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지기 섭섭하여
망설이는 나에게
굿바이 하며 내미는 손
검은 장갑 낀 손
할 말은 많아도 아무 말 못하고
돌아서는 내 모양을
저 달은 웃으리.
1958년에 나온 「검은 장갑」은 손석우가 작사·작곡했고, 손시향(孫詩鄕)이 노래를 불렀다. 당시 '한국의 이브 몽땅'이라고 불려진 그는 매우 부드럽고 달콤한 음색의 소유자였다. 더구나 빼어난 신사적 풍모는 뭇 여성들의 마음을 온통 휘저어 놓았다.
바쁜 하루 일과를 겨우 끝내고, 어렵사리 연인을 만난다. 그들은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영화도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은 그들을 기다려 주지 않았다. 마침내 성큼 다가선 이별의 시간. 헤어지기 아쉬워도, 가슴 속 할 말이 비록 많아도, 그들은 서로 말 한 마디 남기지 못하고 돌아서고 만다.
60년대식이라고 할까? 스스로 용기 없음을 탄식하면서도, 달빛의 냉소를 온몸으로 받으면서도 '헤어지기 아쉽다', '보고 싶다'는 말 쉬이 못하던 때가 바로 그때였다. 굳이 드러내지 못하고, 가슴 속으로만 삭여야 했던 우리 아부지 세대가 그러했으리라. 그래서일까? 「검은 장갑」은 아부지의 애창곡이다.
우리 아부지는 평생 엄마와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지게를 지고, 리어카를 끌고, 경운기와 트랙터를 몰면서 훌쩍 세상을 건너왔다. 매일같이 들판의 흙바람을 맞으면서 4남매를 모조리 4년제 대학에 보냈다. 해 뜨면 들녘에 나가 벼농사며, 부추농사, 시금치 농사에 세월 가는 줄 모르던 사이, 아부지는 어느새 인생의 황혼을 맞았다.
소낙비가 쏟아지는 초등학교 저학년의 하굣길, 우산을 든 아부지가 빗줄기를 뚫고 오들오들 떨고 있는 아이를 데리러 왔을 때 우리는 얼마나 뿌듯했던가. 장마로 물이 불어나 아부지에게 업혀 학교 갈 때 그 너른 등은 얼마나 따뜻했고, 우리는 또한 얼마나 당당했던가!
어느 한겨울 밤에는 아부지가 고열로 신음하던 아이를 업고 수십 리를 내달리기도 했다. 겨우 도착한 시내 한복판의 소아과. 의사로부터 "아이를 이 지경이 되도록 내버려 두다니, 바보 같이!"라며 면박을 당하고도 아부지는 줄곧 병실을 지켰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이튿날, 아부지는 병원비를 대느라 아침도 걸렀다. 허기진 배를 달래며, 아이를 업은 아부지는 다시 수십 리 시골길을 허위허위 걸어서 돌아와야 했다.
꼭 10년 전, 자식들이 아부지의 고희연을 열었다. 을숙도문화회관 소공연장 무대에는 '황혼의 노래 : ○○○ 선생 고희 기념음악회'라 쓰인 큼직한 플래카드가 내걸렸고, 인코리아심포니오케스트라를 비롯해서 소프라노·테너 등의 독창자가 잇따라 무대에 올랐다.
연주회 도중에 무대에 오른 아부지가 하객들에게 인사말을 건넸다.
"…저는 지금까지 농사를 지으며 살아왔습니다. 밭농사, 논농사에 해 지고 달 가는 줄 모르고 살았습니다. 어느새 자식들 하나둘 시집 장가들고, 그 사이에서 난 자식들의 할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인생의 황혼을 맞은 것입니다…"
무대에 선 아부지가 이따금 목울음을 울었다. 나도 울컥했고, 더러 손수건으로 눈가를 찍어내는 이들도 보였다. 그리고 아부지는 편곡된 오케스트라 반주에 맞춰 애창곡을 불렀다.
"헤어지기 섭섭하여
망설이는 나에게
굿바이 하며 내미는 손…"
아부지의 목소리가 가느다랗게 떨렸고, 마이크를 잡은 손은 가늘고 앙상했다.
검은 장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