표회가 열렸다. 이 행사는 이미 70년대 경북음악협회 회장이었던 고 김진균(경북대 교수) 박사에 의해 처음 만들어졌다. 지역문화의 활성화를 목표로 대구·경북지역의 시인 및 작곡가들이 참여, 매년 1, 2편의 예술가곡을 작곡, 발표하는 옴니버스 형식의 무대였다.

 

당일 발표회 현장에는 창작곡 작곡자는 물론, 가사를 제공한 시인, 녹음을 위한 라디오방송국 엔지니어, 그리고 신작 노래를 듣고자 하는 청중들이 빽빽하게 자리를 메웠다. 그들의 손에는 갓 나온 창작가곡의 악보집이 들려져 있었다. 이들은 한 장 한 장 악보를 넘기며, 잇따라 출연하는 성악가들의 노래에 귀를 쫑긋 세웠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손동석은 무대 뒤 대기실에서 예의 그 뛰어난 입심으로 한껏 재담을 풀어 놓고 있었다. 모두들 박장대소에 포복절도할 무렵, 마침내 자신이 무대에 나설 차례가 왔다.

 

웃음을 거둔 그는 황급히 무대로 나아갔다. 어깨까지 늘어진 장발을 출렁거리며 무대에 선 그(70년대 장발단속에 단골로 걸렸다)는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객석을 휘 둘러보았다. 옆에는 강석중(경남대 초빙교수) 작곡의 신작악보가 보면대 위에 얹혀져 있었으나, 귀찮게 다시 들여다 볼 필요는 없었다. 이미 몇 번씩이나 연습했을 뿐 아니라, 가사도 낱낱이 외웠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피아노 전주가 나왔고, 곧 그의 노래가 시작되었다.

 

"저녁 연기 떠오르는 / 저 언덕 너머 / 산새는 물 한 모금"

 

선율적이고 서정적인 노래였다. 그것은 부드럽고 섬세한 그의 목소리와 너무나 잘 맞아 떨어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노래가사가 잘 떠오르지 않았다. '저 언덕 너머' 뒤에 나오는 가사가 분명히 새는 새인데, 그것이 '산새'인지 '물새'인지가 헷갈리는 것이었다. 그러던 중 피아노의 잔물결같은 반주는 어느새 새의 부리까지 넘실대고 있었다.

 

'에라, 모르겠다.'

 

산새든 물새든 두 놈 중 하나는 분명하므로 확률은 50%. 비로소 그는 '물새'를 낙점, "물새는 물 한 모금"을 용감하게 불러 제꼈다. 그리고는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천연덕스럽게 뒷 노래를 이어갔다.

 

간주가 끝나고, 다시 노래가 시작되었다. 헷갈리는 그 놈의 새는 후반부에 와서 또 다시 등장했다. 새가 출몰할 때에 이르자, 반주 리듬이 더욱 빨라지는 것 같았다. 피아노의 트레몰로(인접하지 않는 두 음이나 화음을 교대로 반복하는 연주기법)가 마치 적군이 진주해 오는 것처럼 가슴을 조여왔다 

 

작지 않은 배포를 가진 그였으나, 이번에는 영 자신이 없었다. 철새, 황새, 깔새는 물론, 노새, 뱁새까지 새란 놈들은 죄다 생각났다. 그렇지만 도무지 헷갈리는 그 놈의 새는 좀처럼 잡히지 않았다. 엉겁결에 그는 앞 글자를 빼고 어물어물하다 그냥 '응새'로 불러 버리고 말았다. 순간, 객석 여기저기서는 청중의 웃음소리가 연방 터져 나왔다.

 

그래도 '응새'는 그 부드럽고 섬세한 깃털을 나폴거리며, 여전히 높푸른 가을하늘을 한껏 비상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