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석구석 스며드는 실핏줄
동길산 시인께서 음악풍경과 관련된 칼럼을 써 주셨다(예술에의 초대 2021년 9월호, 통권 제357호). '작아서 아름다운', 혹은 '작지만 강한' 문화의 의미가 새삼 돋보인다. 시인의 글은 시대에 대한 통찰력과 섬세한 필치를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감사의 마음 가득하다. 2021. 8. 31 들풀처럼
가느다랗지만 구석구석 스며드는 실핏줄
동길산 시인·본지 편집위원장
코로나가 오래간다. 사회가 전반적으로 위축되다 보니 문화예술계 역시 어렵다. 공연계가 특히 그렇다. 비대면으로 활로를 찾고는 있지만 완벽한 대안이 될 수는 없다. 공연예술은 대면을 전제로 하는 까닭이다. 연주자와 관객이 숨소리마저 맞추어 나가면서 하나가 될 때 예술성은 극치를 이룬다.
그렇다고 코로나에 끌려다닐 수는 없다. 코로나는 강하지만 예술은 더 강하다. 코로나보다 강한 예술의 진면목을 소규모 공연단체 두 군데에서 확인했다. 코로나에 맞서는 해법을 거기서 봤으며 코로나의 강을 건너서 저 건너편 피안(彼岸)의 세계로 나아가는 예술의 미래랄지 가능성을 거기서 봤다.
음악단체 두 군데는 순전히 개인적인 인연으로 알게 됐다. 한 군데는 거기서 기획을 맡은 음악평론가와 이런저런 인연으로 10년 넘게 알고 지내는 사이고 한 군데는 직접적으로 아는 구성원은 없지만 거기 작곡가의 아버지가 1990년대인가 부산일보 문화부장을 지내서 알던 터였다.
굳이 개인적인 인연을 털어놓는 건 이유가 있다. 이 두 단체 말고도 부산에는 품격과 수준을 갖춘 소규모 공연단체가 숱하게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어서다. 규모만 작았지 예술성은 독보적인 이들 전문예술단체야말로 부산 공연예술의 역동하는 실핏줄이다. 가느다랗지만 구석구석 스며드는 실핏줄처럼 가느다랗지만 일반인의 삶 가장 가까이 다가간다.
<음악풍경>과 <시작(詩作)음악회>. 두 군데 음악단체의 명칭이다. 둘은 공통점이 있다. 개성이 강하면서 시민 친화적이다. 자기만의 예술성은 견지하면서 관객에게는 관객의 눈높이에 맞춘 음악을 내어놓는다. 그러기에 코로나 이전에는 공연 때마다 객석이 넘쳤고 코로나 이후에는 거리 두기만큼의 객석이 꽉 찬다.
공통점은 또 있다. 시대를 읽는 눈이 밝다. 관객의 눈높이에 맞춘 음악은 시대를 읽는 밝은 눈에 기반을 둔다. 그리고 그것의 뿌리는 당신과 내가 다르지 않다는 동질감에서 비롯한다. 예술가와 관객은 결코 다르지 않다. 별개의 존재가 결코 아니다. 예술가가 사는 사회가 고통스러우면 관객 내지 시민이 사는 사회 역시 고통스럽다.
시대를 읽는 밝은 눈은 직시한다. 돌아가거나 둘러가지 않고 두 눈 부릅뜨고선 대들 듯 다가간다. 가장 가까이 다가가선 정강이를 걷어차는 기개가 통쾌하다. 코로나 정강이를 걷어차는 유쾌, 상쾌, 통쾌는 객석의 관객에게 고스란히 전달된다. 코로나는 강하지만 예술은 더 강하다는 것을 관객의 면전에서 관객과 공유한다.
‘짜장면 없는 짜장 콘서트'와 ‘코로나 시대에 희망을 노래하다.’ 앞엣것은 음악풍경 공연 명칭이고 뒤엣것은 <시작음악회> 공연 명칭이다. ‘짜장면 없는 짜장 콘서트'의 원래 명칭은 ‘짜장 콘서트'였다. 기침하는 것조차 조심스러운 공연장에서 짜장면을 후루룩 먹는다는 발칙한 상상력이 현실에서 이뤄졌고, 코로나 이전에는 실제로 그랬다. 코로나에 맞서 지금은 짜파게티를 봉지째 나눠 주지만 코로나에 굴하지 않겠다는 의지는 결연하다.
<시작음악회>는 더 직설적이다. 코로나를 곧장 소환한다. 그러면서 회망의 세계, 강 건너편의 피안으로 나아간다. 어린이들이 직접 부르는 창작동요. 그리고 가곡 위주로 매년 발표해 오다가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면서 어린이 대신 성악가가 나서고 있다. 이 또한 코로나와의 한판 대결에 밀리지 않겠다는 예술정신의 승화다.
규모의 경제, 나는 경제학을 전공했다. 학교 다닐 때 입에 달고 다녔던 용어가 ‘규모의 경제'였다. 그리 어려운 말은 아니다. 한 마디로 압축하면 ‘클수록 좋다’쯤 된다. 그러나 매사 그런 것은 아니다. 크면 둔해지고 느려진다. 규모가 작아서 좋은 점은 얼마나 많은가. 적절한 비유인지는 모르겠으나 맛이며 상차림이 대동소이한 체인점 대신 고집 하나로 2대, 3대를 이어가는 노포는 숭고하게까지 보인다.
대규모 공연단체를 폄하하려는 의도는 물론 아니다. 예술을 크고 작은 거로 양분할 수 없듯 단체 또한 크고 작은 거로 이분할 수 없다. 대규모 단체는 그대로, 소규모 단체는 또 그대로 그들만의 예술성으로, 그들만의 고집으로 각자에게 맞는 예술을 이때까지 펼쳤고 지금도 펼치며 앞으로도 펼칠 것이다.
코로나 이 시대! 코로나가 길어지는 만큼 피로감은 높아지고 삶은 위축된다. 숨이 턱턱 막히기는 문화예술계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어느 시대든 문화예술은 그 시대를 이겨내는 힘이었다. 그리고 그 문화예술을 지탱하는 힘은 객석에서 나왔다. 늘 그래왔다. 당신과 나는 하나라는 이심전심이랄지 합심이 종국에는 코로나를 물리칠 것이다. 조금만 더 참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