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문화

다시 읽기: 어느 콘트라베이스 연주자

浩溪 金昌旭 2017. 7. 9. 08:50


김창욱의 '음악의 날개 위에' ⑩

청중에게 제대로 된 음악 들려줄 수 있다면…

국제신문 2006. 10. 2 (15)


음악평론가


콘트라베이스는 서양악기 가운데 가장 덩치가 크다. 오케스트라에서 최저음을 담당하는 그것은 따스하고 편안한 음색, 깊고 풍부한 표정, 중후하고 웅장한 음향이 특히 매력적이다. 그런 연유로, 독일 작가 쥐스킨트(P. Suskind 1949- )는 모노 드라마 '콘트라베이스'에서 주인공의 입을 빌어 다음과 같이 역설한다.

 

"지휘자는 없어도 되지만 콘트라베이스만은 빼놓을 수 없다는 것을 음악을 아시는 분이라면 누구나 인정할 겁니다자고로 오케스트라라는 명칭을 얻으려면 베이스가 갖춰져 있어야만 가능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훌륭한 건축물이 완성되려면 토대가 중요하듯, 오케스트라의 기초는 무엇보다 탄탄한 저음을 책임지는 콘트라베이스라는 사실을 주인공 연주자는 거듭 강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콘트라베이스는 여전히 투박한 몸뚱이로 둔탁한 소리를 내며, 연주자는 언제나 변함없이 오케스트라의 뒷자리를 지키고 있다. 청중들은 그에게 좀처럼 눈길을 보내주지 않는다. 그들의 시선은 오직 지휘자나 몇 명의 독주자를 향해서만 꽂혀 있다.

 

콘트라베이스 연주자 권명국 씨는 40대 초반이다. 연주생활을 시작한지도 어느새 20년이 넘었다. 그는 연주자들 사이에서 흔히 '연습벌레'로 통한다. 연주회가 있거나 없거나 매일 두 시간 이상은 꼬박 연습에 매달리는 까닭이다. 그가 연습에 열중하는 것은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연주가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에게는 다만 열심히 노력해서, 청중들에게 제대로 된 음악을 들려주고자 하는 소박한 바람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일까. 빈 방에서 홀로 연습할 때가 그에게는 가장 평안하고 행복한 시간이다.

 

1990, 그가 대학을 졸업하고 첫발을 내디딘 곳은 울산시향이었다. 청운을 꿈꾸었던 그는, 그러나 불과 110개월만에 악단생활을 접고 말았다. 악단은 그가 생각하는 삶의 두 가지 조건, 즉 돈과 공부 가운데 하나라도 충족시켜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악단을 박차고 나온 그는 음악을 계속하기 위해서 돈을 벌어야 했다. 그는 3년간 외판원으로 나섰다. 그가 파는 품목은 백과사전류, 문학전집류, CD음반전집류, 그리고 파카 글래스(인조수정으로 만든 컵) 셋트 등이었다. 물품판매가 신통찮을 때는 버스 정류소 앞의 부스 만드는 작업에 일당 5만 원짜리 '노가다'로 일하기도 했다. 그럭저럭 돈을 좀 모았다. 그래서 그는 94년 마산시향 오디션에 당당히 응시, 81의 치열한 경쟁을 뚫고 화려하게 입성했다.

 

"녹이 많이 슬었군!" 객원지휘를 맡은 박성완 교수의 지적이었다. 그는 자신의 녹슨 연주력에 기름을 칠하며 후일을 도모했다. 425000원의 첫 월급이 이듬해 50만 원, 2000년에 65만 원까지 올랐다. 그렇지만 이제 한 가정의 가장이 된 그로서는 그 돈으로 아내와 두 아이를 먹여 살릴 수 없었다. 개인레슨이 전혀 없었던 그는 틈만 나면 창원·마산·부산 등지의 시립 및 민간 오케스트라에 게스트로 떠돌았다. 이 무렵 매월 15회 이상의 괄목할 만한 연주회 실적을 올렸지만, 궁핍한 대부분의 민간악단은 자신의 경제력에 그다지 보탬이 되어 주지 못했다.

 

2003년 그는 다시 악단을 그만 두었다. 딱히 돈 버는 기술이 없었던 그는 숯불갈비집에 숯을 대 주는 1t 짜리 짐차를 몰았다. 장사수완이 있어서일까. 110개월 간 울산 전역을 누비며, 무려 500곳의 거래처를 뚫었다. 그러다 아예 25평 규모의 숯불갈비집을 열어 1년여 동안 악착같이 돈을 긁어 모았다. 사정이 나아지면서 그는 인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부산스트링스챔버오케스트라의 후신)의 콘트라베이스 연주자로 또 다시 악단생활을 재개했다. 그러나 그는 돈이 떨어지면 또 다른 일자리를 찾아 나설 것이다.

 

언제나 변함없이 오케스트라의 뒷자리를 지키고 앉은 그의 모습을, 언제라도 다시 만날 수는 정녕 없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