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음악을 생각한다
스캔 바이 들풀처럼. 한국예술문화비평가협회, 『예술문화비평』 2014년 가을호(통권 제14호) 표지.
다시 음악을 생각한다
김 창 욱
음악평론가
음악풍경 기획위원장
1999년 미국 콜로라도의 한 고등학교에서 평소 따돌림을 당했던 두 학생이 교사와 급우 등 13명을 살해하고 자살했다. 4월 20일, 그날은 공교롭게도 히틀러의 생일이었다. 이 끔찍한 사건 직후 한 인터넷 사이트에 ‘제프 딕슨’의 이름으로 「우리 시대의 역설」(The paradox of our time)이라는 글이 올라왔다.
건물은 높아졌지만 인격은 더 작아졌다
고속도로는 넓어졌지만 시야는 더 좁아졌다
소비는 많아졌지만 더 가난해지고
더 많은 물건을 사지만 기쁨은 줄어들었다
집은 커졌지만 가족은 더 적어졌다
더 편리해졌지만 시간은 더 없다
학력은 높아졌지만 상식은 부족하고
지식은 많아졌지만 판단력은 모자란다
전문가들은 늘어났지만 문제는 더 많아졌고
약은 많아졌지만 건강은 더 나빠졌다
너무 분별없이 소비하고
너무 적게 웃고
너무 빨리 운전하고
너무 성급히 화를 낸다
너무 많이 마시고 너무 많이 피우며
너무 늦게까지 깨어 있고 너무 지쳐서 일어나며
너무 적게 책을 읽고
텔레비젼은 너무 많이 본다
그리고 너무 드물게 기도한다
가진 것은 몇 배가 되었지만
가치는 더 줄어들었다
말은 너무 많이 하고
사랑은 적게 하며
거짓말은 너무 자주 한다
생활비를 버는 법은 배웠지만
어떻게 살 것인가는 잊어버렸고
인생을 사는 시간은 늘어났지만
시간 속에 삶의 의미를 넣는 법은 상실했다
달에 갔다 왔지만
길을 건너가 이웃을 만나기는
더 힘들어졌다
외계를 정복했는지 모르지만
우리 안의 세계는 잃어버렸다
공기 정화기는 갖고 있지만
영혼은 더 오염되었고
원가는 쪼갤 수 있지만
편견을 부수지는 못한다
자유는 더 늘었지만
열정은 더 줄어들었다
키는 커졌지만
인품은 왜소해지고
이익은 더 많이 추구하지만
관계는 더 나빠졌다
세계 평화를 더 많이 얘기하지만
전쟁은 더 많아지고
여가 시간은 늘어났어도
마음의 평화는 줄어들었다
더 빨라진 고속철도
더 편리한 일회용 기저귀
더 많은 광고 전단
그리고 더 줄어든 양심
쾌락을 느끼게 하는 더 많은 약들
그리고 더 느끼기 어려워진 행복.
우리 시대의 진실을 적확(的確)하게 보여주는 아포리즘(aphorism)이다. 때때로 이 글이 제프 딕슨의 것이 아니라는 논란도 있다. 미국 시애틀의 한 교회목사인 밥 무어헤드의 설교라는 이야기도 있고, 어떤 이는 달라이 라마의 가르침이라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제프 딕슨이든, 밥 무어헤드든, 혹은 달라이 라마든 그것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그와 같이 역설적인 시대를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일그러진 우리 시대의 초상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대한민국은 어떤가? “대형 멀티비젼에서는 화사하게 차려 입은 젊은이들이 가볍고 행복한 새 세상을 구가하고” 있을 때 “역사에서는 노숙자들이 여전히 신문지를 덮고 누워자고 지하도 입구에서는 다리 없는 노파가 오늘도 손을 벌리고 엎드려 있”(신경림)지 않는가? 한 걸음 더 들어가 보자.
국민소득 2만 4천불, 총 무역규모가 1조 달러를 넘는 대한민국은 세계 12위의 경제대국이자, 언필칭 ‘문화민족’이자 ‘동방예의지국’이기도 하다. 그러나 근래 대한민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잇단 끔찍한 사건·사고들을 보고 있노라면, 내가 살고 있는 이 나라가 과연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줄 아는 국가(國家)인지 새삼 눈과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국정원·국방부·국가보훈처 등 국가기관이 지난 대선에서 불법으로 개입한 사실이 점점 확인되고 있으며, 공직자들의 부정부패와 공직자들의 뇌물수수는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대선 불법개입으로 지탄 받는 검찰은 ‘권력의 시녀’라는 오명을 벗어나기는 커녕 떡찰과 스폰서 검찰이라는 불명예를 꿋꿋이 감수하고 있다. 경찰은 ‘민중의 지팡이’이라기보다 오히려 민중을 겨누는 몽둥이가 된지 오래고, 심지어 도박·살인·마약밀매·불륜 등의 범죄행각까지 벌이기도 했다.
어디 그뿐인가? 국민의 생존권을 지켜야 할 정부는 대다수 국민이 반대하는 의료 민영화와 철도 민영화를 밀어 붙였다. 쌀 시장 개방으로 식량안보를 무장해제시키는가 하면, 농민들의 설 땅조차 잃게 만들어 놓았다. 또한 정부는 설계수명이 다한 원전을 재가동하고, 가동 중인 26기도 모자라 7기를 더 건설하고 있다. 22조의 막대한 혈세(血稅)를 퍼부은 4대강 사업은 금수강산을 녹조와 큰빗이끼벌레로 들끓게 하고, 허기진 국민들은 고물가·고실업·저임금에 시달리고 있다.
더구나 육군 28사단에서 벌어진 윤일병 폭행 사망사건, 뒤이어 터진 김해 여고생 성매매·폭행·살해·암매장 사건은 인간이 얼마만큼 잔인하고 잔악할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었고, 눈 뜨면 일어나는 강도·강간·살인·자살·납치·폭력이 이제 우리의 친숙한 일상이 되어 버렸다.
국회는 어떤가? 여당은 청와대의 눈치를 보기에 급급하고, 야성과 결기를 잃은 야당은 국민의 의중이 무엇인지 파악할 줄도 모른다. 순한 양으로 길들여진 언론은 권력과 자본의 말을 착하게 받아쓰는데 여념이 없다.
박근혜 정부의 무능과 무책임은 세월호 참사로 말미암아 절정을 이룬다. 300여 명의 아까운 생명이 수장될 동안 마땅히 국민의 생명을 지켜야 할 국가기관이 도대체 어디서 무엇을 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참사가 일어난지 넉달이 지났고, 유가족들이 목숨 건 단식에 들어간지도 이미 한 달이나 지났다. 그러나 국민의 혈세로 녹을 먹고 사는 자 가운데 누구 하나 책임지는 자가 없고, 참사의 원인도 여전히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찾아야 할 음악의 자리
얼마 전 프란체스코 교황이 한국을 방문했다. 그는 강론에서 겸손과 청빈, 대중과의 적극적 소통, 그리고 공동체 정신과 관용을 이야기했다. 특히 그는 인간의 가치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를 강조했다.
“막대한 부요(富饒) 곁에서 매우 비참한 가난이 소리 없이 자라나고 가난한 사람들의 울부짖음이 좀처럼 주목받지 못하는 사회 안에 살고 있는 우리”라 말하기도 하고, “새로운 형태의 가난을 만들어 내고 노동자들을 소외시키는 비인간적인 경제 모델들을 거부하기를 빈다. 우리 가운데 있는 가난하고 궁핍한 이들과 힘없는 이들에게 깊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교황은 미사를 집전하며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을 위해 기도했고, 생존한 단원고 학생과 희생자 유족들을 만나 위로했다. 유족들에게서 받은 노란 리본을 가슴에 달고 미사를 진행했고, 유족들이 순례길에 짊어진 ‘세월호 십자가’를 교황청으로 가져가겠다고도 했다.
그뿐 아니다. 교황은 “세월호 침몰 사건으로 생명을 잃은 모든 이들과 이 국가적 대재난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성모님께 의탁한다. 모든 남성과 여성과 어린이의 존엄성을 모독하는 죽음의 문화를 배척하길 빈다”고 기원하기도 했다. 나아가 그는 “물질주의의 유혹과 무한경쟁의 사조에 맞서 싸우고, 새로운 형태의 가난을 만들어내고 노동자를 소외시키는 비인간적 경제모델을 거부하라”며 단호히 촉구하기도 했다.
교황은 약하고 소외된 사람들, 궁핍하고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힘과 용기를 북돋아주었고, 그들의 생채기를 어루만져 주었다. 그는 고통 받고 있는 우리 시대의 많은 이웃들을 만났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용산참사 유족,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강정마을과 밀양 주민들이 바로 그들이다. 교황이 그들의 손을 마다하지 않고 덥썩 잡아준 것은 바로 위로와 격려를 위해서였다. 정부나 국회, 그들이 의지할 곳이 어디에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문득 음악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궁극적인 물음이 새삼 떠올랐다. 사실 음악의 존재 이유는 많다. 정치적·사회적 이유도 있고, 종교적·미학적 이유도 있다. 화려한 테크닉과 현란한 연주력으로 청중을 압도하고, 그들에게 출렁이는 감동을 선사하는 것도 어찌 의미 있는 일이 아니랴?
이와 함께 우리는 치유로서의 음악의 존재도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소외되고 상처 받은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그들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는 그런 음악과 음악행위도 마땅히 필요하지 않을까? 위로와 격려를 받고 싶어하는 사람은 비단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나 용산참사 유족,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나 강정마을과 밀양 주민들만은 아니다. 치유의 음악이 필요하는 곳은 우리 주위 곳곳에 널려 있다.
고통에 대한 위로는 실의에 빠져 있는 많은 사람들을 구해 내고, 절망과 좌절에 늪에 빠진 그들에게 삶의 의미와 희망을 안겨 준다. 궁극적으로 음악이란, 고통 받는 이웃을 위로하고 격려함으로써 마침내 행복을 이끌어내는 도구이자 수단이 아닐까? 음악이 낮은 곳에 위치할 때 그것은 언제나 우리 곁에서 빛을 발하는 존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http://www.음악풍경.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