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문화

작곡가 하오주 선생

浩溪 金昌旭 2012. 10. 31. 20:01

 

'예술부산' 2012년 11월호(통권 제89호)

    

 

노을빛 산하를 노래하다

   

김 창 욱(음악평론가)

 

금아(琴牙) 하오주(河五柱) 선생을 뵌 것은 참 오랜만이었다. 부산마루국제음악제 개막연주회에서였다(9월 11일 부산문화회관 대극장). 83세라는 연세에도 아랑곳 않고 여전히 얼굴은 해맑은 동안(童顔)이요, 깔끔하게 다려 입은 양복차림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신사의 풍모를 느끼게 했다. 

 

순수하고 토착적인 가곡들

 

1929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난 선생은 다양하고 폭넓은 음악활동을 벌인 예술가로 기억된다. 작곡가이자 음악평론가이며, 음악교육자로서의 족적을 남겼던 까닭이다. 나아가 선생은 1986년 '시조문학', 1989년 '시와 시론'을 통해 정식으로 문단에 데뷔한 시인이기도 하다.

 

그러나 선생에게 있어서는 무엇보다 작곡이 본령이라 할 수 있다. 스스로 "내 이름 오주(五柱)는 다섯 기둥, 즉 오선(五線)을 뜻함이요, 오선을 다듬는 것이 나의 업"이라 밝힌 적도 있기 때문이다.

 

1951년, 22살의 나이에 모교인 금산초등학교 교가를 작곡한 바 있는 선생은 1953년 가곡 '허수아비'로 음악계에 데뷔했다.

 

사람 흉내 제법인데 

상투 끝에 참새는 와 앉았다

네게 눈알을 박아줄까 

너도 너의 그 서러운 위치를 보게 

네게 심장을 넣어줄까 

네게도 온몸에 피가 돌게 

살아서 더 슬픈 허수아비 

네 앞에 너와 같은 내가 섰다. (박기원, 허수아비)

 

선생의 처녀작은 연일 부산으로 떠밀려 오는 피란민, 누더기를 걸쳐 입은 거지떼, 피골이 상접한 아사 직전의 군상들, 뒷골목에 방치된 시체들의 악취 등 6·25의 참혹한 현실에 직면한 선생이 자신의 무력감을 마침내 '허수아비'로 형상화시킨 작품이다. 또한 선생이 악상에 "허탈과 격분의 위치에서"라 표기해 놓은 것처럼 불협화음·비화성음, 2분박과 3분박의 잦은 변박(5/4, 4/4, 6/4, 3/4, 2/4박자가 무려 19차례나 변한다)을 통해 '허탈'과 '격분'의 심상을 극대화시키고 있다.

 

또한 자작시에 선율을 붙인 '어머니'는 자모(慈母)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을 담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전쟁통에 막내아들이 걱정된 어머니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들(작곡자)을 찾아왔던 사연이 회한(悔恨)으로 작용했던 터였다.

 

가시밭 덩굴진 후미진 산길 

오리목 숲속에 이르면 멧새가 운다 

어머니 산소가 여기라고 반겨 우짖는 슬픔

해마다 무덤가에 오가는 계절 

올 여름도 패랭이꽃 꽃피워 놓고서 

기는 어머니… 

 

갈잎이 날리는 차디찬 산골

지난 밤 우짖던 사슴 보이지 않고 

말없이 서 있는 오리나무 

빗돌인 양 섰다 

해마다 무덤에 오가는 계절 

올 겨울도 하이얀 싸락눈 덮고서 

반기는 어머니…. (하오주, 어머니)

 

이후, 선생은 '향수'(1973), '두견새'·'꿈과 근심'·'나룻배'(1974), '구룩구룩 비둘기야'·'풀밭에 누워'(1975), '꽃병'(1977), '달무리 뜨는 밤'(1980), '먼 후일'(1983), '꽃샘바람'(1989), '그대 떠나 보내고'·'오솔길'과 같은 가곡을 잇따라 발표했고, 연가곡 '경이에게', 혼성 4부 합창곡 '무녀'(巫女)를 썼다. 그리고 1975년에는 자작곡집 '허수아비'를 펴내기도 했다. 여기에는 한용운·박목월 등 한국의 대표적인 서정시인의 시를 텍스트로 취함으로써 순수하고 토착적인 가곡세계를 지향하려 했음을 보여준다.

 

그러한 작곡가의 시적·음악적 취향은 고향 금산(琴山)의 호반, 즉 금호(琴湖)의 자연환경에서 얻은 바 크다. 둘레 4.7킬로미터의 천연호수인 금호는 일찍이 빼어난 풍광으로 말미암아 퇴계 이황 선생을 비롯해서 방방곡곡의 시인·묵객들이 앞다퉈 내왕한 곳이기 때문이다.  

 

한국인의 원형질 탐색한 실내악곡들

 

선생의 창작음악은 대체로 80년대 전후해서 성격을 달리 한다. 즉 그 이전의 순수하고 토착적인 음악경향이 무속적이고 민속적인 방향으로 더 한층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전의 창작음악의 중심을 이루던 가곡 대신, 그 이후에는 실내악이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가령 1979년에 발표된 플루트와 피아노를 위한 '운'(韻)을 필두로 현악4중주 F장조(1980), 클라리넷과 다듬이돌을 위한 '조우'(遭遇, 1983), 피아노를 위한 '다섯 폭의 산수도'(1984), 소프라노와 관악기, 타악기를 위한 '장승의 한', 인성과 타악기를 위한 담시곡 '효'(孝), 인성과 관현악을 위한 '회심'(回心) 등이 그것이다.

 

플루트와 피아노를 위한 '운'은 12음 기법과 유동적인 리듬, 현악4중주 F장조는 고전적 형식미가 두드러진다. 또한 클라리넷과 다듬이돌을 위한 '조우'는 동·서양악기의 만남과 원시적인 리듬이 돋보인다. 클라리넷이 음높이(12음 기법)에 비중을 두었다면, 다듬이돌은 음길이, 즉 한국의 민속적 리듬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특히 소프라노와 관악기, 타악기를 위한 '장승의 한'은 작곡자의 실험성 짙은 작품이다. 제1악장은 '상모애상보'(想母哀傷譜)이며, 제2악장은 '영혼의 대화'로 이루어진다. 여기서는 기존 음계에 12음계, 5음계, 조립음계, 복음렬 등의 변용을 꾀하고, 박자 역시 기존 박자에 복합박자 등 유동적인 모습을 보인다. 화성에 있어서도 불협화음의 합성음으로 음악의 긴장도를 한층 강화시킨다. 소프라노는 선율적이기 보다 오히려 신비롭고 절규에 가까우며, 타악기는 음색의 역동성을 부각시켜 준다.

 

이같은 선생의 음악경향, 그리고 장르와 표현기법의 변화는 이 시기 계명대 대학원에서 헝가리 음악의 대가로 손꼽히는 바르톡(B. Bartók 1881-1945)의 민속적 어법을 깊이 연구한 결과로 보인다.  

 

제2의 고향, 부산에서의 40여 년

 

선생은 1950년 진주사범학교를 마치고, 1956년과 1982년에 각각 경남대 문학부와 계명대 대학원 작곡과를 졸업했다. 1952년 부산에 정착한 선생은 동래중·경남여중·동래여고 등지에서 교편을 잡으며, 고(故) 이상근(李相根) 선생 문하에서 작곡을 공부했다. 부산산업대학(현 경성대)과 부산여자대학(현 신라대)에 출강했고, 1986년부터는 부산예술고등학교 초대 음악과장에 취임, 1994년에 정년을 맞았다.

 

또한 선생은 부산의 대표적인 작곡단체인 향신회(響新會)의 초대·2대·4대·10대 회장을 맡았고, 부산음악협회 제5대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특히 선생은 부산음협 창립회원으로 시작해서 사무국장·부회장을 잇따라 지냈고, 회장 재임기(1987-1898)에는 아직 체제가 정립되지 않았던 음협에 500여 회원을 대거 확보함으로써 토대를 굳건히 구축했다. 뿐만 아니라, '청소년음악회'의 정례화, 창작음악문화의 활성화, 부산음협 오페라단 창단과 창작오페라 '춘향전' 공연,  '부산가곡집' 창간 등 부산음협 전반에 걸쳐 기여한 바 적지 않았다.

 

지금까지 선생은 기악곡과 가곡, 합창곡 등 400여 편에 이르는 작품을 썼다. 그리고 가곡집 '허수아비' 출판 및 음반을 출반했으며, 저서 '바르톡 민속어법'과 '음악의 눈으로 본 소련·미국'도 출판했다. 그 밖에 시·에세이·칼럼·논평·음악만필도 500여 편이나 남겼다.

 

그 외에도 부산예총 부회장, 동남아음악문화교류단 단장, 부산시문화상 심사위원, 부산시립예술단 운영위원, 동백문학회 총회장, 부산중등음악연구회 회장, 삼양회 회장, 한국예술가곡연구회 부산지회장, 국제음악애호가협회 부산지회장, 부산MBC-TV 순수음악 심사위원장, 백조음악감상실 전문해설위원, 동래예술문화회 사무총장을 역임했고, 월간지 '월간음악'·'여성통신'·'현장'·'새도덕', 격월간지 '동백문화' 등의 필진으로 참여, 300여 편의 기고문을 남겼다.  

 

귀향, 그리고 새로운 도전 

 

1995년 봄, 선생은 오랜 부산생활을 접었다. 진주시 금산면 용아리 741번지에 금아산방(琴牙山房)을 마련하고, 마침내 그곳으로 귀향한 것이다. 귀향은 해방이자 자유였다.

 

그러나 말이 귀향이지, 좀처럼 쉴 새 없는 생활로 다시금 편입되었다. '경남일보'의 칼럼 요청, 진주시예술단·경남성악회의 작품의뢰에서부터 작곡가의 음악비 건립, 음악비 건립 기념음반 출반, 진주음악 르네쌍스 운동, 기념문집 발간 등의 사업이 잇따랐기 때문이다.

 

2001년 11월 17일 동백문화재단 창립 30주년 기념사업으로 선생의 음악비가 금호에 세워졌다. 음악비는 좌대 위에 달걀형 바위를 올리고, 바위 앞면에 '금아 하오주 음악비'라는 제하에 작곡가의 시 '어머니'가 새겨져 있다. 또한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2003년에는 '금아 하오주 예술가곡' 제2집 CD음반도 출반되었다.

 

2005년은 진주 음악문화의 르네쌍스가 일어났던 시기였다. 즉 진주시는 문화사업으로 진주를 상징하거나, 진주출신의 음악작품, 혹은 진주출신의 시에 작곡한 작품을 골라 악보집 출판 및 CD음반 출반을 시도했던 것이다. 여기에는 '남강의 노래'·'논개의 노래'·'진주의 노래' 등인데, 총 수록곡 275편 가운데 선생의 작품이 30편에 이른다.

 

이와 궤를 같이해서 진주출신 작곡가 10여 명이 모여 '진주사랑 한국작곡가회'가 창립되었고, 선생이 초대 회장으로 추대되었으며, 2006년에는 진주출신의 이상근 작곡가를 기념하는 '이상근 음악제'가 첫 무대를 열었다. 선생은 이 음악제의 집행위원장직을 맡아 지금까지 무보수로 봉사하고 있다.

 

2008년에는 선생의 팔순기념문집 '노을빛 산하의 노래'를 펴냈다. 216매의 사진, 총 550쪽에 이르는 방대한 문집에는 선학·동학·후학을 막론하고 60명의 그림과 175명의 축하글이 실려 있다.

 

한편 선생은 1994년 족집게 도사로부터 "70 나이는 간신히 넘기겠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웬걸, 어언 팔순을 훌쩍 넘어서고 있다. 선생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 아직도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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