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장작더미의 두려운 불길이 내 온몸을 삼키고 태운다!
극악무도한 놈들아, 꺼라!
그렇지 않으면 당장 내가 너희들 피로 꺼 주겠다!
레오노라, 나는 당신에 대한 사랑에 앞서 내 어머니의 아들
고통 받는 어머니를 두고 그대로 앉아 있을 수는 없소
불행한 어머니, 당신을 구하러 달려 갑니다!
「저 타는 불길을 보라」(Di quella pira)는 거장 베르디(G. Verdi 1813~1901)의 오페라 「일 트로바토레」(Il Trovatore) 제3막에 나오는 주인공 만리코의 아리아다. 만리코는 적에게 붙들린 어머니가 곧 화형에 처해진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이 노래를 부르며 달려간다.
타오르는 불길과도 같은 이 노래는 빛나는 음색, 폭발적인 가창력, 극적인 호소력을 가진 성악가가 불러야 제격이다. 요컨대 20세기 최고의 드라마틱 테너, 마리오 델 모나코(Mario del Monaco 1915~1982)를 첫손에 꼽지 않을 수 없다. 지금껏 '황금의 트럼펫'을 능가하는 목소리를 들은 바 없기 때문이다.
이 노래를 들을 적마다 아주 오랜 옛날, 내가 저지른 일이 생각난다. 아마 예닐곱 살이나 되었을까? 나는 두 번 씩이나 집에 불을 냈다. 한 번은 작은 불, 또 한 번은 아주 큰 불이었다. 집안에 무슨 불만이 있어 그런 것이 아니라, 순전히 불장난이 오래 가는 바람에 벌어진 일이었다.
예전 시골마을에서는 가을걷이가 끝나면, 탈곡된 짚단을 차곡차곡 쌓아 올려 집채 만한 짚삐까리(짚을 쌓은 더미)를 만들었다. 볏짚의 쓰임새는 많고 많았다. 손으로 비벼 새끼줄을 꼬거나, 작두로 촘촘히 썰어서 겨울 한 철 쇠죽을 끓였다. 하다못해 부엌 아궁이에 불을 지필 때 쓰기도 했다.
우리집은 비교적 대농(大農)이었던 까닭에 짚삐까리가 두 개나 되었다. 정월 대보름이 되면, 추수가 끝나 휑한 논바닥에 달집을 지었다. 먼저 대나무로 뼈대를 세우고 볏짚으로 둘레를 쳤다. 마침내 달이 떠오르면, 우리는 달집을 태우며 각자 소원을 빌었다.
달집 태우기가 끝나면, 쥐불놀이도 했다. 본디 쥐불놀이는 쥐를 쫓기 위해 논밭둑에 불을 놓는 풍습인데, 우리는 깡통에 불을 담아 어둠 속에 빙빙 돌렸다. 둥그런 모양으로 그려지는 불빛이 꽤나 재미를 자아냈다. 그 재미는 대보름이 끝나고도 계속되었다.
어느 날, 벌건 대낮이었다. 작은형과 나는 짚삐까리 앞에서 쥐불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불현듯 찬바람이 우리를 향해 훅 불어왔다. 불은 볏짚으로 옮아 붙었고, 순식간에 불길이 짚삐까리를 타고 올라갔다. 손바닥으로 막아보려 했으나, 어림없는 짓이었다. 오히려 손과 얼굴, 그리고 옷가지가 온통 검댕이 칠갑이었다.
불길은 무시무시한 힘을 발휘하며 타올랐다. 어느새 전깃줄에 닿을락말락 그 붉은 혓바닥을 낼름거렸다. 불길은 곧 우리집 지붕으로 옮겨 붙을 심산이었다. 타오르는 불길은 화려하고 찬란했다. 그때 어디선가 “불이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엄마·아부지의 성난 얼굴이 떠올랐으나, 잠시였다. 불길이 낙일(落日)의 타는 노을 만큼이나 장려(壯麗)했기 때문이다.
“우우~ 불이야!” 하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동네 사람들이 득달같이 달려오고 있었다. 아저씨들은 손에손에 바케스를 들었고, 아줌마들은 머리마다 양동이를 이고 뛰어왔다. 덩달아 동네 아이들과 바둑이들도 다들 제 세상을 만난 양 냅다 달려오고 있었다.
비로소 형과 나는 오금을 펴지 못할 만큼 두려워졌다. 우리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 못하도록 집 뒤편으로 슬금슬금 꽁무니를 내뺐다. 머리카락이 보이지 않으려면 가능한 멀리 도망쳐야 했다. 우리는 빠짝 마른 도랑으로 뛰어 들었다. 그리고 따사로운 양지를 찾아 드러누웠다. 하늘에는 흰 구름이 서너 점 흘러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깜빡 잠이 들었다. 깨어보니, 벌써 어둠이 우리를 에워싸고 있었다. 꼬르륵 배가 고파왔다. 달리 갈 곳이 없었던 우리는 ‘자수하여 광명 찾자'는 마음으로 순순히 집으로 향했다. 다리는 갈수록 무거워졌고, 당장 코 앞에 벌어질 사태를 생각하니 그만 그 자리에 쓰러져 죽고 싶었다.
그런데 웬일일까? 의외로 집은 평온했고, 엄마·아부지·할매·큰형 가운데 그 누구도 우리를 나무라거나 탓하지 않았다. 다만 우리는 한동안 숨죽이고 살아야 했다. 고분고분 착실히 말도 잘 들어야 했다. 쉽지 않은 겨울나기였다.
저 타는 불길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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