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를 위한' 음악회를 위하여

浩溪 金昌旭 2012. 12. 15.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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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12. 15 (22)

 

 

[현장과 여백: 음악]

'~를 위한' 음악회를 위하여

 

 

▲ 매년 한 두 차례 청소년음악회를 열어온 부산심포닉밴드 정기연주회. 부산심포닉밴드 제공. 

 

또 한 해의 끝자락이다. '마지막 잎새'처럼 달력도 달랑 한 장밖에 남지 않았다. 누군들 아쉽지 않으며, 지는 해가 왜 눈물겹지 않으랴. 돌이킬 수 없는 한 해의 끄트머리에서, 그러나 우리는 또 다시 떠오르는 한 해를 애써 기다릴 수밖에 없다. 마지막 잔을 부딪고, 종국에는 '위하여'도 소리 높이 외치리라. 너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우리를 위하여!

 

그러고 보면, '~를 위한'다는 말은 우리에게 적잖은 위안을 준다. 아픔을 보듬고, 슬픔을 달래며, 눈물을 닦아주는 듯하다. 그래서일까? '~를 위한 음악회'가 곧잘 눈에 띈다. '환우를 위한', '소외계층을 위한', '시민을 위한' 등이 그렇다. 그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동시대인의 삶이 고단할 뿐만 아니라, 고단한 그들에게 음악으로써 위안을 줄 수 있다는 의미이리라.

 

이 같은 '~를 위한' 음악회 가운데는 '청소년을 위한' 음악회가 가히 압도적이다. 특히 2004년 부산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창단연주회를 가진 바 있는 부산심포닉밴드는 '청소년' 음악회의 선두주자처럼 보인다. 매년 한 두 차례 청소년 음악회를 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난 6일 금정문화회관 대공연장에서의 제10회 정기연주회도 마찬가지였다.

 

이날 연주된 레퍼토리 역시 대부분 청소년의 눈높이에 맞는 악곡들로 짜졌다. 친숙한 시벨리우스의 '핀란디아', 드보르자크의 교향곡 제9번 '신세계로부터' 제4악장 등이 그러했고, 그 밖에 한국민요 묶음, 아일랜드 민요, 영화음악, 캐럴모음곡 등 유쾌하고 즐거운 악곡도 무대에 올랐다.

 

부산심포닉밴드 지휘자 이기균. 부산심포닉밴드 제공. 

 

부산심포닉밴드(지휘 이기균)의 이번 무대는 젊은 연주자들의 힘과 열정이 한껏 돋보였다. 특히 클라리넷과 플루트 군(群)의 풋풋하고 명징한 표현력이 두드러졌다. 그 밖에도 모차르트의 바순협주곡에서는 협연자 여대현의 안정감과 여유가 시종 묻어났고, 맥코이의 '아프리칸 심포니'는 강렬하면서도 색다른 이미지를 선사했다. 여기에 아프리카 원주민, 해적, 산타클로스 복장 등 레퍼토리에 걸맞은 의상을 입고 등장한 해설자 도용복의 성실함도 눈길을 끌었다.

 

그러나 심포닉밴드의 연주는 무엇보다 관악 특유의 명쾌한 음향과 역동감, 그리고 리듬 및 다이내믹의 변화가 두드러졌다. 그것은 청중들로 하여금 호응도와 만족도를 이끌어내는데 크게 기여했다.

 

아쉬움도 없지 않았다.

 

첫째 관악밴드로서 가질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한계가 고스란히 노출되었다는 점이다. 즉 격정·도취·열광의 표명은 능히 관악밴드의 장점이자 강점이다. 그러나 현악으로써 가능한 부드럽고 섬세한 음악 특유의 질감은 아무래도 느끼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둘째 조명이나 화면 등 최소한의 무대장치가 없었던 점도 아쉬운 대목이다. 가령 '캐러비안의 해적'이나 '타이타닉' 등은 누구에게나 익숙한 음악이다. 연주에서 가장 인상적인 영화장면을 동시에 보여주었더라면, 시·청각적 시너지 효과를 한층 드높일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이날 청중은 청소년보다 오히려 성인이 더 많아 보였다. '청소년을 위한' 음악회라면 마땅히 청소년이 주된 수용자가 되어야 한다. 나아가 그들의 아픔이 무엇이고, 그들에게 진정 위안을 줄 수 있는 음악콘텐츠가 무엇인지 살피고 개발하는 노력도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김창욱 음악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