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음악평론가 유신(劉信)

浩溪 金昌旭 2014. 6. 11. 07:48

 

부산예총, 『예술부산』 2014년 6월호(통권 제108호)

 

 

 

예술가열전 105

 

초창기 부산음악비평문화의 개척자

음악평론가 유신(劉信)

 

김 창 욱

음악평론가

음악풍경 기획위원장

 

유신(劉信 1918-1994)은 작곡가·국악이론가·음악평론가이다. 다방면에 걸쳐 뛰어난 음악적 면모를 과시한 그는 광복 이후 1970년대 초에 이르기까지 20여 년에 걸쳐 부산에서 음악활동을 벌였다. 특히 이 시기 그의 괄목할 만한 비평활동은 작곡·성악·실내악·관현악·피아노분야 등 초창기 부산음악문화 전반에 걸쳐 이론적 기초를 마련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음악가 유신의 흔적들

 

유신종(劉信鐘)이 본명인 유신은 1918년 전라남도 해남군 화산면에서 태어났다. 소년기 그는 서당에서 천자문·동몽선습·소학·대학 등을 배웠고, 농악과 단가·판소리·산조 등 전통음악을 일상적으로 들으면서 성장했다. 이후 그는 청운의 꿈을 안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오오사카(大阪)에서 중등과정을 마치고, 도쿄(東京) 동양음악학교에 들어가 본격적인 서양음악 수업을 받았다. 1944년 음악학교를 졸업한 그는 귀국 후에도 음악을 좀더 공부하고자 수 차례 일본 밀항을 시도하다 실패하고, 결국 부산에 정착하기에 이르렀다.

 

1947년 유신은 당시 6년제였던 동래중학교 교사로 부임한다. 여기서 그는 취주악대와 악기교본을 만들어 교내 음악회와 운동회 퍼레이드에서 기세를 올렸다. 1953년에는 부산상업고등학교로 자리를 옮겨 개교 이래 처음으로 교내 예술제를 열어 자작 오페렛타를 무대에 올렸고, 1957년에는 경남고등학교로 건너가 합창단을 지휘했다. 자작곡을 편곡한 합창음악을 경연대회 무대에 올려 1등을 차지하기도 했다. 1957년에는 창작동인 ‘그룹A’를 만들어 작곡발표회를 열었다. 멤버로는 유신을 비롯해서 최덕해·함사순·이상근·최인찬 등이었고, 전문 공연장이 없었던 까닭에 주로 예식장이나 극장에서 무대를 열었다. 1958년에 창단된 콜 에오리안 합창단에서 그는 최인찬·김창배·김진안·박영·이상근·고태국 등과 함께 노래를 부르면서 합창편곡도 도맡아 했다.

 

무엇보다 1950-60년대는 음악전문가가 턱없이 부족한 까닭에 실제 연주회는 가물에 콩나듯 했다. 그 대신, 시민들의 음악에 대한 갈증은 대부분 음악감상회를 통해 해소시켰다. 음악감상회는 주로 전문 음악가의 해설과 LP레코드를 통한 음악감상으로 진행되었고, 때때로 문학가들의 시낭송도 곁들여졌다. 여기에는 유신·배도순·고태국·김점덕·김창배·오태균 등의 음악가들이 해설자로 참여했고, 미화당 음악실을 비롯해서 오아시스·비원 등의 다방이 주요한 무대였다.

 

1963년 유신은 한성여대(지금의 경성대 전신) 음악과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런가 하면, 1965-70년에는 부산대·동아대·부산여대에서도 음악강의를 했고, KBS방송국 자문위원, MBC 방송심의위원장, 부산시 문화위원, 부산시향 창단위원, 부산평론가협회장을 지냈다. 이같은 공적으로 그는 1970년 부산시문화상(음악부문)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70년대 초 오랫동안 애정이 깃든 부산을 떠나 서울로 향하고 말았다.

 

 

부산에서의 음악비평활동

 

유신의 음악비평은 1954년부터 1989년까지 대략 750여 편에 이른다. 여기에는 연주평 이외에도 음악관련 시평과 논문들이 포함된다. 1950-60년대 그의 비평은 『부산일보』·『국제신문』 등 일간지를 비롯해서 『경남도지』·『부산문예』·『부대학보』·『수산대학보』 등의 매체를 통해 발표되었다.

 

1950년대는 음악전문가도 많지 않았을 뿐더러 한국전쟁으로 말미암아 음악회가 자주 열리지 않았다. 이 시기 음악비평으로는 해군정훈악대 연주의 사회적 의미를 살핀 박영의 「정훈악대 연주를 듣고」, 1951년 한 해 동안의 부산음악계의 상황을 조명한 윤용하의 「악단 1년 회상기」, 서울대 음악부의 제2회 공연을 다룬 임원식의 「안이성의 초극」, 미국의 알토가수 메리 앤드슨의 독창회를 평론한 윤이상의 「앤드슨 양에게: 당신의 영가는 당신의 피」, 작곡가 채동선의 죽음을 통해 당시 음악가의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토대를 보여준 윤이상의 「빈사한 예술가: 채동선 씨의 작고에」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유신의 본격적인 음악비평은 1955년에 이르러 시작된다. 그 해 7월 학생음악콩쿠르에 대한 「음악교육의 확산과 정서의 환기」, 1956년 2월 부산시민음악회에 대한 「정서지양의 긴급성」, 1957년 부산교향악단 창립에 대한 「부산시향 창립, 절실한 시민의 양식」, 1958년 이상근 작곡발표회에 대한 「이상근의 작품과 개성」 등이 있다. 특히 「음악교육의 확산과 정서의 환기」에서는 예술이 사회의 공유재산이 되어야 하며 음악예술의 사회적 효용의 확산을 위해서 음악콩쿠르의 필요성을 역설했고, 「정서지양의 긴급성」에서는 문화운동을 위해서 음악계의 협회 발족과 연주회장의 설립의 시급함을 지적했다. 또한 중주·합주 등의 그룹운동을 펼칠 것, 그러기 위해서 연주계의 질적·양적 수준 향상이 절실함을 주문하기도 했다.

 

1960년대에 들어와 유신은 더욱 활발한 비평활동을 이어갔다. 더욱이 이 시기 그는 ‘음악평론가’라는 직함을 뚜렷이 드러냄으로써 평론이 음악활동에 있어서 하나의 독립된 장르임을 분명히 했다. 그의 비평에는 시평(時評)은 물론, 창작·연주의 제분야, 즉 작곡·독창·독주·실내악·관현악·오페라 등이 두루 망라되었다.

 

시평으로 주목할 만한 것은 1962년에 창립된 부산시향을 비판한 글이다. 예컨대 당시 시향 운영위원으로 신문·방송계 인사들이 대부분을 차지함으로써 실제 음악가들의 참여가 극소수인 것은 주객전도의 넌센스일 뿐 아니라 음악인들의 의견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는다는 점, 시향의 발전을 위해서는 국내 지휘자의 교환연주, 한국의 국민적 음악연주와 창작곡 위촉 등이 필요하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특히 당대 부산음악의 낙후성을 극복하기 위한 그의 방법적 제안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곧 능력 있는 창작·연주자에 대한 경제적인 뒷받침, 음악대학 설립과 음악학 연구 및 음악과목의 필수교양과목 지정, 초·중·고등학교의 음악시설 강화, 신문을 통한 음악교양의 계몽 등이 그것이다.

 

그 밖에 창작·연주평으로는 이상근·김국진·김원호 등의 작곡발표회, 김봉임·고태국·이인범·이상춘·오일석·임만섭·김진안 등의 독창회, 피델리오·라보엠·돈죠반니·사랑의묘약·토스카 등의 오페라 공연, 주혜정·윤미나·최정순·한동일 등의 피아노 독주회, 한병함 플루트 독주회, 김호현 바이올린 독주회 등이 있다.

 

 

삶과 음악과 역사적 현실에의 비판

 

유신 음악비평의 이상은 두 가지다. 하나는 인간에 봉사하는 음악예술에의 지향, 다른 하나는 한국의 민족적 음악 창출이다. 그 핵심은 다음의 글에 잘 드러난다. 

 

“예술은 인간생활을 위해서 존재하고 창조적인 인간의 삶에 기여해야 한다. 아무리 미를 창조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인간생활의 진실을 격려함으로써 영감을 불러 일으키지 못하면 예술로서의 가치를 인정할 수 없을 것이다. 예술에는 국적이 없어도 예술가에게는 국적이 있다는 것! 국적이 있는 음악가이기에 민족악을 떠올려야 될 사명이 있다.” 유신, 『음예술의 새로운 체험』(삼호출판사, 1987) 중에서

 

즉 그는 음악이 인간 삶에 기여해야만 예술로서의 가치를 획득할 수 있으며, 음악가는 마땅히 민족음악을 추구해야만 국적 있는 예술가로서의 사명을 다하는 것이라 보았다. 특히 민족음악에 관한 분명한 입장은 그의 비평활동 전반에 걸쳐 드러나며, 그가 살았던 시대의 역사적 현실도 적극적인 비판의 대상이 된다. 가령 박원표(朴元杓)의 『開港九十年』(태화출판사, 1966)에 실린 다음의 글이 그러하다. 

 

“쇄국과 정쟁에 여념 없이 「양반이즘」에 몰골했던 이조말(李朝末)에서 일제(日帝)의 간악한 식민정책으로 넘겨진 우리 국가와 민족의 처절한 역사, 이미 기독교를 따라 양악이 들어온 지 해방까지 거의 반세기의 시광이었건만, 씨앗조차 뿌려놓지 못한 역사 상황, 우수한 민족전통과 문화유산을 지녔으면서도 내세울 수 없었던 민족 역경의 계속, 마치 초토 위의 잡초처럼 모진 풍상에 시달려 잠재하고 있는 거창한 서민의 용솟음 치는 「에너지」와 「휴메니티」마저 완전히 거세되고만 문화와 인간 부재의 적막한 강산 이러한 시점에서 어떻게 민족 문화가 싹트고 꽃필 것인가? 이러한 상황은 통탄스럽게도 왜곡된 사회 정기로 말미암아 비틀어진 인간 군상이 오히려 정색(正色)을 하고 활보하도록 만들어 놓았다 …<중략>… 사대적인 노예근성, 풍수(風水)를 믿게 한 소극적인 운명론자, 난세에 과민한 기회주의, 무기력한 방관적인 패배주의, 정치와 도의를 불신하고 중간지대에서 배회하는 회색분자 등, 문화상층의 인간정신을 다루는 예술인들마저 이렇게 인성(人性)과 사회가 퇴색한 정신없는 상황 속에 해방을 맞이했고, 동란을 겪었고, 4·19, 5·16이 지났다. 10년이면 강산(江山)도 변한다는데 정치, 사회, 문화, 인간, 경제 모두가 백년하청(百年河淸)이다. …<중략>… 아직 계몽기에 놓여 있는 우리 양악계는 전수(傳授)의 지도이념(指導理念) 방법, 체계, 조리(條理)도 각자가 지니고 있지 않고, 연구의 국가적 배경이나 개인적 열의도 희박하거니와 아직도 악단이란 것이 형성되어 있지 않다. 일제의 노예교육, 비좁은 교회 안에서 메아리 친 찬송가, 시대의 양악 그 위에 기성 음악가들의 철저하지 못했던 자체의 음악수업, 이러한 조건들에 의해 지지 부진했던 양악의 발전도 겨우 이제부터란 말이 타당할 것 같다. …<중략>… 해방과 더불어 일제(日帝)는 물러갔지만 특히 부산의 지리적 환경은 깊이 뿌리 박힌 식민정책의 잔재로 하여금 문화 발전에 적잖은 장해가 된 것이다. 즉 맥 빠진 비틀어진 인간상들의 생활 양식과 감정 언어 순화, 아첨하는 노예근성, 자포적(自暴的)인 향락주의 특히 유행가의 독소는 오늘날까지 유사한 형태로 시민의 건전해야 할 정서를 침해하고 있잖은가?” 유신, 「해방 후 20년의 부산음악」 중에서

 

앞서 언급한 유신의 처절한 반성은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가 지적한 적폐(積幣), 즉 “사대적인 노예근성”, “난세에 과민한 기회주의”, “무기력한 방관적인 패배주의”가 비단 광복과 6·25 한국전쟁, 4·19 혁명, 5·16 군사쿠데타 시기에만 존재한 것이 아니라, 이후 산업화·민주화·정보화 사회로 이어지는 역사적 과정 속에서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신은 생전에 『보리피리』(1968), 『갯벌』(1973), 『화랑가』(1973), 『꽃댕기』(1975), 『꽃노래 연가집』(1977) 등의 작곡집과 『국악통론』(1983), 『음예술의 새로운 체험』(1987), 『음악감상론』(1988), 『음악연주론』(1989), 『판소리 예술론』(1990) 등의 저작을 남겼다.

 

 

참고문헌

 

김창욱, 『부산음악의 지평』(세종출판사, 2000)

박원표, 『開港九十年』(태화출판사, 1966)

송방송, “유신”, 『한겨레음악대사전』(보고사, 2012)

신설령, “유신 음악비평연구”, 『음악과 민족』 제27호(민족음악학회, 2004)

제갈삼, 『초창기 부산음악사』(세종출판사,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