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마을 구덕문화공원에 들렀다가 우연히 빗돌 하나 만났다. 시비(詩碑)다. 김종철(金鍾鐵) 시인의 '고백성사: 못에 관한 명상 1'이 새겨져 있다. 알고보니, 그는 부산출신의 시인이었고 '못'의 시인이었으며 소싯적에 읽었던 '재봉'(裁縫)의 시인이기도 했다. '재봉'은 언제 읽어도 맑고 향그럽고 따사롭다. 2023. 4. 10 들풀처럼
못을 뽑습니다
휘어진 못을 뽑는 것은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못이 뽑혀져 나온 자리는
여간 흉하지 않습니다
오늘도 성당에서
아내와 함께 고백성사를 하였습니다
못 자국이 유난히 많은 남편의 가슴을
아내는 못 본 체 하였습니다
나는 더욱 부끄러웠습니다
아직도 뽑아내지 않은 못 하나가
정말 어쩔 수 없이 숨겨둔 못대가리 하나가
쏘옥 고개를 내밀었기 때문입니다
사시사철 눈 오는 겨울의 은은한 베틀 소리가 들리는
아내의 나라에는
집집마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마을의
하늘과 아이들이 쉬고 있다.
마른 가지의 난동(暖冬)의 빨간 열매가 수실로 뜨이는
눈 내린 이 겨울날
나무들은 신(神)의 아내들이 짠 은빛의 털옷을 입고
저마다 깊은 내부(內部)의 겨울바다로 한없이 잦아들고
아내가 뜨는 바늘귀의 고요의 가봉(假縫),
털실을 잣는 아내의 손은
천사에게 주문받은 아이들의 전생애(全生涯)의 옷을 짜고 있다.
설레이는 신(神)의 겨울,
그 길고 먼 복도를 지내 나와
사시사철 눈 오는 겨울의 은은한 베틀 소리가 들리는
아내의 나라,
아내가 소요하는 회잉(懷孕)의 고요 안에
아직 풀지 않은 올의 하늘을 안고
눈부신 장미의 알몸의 아이들이 노래하고 있다.
아직 우리가 눈뜨지 않고 지내며
어머니의 나라에서 누워 듣던 우뢰(雨雷)가
지금 새로 우리를 설레게 하고 있다.
눈이 와서 나무들마저 의식(儀式)의 옷을 입고
축복 받는 날,
아이들이 지껄이는 미래의 낱말들이
살아서 부활하는 직조의 방에 누워
내 동상(凍傷)의 귀는 영원한 꿈의 재단,
이 겨울날 조요로운 아내의 재봉(裁縫) 일을 엿듣고 있다.
- 김종철, '재봉'(196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