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규의 「삼색기」(三色旗)라는 시가 있다. 벌써 40여 년 전에 씌어진 것이다. 여기서 삼색이란 흑색, 황색, 녹색을 가리키는데 그것은 관리, 상인, 군인을 각각 상징한다. 당대 사회에서 누구나 선망하던 직종이었다.
안개의 나라에서는 모두들
관리가 되려고 했다
관리가 되어 흑색 제복을 입고
권력을 갖고자 했다
마침내 모두들 관리가 되어버리자
세금을 낼 시민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그들은
당직이나 숙직 근무를 하듯
윤번제로 시민 노릇을 하기로 했다
안개의 나라에서는 모두들
상인이 되려고 했다
상인이 되어 황색 제복을 입고
돈을 벌고자 했다
마침내 모두들 상인이 되어버리자
물건을 사갈 고객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그들은
조합장이나 번영회장을 뽑듯
고객을 선출하기로 했다
안개의 나라에서는 모두들
군인이 되려고 했다
군인이 되어 녹색 제복을 입고
나라를 지키고자 했다
마침내 모두들 군인이 되어버리자
그들이 지켜줄 민간인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그들은
불침번이나 초병 근무를 서듯
병력을 차출하여 민간인으로 복무하게 했다
- 김광규 詩選,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민음사, 2009), 108-109쪽
그러나 나는 이 시를 읽을라치면, 우리시대와 갈수록 우울해지는 미래시대를 떠올리게 된다. 이른바 4차 산업혁명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하던 일을 죄다 인공지능과 로봇이 도맡아 처리하게 되고, 사람들은 모두 쓸모 없는 잉여인간으로 내몰리지 않을까하는 두려움 때문이다. 이에, 나는 '적색'을 더해 다음과 같이 패러디해 보았다.
안개의 나라에서는 모두들
4차 산업 혁명가가 되려고 했다
혁명 전위대가 되어 적색 제복을 입고
세계를 통치하고자 했다
마침내 모두들 전위대원이 되어버리자
그들이 생산한 상품을 팔아줄 인간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그들은
기간제나 아르바이트 일을 하듯
순번을 정해 돌아가며 인간 노릇을 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