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한 말씀 하러 간다. 부산예술시민연대가 주최·주관하는 문화예술세미나가 열리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할 참이다(아래 발제문 전문 참조).
부산마루국제음악제의 현황과 과제
김창욱(음악평론가)
오늘날 부산에는 2개의 ‘국제’ 음악제가 열리고 있다. 부산아트매니지먼트의 ‘부산국제음악제’(BMF, Busan Music Festival)와 부산마루국제음악제 추진위원회의 ‘부산마루국제음악제’(BMIMF, Busan Maru International Music Festival)가 그것이다. 2005년에 시작한 부산국제음악제는 올해 초까지 모두 8회를 열었고, 2010년에 출발한 부산마루국제음악제는 지난해 3회에 이어 올 9월에 통산 4회를 맞게 된다.
1. 부산국제음악제와 부산마루국제음악제
이들은 모두 ‘국제’라는 타이틀 아래 국내외 유명 연주가들을 초청, ‘부산’에서 여는 음악제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음악제 규모 면에서는 차이가 크다. 즉 부산국제음악제가 실내악 중심으로 이루어지는데 비해 부산마루국제음악제는 실내악은 물론 대편성 오케스트라도 무대에 오른다. 그런 만큼 예산 규모의 차이도 크다. 부산국제음악제는 부산시와 중앙정부로부터 일부 지원을 받는다. 이에 비해 부산마루국제음악제는 부산시와 중앙정부로부터 매칭펀드 형식으로 전액을 지원 받는다. 첫회에 3억이던 예산이 2회부터는 4억으로 치러졌다. 그런 점에서 민간 중심의 부산국제음악제에 비해 부산마루국제음악제는 관 주도적 성격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는 국민과 시민의 혈세가 대거 투입되는 부산마루국제음악제의 현황을 살피고, 그 과제를 제시해 보고자 한다.
2. ‘세계 최고의 국제적인’ 음악제?
부산마루국제음악제는 ‘세계 최고의 국제적인 음악제’를 지향한다. 그것은 지붕이나 산의 꼭대기를 뜻하는 ‘마루’라는 낱말을 명칭으로 쓰는 것에서도 드러난다.
지난 1980년대만 해도 ‘민족’이라는 낱말이 유행했다. 민족음악․민족예술․민족문학 등이 성행했고, 더불어 탈춤․사물놀이 등에 대한 사회적 관심도 높았다. 그러던 것이 1990년대 중반에 이르면서 이 개념은 점차 퇴조하기 시작했다. 대신에 이전 ‘민족’의 대체어인 양 ‘국제’라는 말이 새 유행어로 떠올랐다. 그것은 이후 ‘국제화’, ‘세계화’, ‘글로벌’, ‘글로컬리즘’ 등으로 파생되거나 진화되었다.
‘국제’라는 말은 지금도 여전히 우리 곁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다. 문화예술 쪽만 하더라도 부산국제영화제․부산국제어린이영화제․부산국제록페스티벌․부산국제매직페스티벌 등 ‘국제’가 차고 흘러 넘치는 중이다. 여기에 부산마루국제음악제도 ‘국제’의 범람에 가세했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세계 최고’, 또는 ‘국제적’인 음악제는 과연 어떤 음악제를 말하는 것일까? 다름슈타트국제음악제같은 것이 부산에서 열리면, 부산의 ‘세계 최고’나 ‘국제적’인 음악제가 되는 것일까? 마침내 그것이 이룩된다면, 부산시민들은 행복할까?
3. 콘텐츠 기획력의 한계, 시민 눈높이 못 맞춰
그러나 필자는 지금까지 모두 3회의 걸친 부산마루국제음악제가 가히 성공적이었다고 말할 자신이 없다. 3-4억이나 되는 혈세를 투입했음에도 불구하고, 부산마루국제음악제가 여전히 이 정도의 지점에 머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필자는 무엇보다 음악제 집행위원회의 기획력 부재와 한계에 있다고 생각한다. 즉 부산마루국제음악제의 콘텐츠 기획을 위한 싱크탱크는커녕 음악제를 위한 진지하고 치열한 고민이 애당초 없었다고 보는 것이다. 이같은 문제는 전체 프로그램과 운영과정에서 그대로 노출되었다. 요약하자면 첫째 음악제 전반에 걸친 컨셉트의 문제, 둘째 프로그램 운영에 대한 문제, 셋째 레퍼토리 구성에 대한 문제 등이 그것이다.
1) 컨셉트 문제
음악제의 컨셉트(concept)은 해당 축제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가 하는 철학적․이념적 지표와 상관된다.
제1회 때 컨셉트는 ‘프랑스의 향기’로 정해졌다. 이 컨셉트에 걸맞으려면 의당 프랑스적 음악, 프랑스 작곡가의 작품, 프랑스 출신 연주자의 연주가 주를 이뤘어야 했다. 그런데 메인의 전체 연주곡 가운데 프랑스 작품은 겨우 4곡에 머물렀고, 또한 이들이 레퍼토리의 핵심을 차지한 것도 아니었다. 아니, 오늘 우리가 굳이 프랑스의 향기를 맡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제2회 때는 컨셉트가 ‘음악의 세계화’로 잡혀졌다. 1990년대 중반 유행하던 ‘세계화’를 십 수년이 지난 오늘날, 왜 ‘세계화’를 내세웠는지는 알 수 없다. 더욱이 지금, 여기에서 세계화란 무엇인지, 왜 세계화를 해야 하는 것인지, 무엇을 세계화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의식이나 깊은 성찰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추진위의 “음악은 이미 세계화됐고, 세계화된 음악을 또 다시 세계화해 나가겠다”는 슬로건은 한갓 공허한 비논리적 주장에 머물고 말았다. 더욱이 여기서 말하는 “세계화된 음악”이 어떤 음악을 말하는지 알기 어렵고, “세계화된 음악을 또 다시 세계화”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도 가늠하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고색창연(古色蒼然)한 이 말은 음악제 컨셉트의 실패를 자인(自認)하는 레토릭에 지나지 않는다. 나아가 제3회 때의 ‘유럽, 그 찬란한 유산’ 역시 진부하기는 마찬가지다.
2) 프로그램 문제
음악회의 프로그램은 축제의 컨셉트와 긴밀히 상관된다. 말하자면, 설정된 컨셉트로부터 프로그램과 같은 구체적인 가지와 줄기가 형성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2010년 제1회 때는 ‘프랑스의 향기’라는 컨셉트 아래 ‘개막연주회’, ‘폐막연주회’, ‘해피 버스데이’, ‘추억’, ‘맛보기 메뉴’ 등의 작은 타이틀로 무대가 꾸며졌다.
2011년 제2회 때는 ‘음악의 세계화’라는 컨셉트 아래 ‘개막연주회’, ‘국악의 진수’ ‘실내악의 밤’, ‘철새악사와의 가족콘서트’, ‘폐막연주회’ 등의 작은 타이틀로 열렸다.
2012년 제3회 때는 ‘유럽, 그 찬란한 유산’이라는 컨셉트 아래 개막연주회 ‘노르딕 멜로디’, ‘조이 오브 시즌’, ‘탄생과 서거’, ‘카르미나 부라나’, ‘체코와 영국의 추억’, 폐막연주회 ‘음악의 트로이카’ 등의 하위 타이틀로 꾸며졌다.
이와 같이 음악제의 단위 프로그램은 기능별(개막연주회, 폐막연주회), 장르별(국악의 진수, 실내악의 밤), 지역별(노르딕 멜로디, 체코와 영국의 추억), 작곡가별(탄생과 서거, 음악의 트로이카), 작품별(카르미나 부라나) 등으로 구분되며, 그렇지 않으면 애매모호한 타이틀(해피 버스데이, 추억, 맛보기 메뉴)을 붙이고 있다. 이들은 콘셉트와의 어떠한 일관성도 찾아보기 어렵다.
3) 레퍼토리 문제
또한 ‘구체화된 컨셉트’인 레퍼토리도 문제가 없지 않다. 음악축제라면 으레히 다채로운 레퍼토리가 무대에 올려졌어야 했는데, 여전히 서양 고전․낭만시대의 음악이 지배적이다. 더구나 성악곡 하나 없이 실내악․교향곡․협주곡 등 시종 무겁고 구태의연한 기악음악 일색의 무대는 서양음악의 다양성을 현저히 제한했을 뿐 아니라, 마치 축제 참여자들이 클래식의 지루함과 따분함을 얼마만큼 인내하는지에 대한 의지력를 실험하는 것 같기도 했다. 예컨대 제2회 음악제 개막연주회는 무려 2시간 이상이나 소요되었다. 그것은 부산마루국제음악제가 일반 시민을 위한 것인지, 클래식 매니아를 위한 것인지, 연주자나 연주단체를 위한 것인지 도저히 가늠하기 어려운 일이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불특정 다수의 수용자 청중(시민)의 눈높이를 맞추는데 가히 성공적이라 말하기 어렵다. 부산마루국제음악제가 진정한 축제가 되려면, 시민들의 보다 적극적인 참여가 전제되어야 한다. 청중이 누구인지, 그들의 눈높이가 어느 정도인지를 파악하지 못한다면 비록 국제음악제라 할지라도 언제나 ‘그들만의 잔치’에 머물고 말 것이다. 부산에서 몇 차례의 국제음악제가 없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4. 부산마루국제음악제는 ‘부산의’ 음악제인가?
부산마루국제음악제는 ‘부산에 있는’(in Busan) 음악제일 수 있고, ‘부산의’(of Busan) 음악제일 수 있다. 부산마루국제음악제가 ‘부산에 있는’ 음악제라 할 때 그것은 단순히 부산이라는 행정구역 내에 존재하는 음악제라는 의미가 강하다. 곧 판을 벌일 수 있는 마당이 부산일 뿐 그 판의 내용이 부산과 관련되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부산의’ 음악제라고 할 때는 그 의미가 사뭇 달라진다. 즉 판을 벌일 수 있는 마당도 부산에 위치하지만, 그 내용도 ‘부산적’이어야 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부산 시민들이 즐길 만한 음악, 부산의 빛깔과 향기가 스민 음악, 부산의 작곡가들이 만든 음악, 부산의 연주가들이 연주하는 음악이 대거 무대에 올려져야 비로소 ‘부산의’ 음악제에 값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제1회 메인공연만 하더라도 총 연주곡 25곡 가운데 부산 작곡가에 의한 부산적 작품은 단 1곡(김국진의 현악합주곡 제2번 청사포)에 불과했고, 부산시향을 제외하고 나면 무대에 선 부산 연주가는 2명(김가영․이명진)에 지나지 않았다. 더구나 제2-3회 음악제 때는 그나마 지역 작곡가의 창작곡이 전혀 무대에 올라가지 않았고, 부산 연주자의 무대도 여전히 극소수에 머물고 말았다. 이는 음악제 명칭에 굳이 ‘부산’이 들어가야 할 이유가 없음을 반증한다. 또한 그것은 ‘부산’ 시민이 내는 혈세를 굳이 이 음악제에 투입할 이유가 없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향후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부산마루국제음악제가 되기 위해서는 콘텐츠 기획을 위한 싱크탱크의 구성이 무엇보다 절실히 필요함을 새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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