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평생교육진흥원, 『더 MORE』, 2013년 여름호(통권 제15호)
홍난파(洪蘭坡, 본명 洪永厚 1898-1941)는 ‘최초’ 기록이 유독 많은 음악가다. 최초의 바이올리니스트, 최초의 실내악 연주자, 최초의 음악평론가, 최초의 음악잡지 발행인, 최초의 관현악 지휘자 등이 그렇다. 그것은 그가 한국 근대음악의 파이어니어적 존재임을 상징하는 수사(修辭)에 다름 아니다.
남다른 사회의식, 소설가 꿈꾸기도
홍난파는 경기도 화성군 남양면 활초리에서 태어났다. 남양홍씨 토홍계 대호군공파 24세손이었다. 아버지 홍준은 19세기 향반(鄕班)으로 궁내부 소속 번역과와 통신사 전화과에서 주사로 일했다. 그는 개화시기 자식들의 사회적 출세를 위해 가족을 이끌고 경성에 정착, 장남 석후를 근대 최초의 양의학교인 제중원의학교에 제1회로 입학시킬만큼 시대변화에 민감한 인물이었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차남인 난파도 세브란스의전에 들어가서 공부했으나, 1년쯤 지나도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해 그만 두고 말았다.
홍난파가 서양음악을 처음으로 접촉한 것은 기독교 찬송가 문화를 통해서였고, 본격적으로 음악에 입문한 것은 조선정악전습소 서양악부에 들어가면서부터였다. 졸업 후 그곳에서 김인식의 후임으로 잠시 교유생활을 했으나, 곧 청운의 부푼 꿈을 안고 일본유학을 결심하게 된다. 1918년 도일(渡日), 그는 아시아 유일의 관립 동경음악학교에 입학해서 1년 후에 예과를 수료한다.
그러나 그는 때마침 일어났던 3·1운동에 참여함으로써 본과 진학을 거부당하고 만다. 이 시기 홍난파의 민족의식에 대한 자각은 최남선이 이끌었던 조선광문회의 회원으로 활동한 사실과 상관된다. 1910년대 초·중반 일체의 정치·언론활동이 금지된 민족운동의 침체기에 조선광문회는 횃불과 같은 역할을 수행했다. 여기에는 계몽운동가·민족지사·문필가·언론인·예술가·학생 등 당대 최고의 지식층이 망라되어 있었다. 화가 고희동·김은호·변관식, 언론인 김성수·남궁억·문일평·양기탁·오세창·이상협·장지연, 국어학자 김윤경, 소설가 박종화·염상섭·이광수, 시인 변영로·주요한, 정치가 안재홍·송진우·윤치호·정노식, 한학자 이능화·정인보, 시조시인 이병기, 종교인 이승훈·한용운 등이 그들이다. 당시 그는 광문회에 참여한 회원 가운데 유일한 서양음악가였다.
3·1운동 이후 부득이 귀국할 수밖에 없었던 그는 국내에서 매일신문사 기자로 활동하는 한편, 소설창작과 번역에 몰두하면서 잠시 문학에 뜻을 두기도 한다. 이 무렵 그는 러시아·프랑스·독일·영국 등 세계명작 200여 권을 탐독하는 한편, 그 가운데 가장 감명 깊은 몇 권을 골라 우리말로 중역하기 시작했다. 1922년에 『첫사랑』(투루게네프), 1923년에는 『매국노의 자』(스델만)와 『청년입지론』(일명 자조론, 스마일스), 『어데로 가나』(센쿠위츠)를 번역했다. 또한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은 『애사』라는 제목으로 1922년 6월 15일 박문서관에서, 에밀 졸라의 『나나』는 1924년 6월 25일 역시 박문서관에서 각각 출판되었다. 나아가 그는 첫 중편 『허영』을 매일신보에 연재함으로써 소설가로서의 새로운 면모를 과시하기도 했다. 그는 1921년부터 1923년에 이르기까지 최소한 10편 이상의 중·단편을 내놓았다. 이만한 발표량은 같은 연대의 김동인이나 염상섭의 작품량과 맞서는 것이었다.
연악회 조직, 음악계몽운동 펼쳐
또한 홍난파는 1922년 민간음악기관인 연악회(硏樂會)를 조직했다. 『연악회 회원명부』에 따르면, 1923-33년까지 연악회에는 바이올린과·풍금과·성악과·만돌린과의 4과가 설치되어 있었고, 여기에는 조선인뿐만 아니라 일본인 회원들도 다수 존재하고 있었다. 경성이나 인근 도시는 물론, 황해도·전라도·평안도·경상도·충청도·강원도·함경도 등 각지의 사람들이 회원으로 가입했다. 명부에는 총 232명의 회원 정보가 기록되어 있는데, 수필가 피천득, 작곡가 김성태도 멤버에 속해 있었다.
연악회의 핵심사업은 기본적으로 개인레슨을 통한 음악실기교육에 있었다. 그것은 연악회가 사설 음악학원이었다는 사실을 추정케 한다. 이 무렵만 하더라도 연주자로서의 생활이 보장되는 시장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는 바이올린 개인레슨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연악회의 이름 아래, 잇단 음악회 개최와 악보집 발간 등 줄곧 음악의 저변확대를 꾀했기 때문이다.
홍난파는 1924년 제1회 바이올린 독주회를 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여는가 하면, 새문안예배당 내 회관 준공 낙성식 음악회를 가지기도 했다. 나아가 서울구락부 후원음악회, 그랜드 콘서트 등을 연악회 주최로 잇따라 열었다. 그리고 그는 연악회 회원으로서 양금·단소 등 전통악기와 자신의 바이올린으로 선양합주(鮮洋合奏)를 시도하기도 했다. 음악잡지 『음악계』를 창간, 4호까지 발행하고, 바이올린 독주곡 「哀愁의 朝鮮」(1924), 「夏夜의 星群」(1924), 「로-만스」(1924), 「東洋風의 舞曲」(1933) 및 『世界名作歌曲選集』(1926), 『朝鮮童謠百曲集』 상·하편(1931), 『朝鮮歌謠作曲集』(1933), 『特選歌謠曲集』(1936) 등도 연악회에서 펴냈다. 이같은 그의 음악활동은 서양음악을 통해 조선을 계몽시켜야 한다는 근대주의자로서의 사명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의 음악계몽운동은 다시 도동(渡東), 동경고등음악학원을 마친 이후에도 계속된다. 연악회 사업을 재개하는 한편 중앙보육학교 음악주임 교유로 정착하면서 『조선동요백곡집』 상편 50곡을 창작·출판한다. 이들은 보육학교 학생들의 음악교재로 만들어졌으나, 마땅히 부를만한 노래가 드물었던 시대에 그것은 조선 민중들 사이에서도 폭넓게 수용되었다. 특히 1920년대에 씌어진 가곡 「봉선화」는 금창곡이 아니었음에도, 일제하 조선을 상징하는 ‘민족의 노래’로 받아들여졌다.
실용적 음악도 민족에 기여하는 일
1930년대 초 홍난파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시카고 셔우드음악학교에서 바이올린과 작곡을 공부한다. 약 1년간의 과정을 마친 그는 그곳에서 창작한 『조선동요백곡집』 하편 50곡과 『조선가요작곡집』 제1집에 수록된 15곡의 가곡을 작곡해서 귀국한다. 귀국 후 중앙보육학교에서 경성보육학교로 자리를 옮긴 그는, 일본 빅터레코드사 경성지점 주임, 이화여전 강사, 경성중앙방송관현악단 지휘자를 잇따라 지냈다.
이 시기 그는 신민요·유행가·영화음악 등 일반 대중의 일상생활에 필요한 실용적 음악을 창작, 레코드와 방송을 통해 사회화시켰다. 그는 예술음악과 예술음악가의 존재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활용할만한 일에 활용하고 이용될만한 끝에 이용되어야만 그 가치가 있다”고 말함으로써 예술적 가치보다 실용적 가치에 보다 더 무게중심을 두었다. 그래서 그는 “가정의 화락한 기분”을 위해서 가정음악이 필요하고, “어린이들의 성정을 순화시키고 그의 덕행을 기르는데” 학교음악의 가치가 있다고 말한다. 나아가 그는 당시 많은 음악가들이 폄훼했던 유행가, 또한 유행속가에 대해서도 “듣는 사람에게 흥미나 즐거움을 준다면” 그것이 오히려 음악적 효과가 있다고 보았다. 심지어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일제로부터 적성국가의 음악이라는 이유로 배척되었던 째즈에 대해서도 옹호하는 입장을 취했다.
그의 이러한 생각은 그가 신민요·유행가·영화주제가 등 레코드음악의 창작을 실현하는 논리적 근거가 되었다. 식민지 조선에서 수용자들의 요구에 부응하고, 그들이 실제생활에서 필요로 하는 음악을 적재적소에 제공하는 것도 그는 나름대로 민족에 기여하는 것이라 여겼던 까닭일 것이다.
새로운 음악시대 연 첫 번째 작곡가
홍난파는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작곡했다. 아마추어 청중을 위한 바이올린 독주곡과 관현악곡을 포함해서, 레코드 청취자들을 위한 신민요와 유행가, 음악교육 교재로 만들어진 동요와 가곡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홍난파의 음악적 성취는 무엇보다 ‘노래’에 있다. 「낮에 나온 반달」·「퐁당퐁당」·「햇빛은 쨍쨍」·「하모니카」·「고향의 봄」과 같은 동요와 「봉선화」·「봄처녀」·「성불사의 밤」·「옛동산에 올라」·「장안사」·「사공의 노래」·「고향생각」과 같은 가곡이 그것이다.
홍난파 노래는 정형시를 가사로 선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동요는 107곡 가운데 90곡, 가곡은 17곡이 모두 정형시에 선율을 붙였다. 동요는 7·5조, 가곡은 4·4조가 보편적이다. “나의 살던 고향은 / 꽃 피는 산골”(고향의 봄)이나 “울 밋헤 선 / 봉선화야”(봉선화)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러니까 동요든 가곡이든, 그의 노래는 대부분 정형시의 음절수에 따라 리듬을 정형적으로 붙이는 방식으로 작곡되었다. 그것은 장절식(章節式)의 노래를 만드는데 유리한 것이었다. 특히 그는 기본적인 리듬형을 반복하거나, 그것에 약간의 변형을 가해서 보다 더 다양한 리듬을 구사했다. 그리고 그의 리듬변형은 선율의 단순성을 피하기 위해서, 특정한 가사음절을 강조하기 위해서, 음악의 장식적 효과를 위해서, 가사의 음절을 맞추기 위해서 각각 이루어졌다.
이같이 가사음절에 리듬을 붙여가는 방식은 이전에 비해 매우 혁신적인 것이었다. 이상준(李尙俊 1884-1948)․김인식(金仁湜 1885-1963)이 활동했던 이른바 창가(唱歌)시대에는 붓점리듬(깡총리듬)의 활용이 지배적이었다. 가령 이상준의 ‘새해’에서처럼 가사가 2음절인 경우 붓점리듬을 붙이면 되고, 1음절의 경우 붓점리듬에 붙임줄을 붙여 ‘♩’로 만들어 주면 된다. 그러나 이같은 기계적인 리듬붙이기는 언어의 의미그룹을 파괴하는 경우가 생긴다. 예컨대 '애씀과/나감'이 '애씀과나/감'이 되는 경우가 그러하다. 이와 같이 홍난파 노래의 다양한 리듬변형은 이전의 창가에 비해 훨씬 서정적이고 선율적인 노래를 만들 수 있게 한다. 그것은 홍난파가 오랜 창가시대를 극복하고, 마침내 새로운 음악시대를 열어젖힌 첫 번째 작곡가였음을 의미한다.
홍난파는 한국 근대음악의 파이어니어였다. 그에 앞선 음악가로 김형준·김인식·이상준 등이 있었으나, 그와는 전혀 비교도 될 수 없었으며, 그보다 조금 늦은 현제명·박경호·박태준 역시 그의 음악에 비해 질적·양적으로 비교될 수 없는 경우이기 때문이다. 김인식의 경우, 심지어 해방 이후에 작곡된 작품조차 초창기 창가(唱歌), 즉 반주 없는 단선율에 주로 2/4, 또는 4/4박자의 깡총리듬이 사용되는 양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불행한 삶, 비극적 죽음
홍난파는 말년에 안창호가 이끄는 흥사단의 국내지부인 수양동우회 관련자로 피검, “사상전향에 관한 논문”(思想轉向に就いての論文)을 쓰고 풀려났다. 이후 친일단체인 대동민우회·조선문예회·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국민총력조선연맹·조선음악협회 등에 가입해서 「정의의 개가」·「공군의 노래」·「희망의 아츰」 등 몇 편의 친일가요와 “지나사변과 음악”같은 친일논설을 남겼다.
그러나 이같은 그의 친일음악활동은 자발적이라기 보다 일제에 의한 탄압의 결과였다. 총독부는 그가 근무하던 이화여전·빅타축음기회사·경성보육학교를 차례로 그만 두게 했고, 그의 사상전향을 위해 70일 이상 감옥에 가두어 모진 고문을 서슴치 않았다. 그것은 미국 유학시절 자동차 사고로 얻은 건성늑막염을 재발시켜 마침내 그를 44세의 일기로 세상을 뜨게 했다.
홍난파가 그런 불행한 죽음을 당한 것은 일제시대를 통틀어 그는 이미 조선 최고를 구가하던 ‘원로’음악가였고, 그런 그는 총독부의 요구로부터 자유롭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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