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적시고 간 노래들

플랜더스의 개

浩溪 金昌旭 2024. 2. 22. 15:22

대저농업협동조합 소식지가 나왔다. 여기에 조합원인 내가 투고한 에세이 '나를 적시고 간 노래: 플랜더스의 개'가 실렸다. 기념선물로 5만원 짜리 농촌사랑상품권 1매를 받았다. 무엇보다 기쁜 일은 나의 문재(文才)를 대저농협에서 비로소 확인해 주었다는 사실이다. 실로 가문의 영광이 아닐 수 없다. 2024. 2. 22 들풀처럼

 

대저농협소식 제116호(2024년 2월), 46쪽

 

'플랜더스의 개' 오프닝

 

「플랜더스의 개」(A Dog of Flanders)는 소년 네로(Nello)와 개 파트라슈(Patrasche)에 관한 이야기다. 1872년 영국인 여류 작가 위더(Ouida)가 쓴 소설을 1975년 일본 쿠로다 요시오 감독이 TV 애니메이션로 각색했다.

「플랜더스의 개」는 어린 시절, 수많은 동심을 울렸던 만화영화다. 그 주제곡만 들어도 순수하고 아름다운 장면들이 마치 파노라마처럼 스치고 지나간다. 그런 동시에, 세상에 개 만큼 충직한 짐승이 또 있을까하는 생각도 든다. 물에 빠진 주인을 구한 개, 불난 집에서 사람을 살린 개 등 그 사례가 무수히 많기 때문이다.

흑백 TV에서 본 「플랜더스의 개」를 떠올리면, 초등학교 국어책에 나왔던 바둑이가 생각난다. 그리고 그 바둑이와 늘 단짝으로 어울렸던 철수와 영희도 떠오른다. 뿐만 아니라, 어릴 적 대저(大渚) 고향집에서 키우던 바둑이 생각도 절로 난다.

동네에는 ‘덕구'(dog의 한국식 이름)라는 소박한 이름을 가진 바둑이도 없지 않았으나, 우리집 바둑이 이름은 언제나 ‘헤리'였다. 헤리가 낳은 새끼도 헤리고, 새로 들여온 바둑이도 헤리였다. 왜 이름을 헤리로 불렀는지 지금도 알 수 없다.

우리집에는 고양이도 살고 있었다. 이름도 없는 그는 시도 때도 없이 방 안팎을 들락거렸다. 방구석에 똥오줌을 싸는 때도 종종 있었다. 그렇지만 누구 하나 그를 꾸짖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그는 마님행세라도 하는 양 언제나 여유만만한 자태를 뽐냈다.

그러나 헤리는 달랐다. 애당초 그는 머슴 신세였다. 그는 늘 마당가 쇠말뚝에 목줄로 매여져 있었고, 이따금 짖는 소리로 식구들에게 국외자의 등장을 알렸다. 물론 집집마다 개를 묶어두는 이유는 있었다. 쥐약을 먹고 죽는 일이 많았으니까.

70년대만 해도 우리 동네는 곳곳에 쥐약을 놓았다. 쥐떼들이 들녘을 몰려다니며 다 익은 나락을 갉아먹는가 하면, 심지어 가마니를 쌓아 둔 곳간까지 침투해서 양식을 아작내기 일쑤였다. 그러다 보니, 학교에서도 ‘쥐잡기' 숙제를 냈다. 동네방네 휘젓고 다니는 쥐를 잡아 그 꼬리를 잘라오는 일이었다. 꼬리가 많을수록 아이는 선생님의 상찬을 받았고, 으레 의기양양한 장군이 되었다.

어린 나는, 목줄에 매여져 둘레만 맴돌던 바둑이가 안쓰러웠다. 잠시나마 그곳으로부터 해방시켜 주고 싶었다. 마침내 나는 헤리의 목줄을 풀었다. 이제 그는 자유의 몸이 되었고, 연방 꼬리를 흔들어 댔다. 내가 걸으면, 그는 앞서거니 뒷서거니하며 나를 따라 걸었다. 내가 달리기라도 할 때면, 그는 길이든 들판이든 함께 내달렸다. 멀리 공을 던지고는 “헤~리!”라 소리치면, 그는 순식간에 달려가 공을 물고 뛰어왔다.

그러던 어느 겨울 아침, 헤리가 보이지 않았다. 개집에도 없고, 마굿간에도, 곳간에도 없었다. 논밭을 찾아 헤맸으나, 끝내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해서 나락 뒤주(탈곡한 나락을 담아두던 큰 뒤주) 밑을 살폈다. 어둑해서 잘 보이지 않았다. 랜턴을 켰다. 아, 거기에는, 그 깊숙한 곳에는, 그토록 찾아 헤맸던 헤리가 웅크리고 누워 있는 게 아닌가! 그의 입가에는 거품이 말라 있었고, 뒤집힌 눈에서 시퍼런 빛을 내뿜고 있었다.

간밤에 그는 배가 무척 고팠을 것이다. 먹거리를 찾아 동네를 한 바퀴 돌았을 것이다. 어디선가 먹음직한 냄새가 코를 찔렀고, 그는 앞뒤 가리지 않고 그것을 해치웠으리라. 속이 뜨거워지고, 급기야 불덩이가 온몸으로 타들어 갔을 것이다. 사방천지로 미쳐 날뛰던 그는 마침내 사력을 다해 주인집을 찾았을 것이다.

뒤주 밑에서 겨우 그를 꺼냈다. 석고처럼 굳어버린 헤리를 리어카에 실었다. 나는 집에서 보이지 않을 만큼 떨어진 뒷논까지 리어카를 끌었다. 삽으로 땅을 팠다. 얼어붙은 땅에 삽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어렵사리 그를 파묻은 나는 빈 리어카를 끌고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왔다. 마당가에 놓여진 개집에 자꾸만 눈길이 갔다. 텅 빈 개집, 개밥 그릇에는 밥알들이 싸늘하게 말라붙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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