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그냥' 살기

浩溪 金昌旭 2017. 11. 6. 07:26


[아침향기]  '그냥' 살기

부산일보2017. 11. 6 (31)  


김창욱  악평론가·부산시의회 정책연구위원

 

세상사 인간이 피할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세금과 죽음이다. 벤저민 프랭클린의 놀라운 통찰력은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 가운데 실로 죽음만큼 정직하고 평등하며 절대적인 것은 없으리라.


위로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아버지와 어머니,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죽음을 맞았고, 그 아래로는 아버지와 어머니, 나와 아내, 우리 아들과 딸, 우리 아들과 딸의 아들과 딸도 언젠가 죽음을 맞게 될 것이다. 형제자매와 일가친척이 아무리 많다 한들 누가 죽음을 대신할 수 있으며, 그 누가 죽음과 동행할 수 있으랴.


더 잘살려고 고삐 풀린 욕망 줄이고

그 자리에 정신적·정서적 양식 채우며

겨울에 견고한 가슴 하나씩 준비하면

삶은 즐거운 놀이, 세상은 그 놀이터

 

죽음은 늘 우리의 지근거리에 위치해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오랫동안 죽음을 외면해 왔다. '대문 밖이 저승'인데, 애써 우리는 죽음과 상관없는, 짐짓 남의 일인 양 치부해 왔던 것이다. 그래서 죽음은, 언제나 검고 어둡고 기나긴 터널같이 무섭고 두려운 대상이 되고 말았다. 물론 그렇게 된 데는 '전설의 고향'이나 '월하의 공동묘지'같은 것이 그 나름대로 기여한 바 없지 않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죽음은 인류 문명을 촉진시켜 온 원동력이다. 어떤 이들은 티그리스나 유프라테스 강가에서, 또 어떤 이들은 나일이나 황허, 인더스 강가에서 문명을 탄생시켰다. 그들은 오랜 세월 동안 죽지 않기 위해 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그 결과, 굶어 죽지 않기 위해서 쌀과 채소 등속을 재배하고, 얼어 죽지 않기 위해서 옷을 짜고 집을 지었으며, 아파 죽지 않기 위해서 의술과 약품을 개발해 왔다. 요컨대 인간은 죽지 않기 위해서 문명을 생성·발전시켜 왔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오직 죽지 않기 위한 궁리만 했을까? 오히려 살기 위해서, 또는 더 잘살기 위해서 더 많은 고민을, 더 깊이 하지 않았을까?

 

강가에 정착한 그들은 살기 위해 곡식을 재배하고, 소와 돼지와 염소 따위의 가축을 키웠을 것이다. 그러다 점차 남의 집보다 더 잘살기 위해 더 많이 생산하고, 자신의 생산물을 지키기 위해서 남의 집과 구분되는 울타리를 치는가 하면, 사적 욕망은 마침내 소유에 대한 경쟁으로 치달았을 것이다. 더 잘살기 위해서 더 많이 획득해야 했고, 더 많이 획득하기 위해서 전쟁은 불가피한 선택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오늘 우리는 누구나 잘살기 위해서, 더 잘살기 위해서 고군분투한다. 일을 하고, 돈을 벌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일도 다들 잘살기 위해서다. 행복해지기 위해서다. 그런데, 더 잘살기 위한 노력이 오히려 그것에 구속당하게 하는 족쇄가 될 줄이야! 돈 때문에 집안에 분란이 일어나고, 분란 때문에 직장 일이 쉬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학원비다 뭐다, 아이에게 들어가는 돈은 또 얼마인가. 밤마다 우리는 술병을 쓰러뜨리고, 아침에 일어나 다가올 건강 검진 날짜를 헤아린다.

 

더 잘살기보다 '그냥' 살기 위해서 산다면, 가정은 얼마나 화평해질까. 가정이 평안하면 직장도 평안하고, 직장이 평안하면 사회와 국가는 기실 태평천하가 될 것이다. '그냥' 산다면, 고삐 풀린 욕망도 현저히 줄어들 것이다. 줄어든 욕망의 자리에는 정신적·정서적 양식도 채울 수 있으리라.

 

어느새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풀과 나무 그리고 산과 언덕에는 스며 번진 가을의 슬픈 눈'(김춘수)이 있고, '하늘 구만리에는 기러기 줄지어 울어 옌'(박목월). 머잖아 겨울이 올 것이다. '조개 줍는 해녀의 무리 사라진 겨울'(조병화)을 위해서, 메마르고 앙상하고 얼어붙은 계절을 위해서 우리는 견고한 가슴 하나씩을 준비해야 한다.

 

그러나 붉게 물든 잎새가 더 떨어지기 전에, 불이 그리운 계절이 미처 당도하기 전에, 나는 이상(李箱)'날개' 쭉지를 은근슬쩍 비틀어 보고 싶다. "놀자. 놀자. 놀자. 한 번만 더 놀자꾸나. 한 번만 더 놀아 보잤꾸나." 요컨대 삶은 즐거운 놀이요, 세상은 즐거운 놀이터가 아니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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