浩溪 金昌旭 2017. 10. 25. 08:03

김창욱의 '나를 적시고 간 노래들' <5>

『인저리타임』 2017. 10. 24 

 

'소녀의 기도'가 실린 이선희의 제1집 앨범

 

 

바람 불면 흩어지는

쓸쓸한 낙엽이 모두

잠에 취한 이슬처럼 아른거려요

 

   <중략>

 

떠난 사랑을 그리워 하는

서글픈 마음뿐인데

혼자 남아서 지켜야 하는

외로움이 나를 울리네

 

   <중략>

 

바람 따라 붙잡지도 못한 아쉬움에

낙엽되어 계절 속에 나를 묻으며

봄이 다시 찾아오길 나는 빌어요

이 밤 지새고 나면.

 

가수 이선희는 1984년 제5MBC 강변가요제에서 J에게로 대상을 받고 가요계에 데뷔했다. 부드럽고 여린 목소리, 그러나 특유의 파워풀한 고음은 젊은 여성들뿐만 아니라, 남성들의 감성까지 사로잡았다. 내 감성도 그녀에게 포획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녀는 수많은 힛트곡을 남겼다. ! 옛날이여를 비롯해서 갈등, 갈바람, 나는 사랑에 빠졌어요등 한 둘이 아니다. 그 가운데 가을이 오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노래가 소녀의 기도. "쓸쓸한 낙엽", "낙엽되어 계절 속에 나를 묻으며" 같은 노랫말이 시나브로 가슴을 적셔왔기 때문이다. 특히 전주에 나오는 피아노의 맑고 투명한 트릴(trill·떤꾸밈음, 악보에 쓰여진 음과 그 2도 위 음의 빠른 반복으로 효과를 내는 연주기법)는 순수했던 나의 감성을 더욱 자극시켰다.

 

나는 19864월에 입대, 1988년 서울올림픽이 끝난 10월에 제대했다. 자대는 충북 증평(曾坪). 병과는 보병이었고, M60이 주특기였다. M60은 람보가 바람을 가르며 무지막지하게 쏘아대던 기관총이었으나, 가녀린 내 어깨가 감당하기에는 꽤나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불행 중 다행이랄까? 행군이나 훈련 때가 아니면, M60을 멜 기회가 별로 없었고, 오히려 그것을 분해해서 닦고 조이고 기름칠하는 일이 더 많았다. 말하자면, 총쏘기보다 총닦기가 주특기였던 셈이다.

 

평시에는 창고의 군수품 개수를 세거나, 총기 닦는 일이 일과였다. 그러나 가끔 바깥 바람을 쇠러 나가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추수철인 가을이 오면, 으레 우리는 인접한 괴산이나 진천 등지로 대민지원을 나섰다. 들녘을 누비며 누렇게 익은 벼를 한참이나 베고 나면, 곧장 막걸리를 곁들인 국수가 새참으로 나왔다. 게다가 폐부 깊숙이 빨았다 내뿜는 은하수 맛은 그 얼마나 향기롭고 달콤했던가!

 

그런데 티없이 맑은 가을하늘을 올려다 보면, 왠지 서러움에 마음이 울컥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상병을 달 때까지 근 1년 동안이나 휴가 한 번 가보지 못했다. 아직도 휴가 못 간 고참이 줄을 서 있었으니까. 남의 속도 모르는 남행열차가 멀리서 기적을 울렸다. 저 열차에 몸을 실으면, 이내 고향에 다다를 수 있을 텐데 아득히 사라져 가는 기적소리에 마음이 시려왔다.

 

집에는 가을걷이를 끝냈을까. 텅 빈 들판의 흙바람을 맞으며 엄마·아부지는 시금치밭을 갈고 있을까. 나락 곳간에 가마니를 쌓아 올리던 큰형은 취직공부를 하고 있겠지. 어쩌면 동네 한량들과 어울려 술판을 벌일지도 모르지. 지금쯤 작은형은 의경을 마칠 때가 됐을 텐데. 누이는 입시준비로 밤 늦게 귀가할 테지. 집 앞에 서 있던 대추나무는 지난 태풍 때 무사했을까. 감나무에 걸린 까치밥은 아직도 남아 있을까.

 

동네 스피커를 통해 라디오의 음악소리가 흘러 나왔다. "바람 불면 흩어지는 쓸쓸한 낙엽이…", "낙엽 되어 계절 속에 나를 묻으며…". 울적했던 가슴이 저며왔다. 저녁이 되자, 바람이 한층 싸늘해졌다. 군용트럭에 실린 나는 쓸쓸한 낙엽처럼 부대(部隊)로 쓸려 들어갔다.

 

소녀의 기도

https://youtu.be/ci1K5LWx5qc

 

김창욱 음악평론가·부산시의회 정책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