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치가 생기는 이유
[아침향기] 음치(音癡)가 생기는 이유
『부산일보』 2017. 7. 24 (31)
김창욱 음악평론가·부산시의회 정책연구위원
초·중등학교 음악 교육은 '음악체험을 통해 음악성을 계발'하고, '풍부한 정서와 창조성'을 기름으로써 '조화로운 인격을 형성케 하는 것'을 그 목표로 삼는다. 다시 말해 학교 음악교육은 엘리트 음악가를 양성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음악을 통한 정서 함양과 인간의 보편적 공감 능력을 끌어내기 위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음악 시간은 무엇보다 즐거워야 한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그것은 길고 오랜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시간이 될 수밖에 없다. 급기야 음악책·음악실·음악 교사와 멀어지고, 평생 음악과 담을 쌓게 되는 경우도 있다.
즐거워야 할 음악 시간에
스승 잘못으로 노래 못 하게 된 사연들
놀이로서 악기 연주하고 노래 불러야
문화적 상상력과 창발성 낳을 수 있어
미학자 P 씨는 음악 마니아다. 하루 종일 집안에 음악을 틀어 놓고 사는 무림의 고수다. 그런 그도 중학 시절 음악 교사 때문에 음악에서 멀어진 적이 있다.
어느 음악 시간이었다. 까까머리 중학생들이 풍금 소리에 맞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런데 신경질적인 음악 선생이 갑자기 자신을 지목하며 냉큼 앞으로 나오라고 소리쳤다. 얼떨결에 불려 나간 그는, 영문도 모른 채 선생의 손아귀에 목덜미를 잡혔다. 그러고는 콘크리트 벽면에 자신의 이마가 연신 찧어졌다. 그가 부른 노래의 음정이 틀렸다는 이유에서였다.
머리를 움켜쥔 그는 이내 자리에 돌아와 앉았으나, 끓어오르는 분노를 견딜 수 없었다. 그는 교실이 떠나갈 듯한 소리를 내질렀다.
"음정이 틀렸으면 바로잡아 주는 것이 음악 교사가 해야 할 일인데, 왜 내 머리를 쥐어박는 거야!"
그는 손에 잡고 있던 잉크병을 음악선생을 향해 날려 버렸다. 선생의 하얀 와이셔츠가 시퍼렇게 물들었고, 선생은 황급히 음악실을 빠져 나갔다. 그 일로 그는 교무실에 불려가 벌을 서야 했고, 봉변을 당한 음악 선생은 이후 학교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심한 트라우마를 앓은 그는 더 이상 노래를 할 수 없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작가 C 씨도 초야에 묻혀 지낸 음악 마니아였다.
그는 중학 시절, 슈만의 '트로이메라이'를 듣고 난생처음으로 음악에서 감동을 받았다. 그 감동은 고교·대학생 시절에도 지속하였다. 당시 풍미한 미화당, 오아시스, 고전, 백조, 필하모니 등의 음악감상실을 잇따라 순례했고, 가톨릭 장례식에서 들려온 모차르트의 '라크리모사'를 듣고 종교에 귀의하기도 했다.
그런 그도 노래를 부르지 못하는 사연이 있었다. 초등 5학년 시절, 담임 선생의 수업은 국어·산수·자연 등 교과서를 읽어 나가는 것이 전부였고, 걸핏하면 아이들에게 노래를 시켰다. 풍금도 못 치는 선생은 한 시간이든 두 시간이든 시도 때도 없이 아이들을 교탁에 불러내어 노래 부르기를 강요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아이가 반기를 들었다. 선생이 아이를 불러내어 노래를 부르게 하자, 키는 작았으나 총명하게 생긴 그 아이는 한동안 입술을 깨문 채 서 있다가 뜻밖에 노래를 부르지 않겠노라고 당당하게 선언한 것이었다. 산수 시간에 노래를 부를 수 없다는 것이 그의 항변이었다.
아이의 말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선생의 솥뚜껑 같은 손바닥이 어린아이를 교단 저 구석까지 날려 보냈다. 연방 철썩거리는 소리가 복도 끝까지 들렸고, 끝내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던 아이는 그 자리에서 혼절하고 말았다. 같은 반 아이들은 긴장과 공포로 온몸을 떨어야 했다. 그 광경을 똑똑히 목도했던 그는 한동안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입이 있으되, 더 이상 노래를 부를 수 없었다.
모름지기 음악은 놀이다. 노래를 부르고, 악기를 연주하는 것은 즐거운 놀이다. 그것은 우리 삶을 풍요롭게 만들고, 그 속에서 정서함양과 공감 능력이 생겨나는 법이다. 놀이는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문화적 상상력과 창발성을 불러일으키는 매우 생산적인 행위다. 요컨대 나와 너, 그리고 우리는 모두 호모 루덴스(Homo Ludens)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