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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이상 특강(강의록)

浩溪 金昌旭 2014. 9. 19. 08:55

 

신랑 윤이상과 신부 이수자의 결혼사진(1950. 1. 30). 이수자, 『내 남편 윤이상』 상편(창작과비평사, 1998)에서 발췌.

 

 

윤이상의 삶과 음악

김 창 욱

음악평론가

 

작곡가 윤이상은 독일에서 ‘20세기 중요 작곡가 56인’, ‘유럽의 현존하는 5대 작곡가’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독일 자아르브뤼켄 방송국에 의해 ‘20세기 100년 간을 통틀어 가장 중요한 작곡가 30인’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으며, 그의 작품은 독일 음악대학 입시곡의 하나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그것은 윤이상이 20세기 유럽의 대표적인 현대음악 작곡가로 등장했음을 시사한다.

 

 

통영에서의 지역문화운동

 

윤이상(尹伊桑 1917-1995)은 1917년 9월 17일 경남 산청군 덕산리에서 양반출신의 윤기현(尹基鉉)과 농민출신의 김순달(金順達) 사이에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여기서 세 살까지 살다가, 이후 충무시(현재 통영시) 도천동 157번지 본가로 옮아와 호적에 올려졌다.

 

5살 때 호상서재(湖上書齋)에서 3년간 한학을 공부한 바 있는 그는, 8살인 1926년 4월 1일 6년 과정의 통영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해서 1932년 3월 23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이 시기 윤이상은 인근 예배당에 다니며 찬송가와 풍금을 배웠는데, 그것은 훗날 그가 음악가로서의 꿈을 키우는 원동력이 되었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그는 통영협성상업강습소(統營協成商業講習所)를 2년 간 수료하고, 1934년 서울로 올라가 바이올리니스트 최호영(崔虎永)으로부터 2년 동안 화성학 중심의 작곡지도를 받았다. 그러나 작곡공부는 애시당초 한계가 있었으므로 윤이상은 2년 만인 1935년 초에 고향 통영으로 귀향하고 말았다. 일본 도오요오(東洋)음악학교 출신의 최호영이 전문 작곡가가 아니었던 까닭이었다.

 

통영으로 귀향한 윤이상은 작곡수업을 위한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일본에 유학해서 상업학교를 진학할 경우 음악공부를 해도 좋다는 부친의 허락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1935년 4월 그는 오오사카(大阪)의 상업학교에 입학하는 한편, 오오사카 음악원에 등록해서 본격적인 음악공부에 매진했다. 여기서 그는 작곡·첼로·음악이론을 공부했지만, 갑작스런 어머니의 부고소식에 2년을 못다 채우고 급거 귀국했다. 고향집 가세는 기울어져 더욱 가난해져 있었다. 그는 돈을 벌기 위해 서울로 올라가 공장에서 노동일을 하고, 1936년 11월 8일 새문안교회 차재명(車載明)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기도 했다.

 

1937년에 윤이상은 첫 동요집 『목동의 노래』를 출판하고, 1938년 통영 산양면의 사립 화양학원(지금의 화양초등교) 교사로 생활했다. 1940년 초 다시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파리국립음악원 출신의 엘리트 작곡가 이케노우치 토모지로오(池內 友次郞)에게 작곡을 사사하는 한편, 반일 지하단체에 가담해서 활동하기도 했다. 그러나 윤이상은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귀국했고, 1942년 4월 아버지를 여의었다. 1944년 그는 무기제조로 독립운동을 꾀하다 그 해 7월 체포, 통영에서 두 달 간 구금생활을 했다. 9월 17일에 풀려난 그는 또 다시 내려진 체포령을 피하려 서울로 탈출했고, 서울에서 해방을 맞았다.

 

귀향한 윤이상은 통영공립고등여학교 음악교사로 지내는가 하면, 시인 유치환(柳致環)·김춘수(金春洙)·김상옥(金相沃), 작곡가 정윤주(鄭潤柱) 등과 함께 1945년 9월 15일 ‘통영문화협회’를 창립했다. 그것은 한글강습회·시민강좌·연극공연·음악회·농촌계몽순회강연 등을 통해 지역문화의 창출을 목적한 것이었다. 또한 이 시기 윤이상은 9개교, 즉 통영여중·통영고등학교·욕지중학교, 통영·충렬·두룡·진남·용남·원평초등학교의 교가를 작곡해 주었고, 1947년 ‘통영현악4중주단’(윤이상·정윤주·崔甲生·崔相釪)를 조직해서 지역문화의 저변확대에 헌신했다.

 

 

한국전쟁기, 부산에서의 3년

 

1948년 통영공립여자중학교 음악교사 윤이상이 부산으로 옮겨 온 것은 1949년 부산사범학교 교사로 부임하면서였다. 1949년 8월 1일 그는 그간 작곡한 「古風衣裳」·「달무리」·「鞦韆」·「忠武歌」·「편지」·「나그네」를 모아 가곡집 『달무리』(서울: 行文社, 1949)를 펴냈다. 이들은 장·단조의 조성체계를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한국의 전통적인 5음음계를 즐겨 활용했고, 화성 면에서 서양식 3화음에 2·4도의 부가음을 사용함으로써 보다 근대적인 음악으로 나아가려 했다.

 

또한 이 무렵 그는 금수현과 함께 ‘노래하자회’를 조직해서 개창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1949년 1월 21일 창립된 노래하자회는 매월 새노래를 만들어 시민들에게 적극 제공함으로써 지역문화를 한층 드높이는데 기여한 바 크다. 여기에는 김호민·정복갑·김상용·박지로·김진안·김창배 등 당대 부산음악가들이 대거 참여, 한때 참가자가 800명이나 될 만큼 성황을 이루었으나 한국전쟁으로 그 맥이 끊어지고 말았다.

 

아울러 이 시기 윤이상은 부산음악가협회 정회원 작곡부 간사, 주간 『소년태양』의 편집장직을 맡았고, 전쟁이 일어나자 전시작곡가협회 사무국장으로 김세형·이흥렬·윤용하·김동진·김대현·박태현·나운영과 함께 음악활동을 벌이면서 「백두산 행진곡」 등 전시가요와 「산넘어 남쪽」·「간호언니의 노래」 등 전시동요를 지어 보급했다.

 

전쟁 와중에 관청이나 학교 등이 어느 정도 기능을 회복하게 되자, 그는 다시 부산사범학교 교사로 복직했고, 부산대학에서 서양음악사 강의를 맡기도 했다. 그리고 이 무렵 그는 유치진 극본·연출의 「처용의 노래」 음악을 작곡·공연했는데, 그것은 한국 최초로 시도된 음악·연극·무용의 종합공연물이었다.

 

1952년에 들어 윤이상은 이은상의 시 「낙동강」을 합창곡으로 만들어 전쟁속의 젊은이들에게 조국수호의 의지를 고취시켰으며, 1951년부터 1953년 사이에는 아동문학가이자 동요작가인 김영일(金英一 1914-1984)과 함께 문교부 검인정의 학년별(1-6학년) 『초등학교 새음악』과 전시 초등학교 노래책 『소년기마대』를 공동으로 제작, 부산에서 발표회를 가졌다. 여기에는 「아기방울」·「오리병정」·「꼬마 위문대」·「따리아 아가씨」 등의 동요가 실려 있는데, 이것은 전쟁 와중에서도 자라나는 2세들의 반공정신을 드높이고, 그들의 정서함양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한편 이 시기 윤이상은 음악비평 활동을 꾀하기도 했다. 그는 1953년 2월 11일자 『부산일보』에 「빈사한 예술가-채동선씨의 작고에」, 5월 30일자 같은 지면에 「앤드슨 양에게-당신의 영가는 당신의 피」를 각각 썼다.

 

「빈사한 예술가」는 당대 최고의 음악엘리트 중 한 사람이었던 작곡가 채동선의 빈사(瀕死)에 즈음해서 씌어졌다. 윤이상은 이 글에서 “(채동선이) 살기 위해 한때 부두에서 그의 체력에 과중하게 육체노동을 했”고, “그의 가족이 부두에서 담배행상을 했”으며, “못 먹어서 괴로왔고 괴로워서 병 났고 병으로 쇠진해가는 육신을 지탱할 영양을 주급치 못”했음을 지적하는 한편, 당시 한국이 처한 현실과 음악가의 사회경제적 토대를 짐작케 해 준다.

 

또 「앤드슨 양에게」는 미국의 알토 성악가 메리 앤드슨의 독창회를 참관한 후 씌어진 것인데, 그녀의 흑인영가에서 묻어나는 슬픔과 한국전쟁으로 말미암은 민족의 슬픔을 일체화시켜 두 민족의 동질감을 자아내고 있다. 예컨대 “여기 전쟁고아가 얼마나 있는가 정든 고장과 전래의 양습을 빼앗긴 늙은 부모와 먹기에 풀조차 군색한 농민들이 얼마나 굶주리고 있는가? 또 얼마나 많은 이땅의 순박하고 어진 젊은이들이 어느 나라의 짐승보다도 못한 식료로써 견디며 전선에서 원수와 마주 서고 있는가”에서처럼 이 무렵 윤이상이 한민족의 비극적 현실을 얼마만큼 고뇌하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서울에서 독일로, 동서음악의 융화 

 

1953년 휴전협정과 함께 윤이상은 서울 성북동으로 이주한다. 양정고교 음악교사로 잠시 재직하던 그는 서울대·덕성여대 강사로 일하며 독주곡·실내악곡 등의 창작은 물론, 각종 음악회를 열고 음악비평 활동을 벌이면서 한국 음악계에서 부동의 음악가로 자리매김했다. 그는 「첼로소나타 1번」(1953), 「현악4중주 1번」(1955), 「피아노3중주곡」(1955) 등을 잇따라 발표함으로써 당시 문화예술가의 최고 영예인 제5회 서울시문화상을 작곡가로서는 처음으로 수상한 바 있다.

 

또 1954년에 「악계구상의 제문제」라는 평론을 발표했는데, 그것은 당시 한국악단이 처한 여러 문제점을 정확히 지적하고 나름대로의 해결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즉 한국 전통음악의 바탕 위에 세계음악을 발전시키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준 것이다. 그는 이후에도 「화천근방」(1954), 「오늘의 세계음악」(1955), 「한국적 대중음악에 대한 고찰과 방법론」(1956), 「작곡계 발흥기에 도달하다」(1956) 등의 글을 강연회에서 발제하거나, 『문예』·『새벽』·『음악』 등을 통해 발표했다.

 

특히 1956년 한국작곡가협회 주최로 열린 제1회 작곡발표회를 마치고, 오화섭(당시 연세대 영문과 교수)과 벌인 음악논쟁은 한국논쟁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른바 ‘이론의 노예 논쟁’이 그것인데, 먼저 오화섭이 “위대한 문학이 문법의 노예가 아닌 것처럼 음악은 이론의 실습이 아니다”라 전제하고, 윤이상의 작품을 “소화되지 않은 이론의 표현”이라며 혹평을 가했다. 이에 화가 난 윤이상은 “오화섭의 글은 초보적인 작곡 개념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무지한 음악애호가의 곡해와 편견에 충만한 것이다”고 비난한 사건이다. 이것은 음악생산자와 수용자의 입장을 대변한 논쟁인데, 자기가 이해하지 못하는 음악을 이론적이라 폄하하고, 반대로 자기의 음악을 이해하지 못하면 무지하다고 치부하는 경우다.

 

불혹을 앞둔 1956년 6월, 만학도 윤이상은 유럽으로 건너갔다. 유럽의 현대음악, 특히 쇤베르크·베베른·베르크 등 ‘신 비엔나악파’의 12음기법을 공부하기 위해서였다. 처음 그는 프랑스 파리국립고등음악원에서 수학했으나 1957년 8월 독일 베를린 음대로 전학, 슈바르츠 쉴링(R. Schwarz-Schilling)에게서 대위법과 푸가를, 블라허(B. Blacher)에게서 작곡을, 그리고 쇤베르크의 제자였던 루퍼(J. Rufer)에게서 12음기법을 배웠다.

 

1959년 7월 베를린 음대를 졸업한 윤이상은 한국으로 귀국할 생각이었다. 그러던 중 그 해 9월 네덜란드 빌토벤(Billthoven)의 ‘가우데아무스 음악제’와 독일 다름슈타트의 ‘현대음악제’에 두 작품을 출품하게 되었다. 12음기법에 기초를 둔 「피아노를 위한 다섯 개의 소품」(1959)과 「일곱악기를 위한 음악」(1959)이 그것이다. 특히 「일곱악기를 위한 음악」은 12음기법을 차용하면서도 동양의 음양사상을 음악적으로 표현(첼로의 글리산도)하려 했고, 훗날 윤이상 음악언어의 토대가 되는 ‘주요음향기법’(Hauptklangtechnik)을 사용함으로써 동서음악의 융화를 처음으로 시도했다. ‘주요음향기법’은 동아시아의 음악적 전통인 헤테로포니를 유럽적인 폴리포니로 확대시킨 음기법으로 ‘점묘적 음렬주의’(Punktuelle Serialismus)에 머물던 당시 유럽음악계의 작곡방식에 새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이로써 그는 ‘가우데아무스 음악제’와 다름슈타트 ‘현대음악제’에 정식으로 연주할 수 있는 자격을 획득했다. 그것은 세계 무대에 자신을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연주단체는 함부르크 실내악단의 독주자들이었으며, 젊은 미국인 지휘자 프랜시스 트래비스(F. Travis)가 지휘를 맡았다. 9월 4일 열린 데뷔무대는 성공적이었고, 이날 공연은 프랑크푸르트 방송국을 위시해서 전 유럽에서 중계되었다. 베를린 방송국의 현대음악 담당자였던 핫세(Hasse)는 윤이상이 지금 쓰고 있는 관현악곡을 빨리 완성해서 자기에게 달라고 독려하기도 했다. 이에 용기를 얻은 윤이상은 독일에 체류하기로 마음먹고, 현대음악의 아성인 독일에서 자신의 웅지를 펼치고자 결심했다.

 

두 개의 세계음악제에서 성과를 올린 윤이상은 이듬해 국제현대음악제(ISCM 1960), 현대음악을 위한 날(1964), 도나우싱엔 현대음악제(1966) 등에서도 잇단 성공을 거둠으로써 일약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아울러 그는 베를린·함부르크·헤센 등 유수의 독일 방송국의 위촉에 따라 관현악곡 「바라」(1960), 대편성 관현악을 위한 「교향악적 정경」(1960), 현악 오케스트라를 위한 「교착적 음향」(1961), 실내앙상블을 위한 「낙양」(1962), 플루트와 피아노를 위한 「가락」(1963), 불경을 텍스트로 한 전5악장의 오라토리오 「오 연꽃 속의 진주여」(1965), 오페라 「류퉁의 꿈」(1965) 등의 문제작들을 잇따라 발표했다.

 

 

세계 화해와 평화를 위한 실천적 코스모폴리탄 

 

그러던 중 윤이상은 1967년 박정희 군사정권에 의해 이른바 ‘동백림 사건’의 주모자로 몰리게 된다. 독일 유학생을 중심으로 한국 민주화 운동을 벌였던 점, 1963년 강서고분의 「사신도」를 직접 보기 위해 북한을 방문한 점 등이 그 이유였다. 6월 17일 그는 남한 중앙정보부 요원들에 의해 서울로 납치, 북한을 이롭게 했다는 죄목으로 1심에서 종신형, 2·3심에서 각각 15년·10년으로 감형되었다. 이 사건으로 남한 정부는 세계의 따가운 비판을 집중적으로 받아야 했다. 리게티·헨체·슈톡하우젠·스트라빈스키·카라얀 등 무려 161명에 달하는 세계적 예술인들은 항의서명을 남한 정부에 전달했고, 피아니스트 클라우디오 아라우는 서울연주회를 취소했으며, 이들은 독일 정부와 더불어 그의 석방을 위한 연주회를 열고 기금을 모으기도 했다.

 

수감생활 중 심한 고문으로 자살을 기도한 바 있던 윤이상은 세계 각국의 전폭적인 외교적 압력과 독일 정부의 조력으로 1969년 2월 말에 마침내 서 베를린으로 돌아왔다. 수감 중에 작곡한 오페라 「나비의 미망인」(1969)은 석방 직후 「류퉁의 꿈」과 함께 뉘른베르크에서 초연되었다.

 

한편 1970년대는 윤이상의 생애 가운데 가장 빛나는 시기였다. 독일 킬(Kiel) 시(市)로부터 의뢰받은 오페라 「유령의 사랑」(1970)이 70년 6월 20일 ‘킬의 축제주간’에 성공적으로 초연되었고, 킬 시를 위한 공적이 인정되어 같은 해 6월 23일 ‘킬 문화상’을 수상했기 때문이다. 또 72년에는 서 베를린 음악대학 명예교수(77년 이후 정교수가 됨)로 임명되었고, 뮌헨올림픽 문화행사의 하나로 의뢰받은 오페라 「심청」(1972)이 전 세계의 주목을 받으며 성공을 거둠으로써 그의 국제적 명성을 재삼 확인시켜 주었다.

 

특히 75-76년을 고비로 윤이상의 작품세계는 일대 전환점을 이루었다. ‘동백림 사건’을 극복한 그는 비로소 세계인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그의 음악적 내용이 인류가 처한 보다 현실적인 것에서 찾아졌으며, 폭력과 불평등을 거부하고 세계평화와 인류에 대한 사랑이라는 강렬한 메시지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1960년대 이래 줄곧 시도해 왔던 ‘주요음향기법’을 더욱 다듬어 1970년대 이후 창작의 주요한 토대로 삼았다.

 

1980년대 윤이상은 광주 민주화운동을 기념하는 「광주여 영원히」(1981)는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격렬한 표현을 통해 인류 전체에 가해진 폭력을 경고했고, 오보에와 하프를 위한 이중협주곡 「견우와 직녀」(1982), 칸타타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1987)를 통해 남북화해의 길을 모색했으며, 그의 가장 장대한 「교향곡」 제5번은 오늘날 자행되는 폭정과 무관심을 질타함으로써 세계의 진정한 화해와 평화를 갈구하는 ‘실천하는 음악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윤이상의 음악문화적 공적은 주로 북한과 독일에서 인정되었다. 북한은 윤이상연구소 설립(1984), 윤이상 관현악단 발족(1990), 윤이상음악당 건립(1993) 등을 행했고, 독일은 튀빙겐대학 명예박사학위(1985)와 연방공화국 대공로 훈장 수여(1988), 독일문화원의 ‘괴테메달’ 선정(1995) 등으로 기념했다.

 

윤이상은 생애에 걸쳐 가곡 6곡, 동요 70여 곡, 독창곡 4곡, 독주곡 18편, 실내악곡 52곡, 협주곡 13곡, 관현악곡 21곡, 칸타타 및 합창곡 10곡, 그리고 4편의 오페라 등 총 190여 곡에 이르는 방대한 작품을 썼다.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과 일본에서 교육을 받고, 유럽에서 현대음악기법을 익힌 그는 자신만의 독특한 음악어법을 창출해 냈다. 그것은 동아시아 음악전통에 뿌리를 두면서도 끊임없이 다원성을 지향하는 열린 음악관에서 기인한 바 크다. 민족과 인류와 세계의 평화를 모색한 그의 세계관 역시 이와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윤이상은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작곡가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그토록 그리워 한 고향 통영을 끝내 다시 찾지 못했던 불행한 시대의 예술가이기도 했다. 1995년 11월 3일 베를린의 발트병원에서 향년 78세로 삶을 마감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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