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음악평론가가 본 부산국제무용제

浩溪 金昌旭 2014. 7. 11. 17:27

 

 

 

음악평론가가 본 부산국제무용

 

 

창 욱

   음악평론가

 음악풍경 기획위원장

 

춤이란 무엇일까?

 

라즈니쉬는 그것을 “생동하는 것, 존재에 가까운 것, 가벼운 것”이라 했고, 엘리스는 “스스로를 표현하는 모든 기술의 원천”이라 말했다. 또한 아그네스 드 밀레는 “도덕적인 책임이나 육체를 얽매지 않는 유일한 신체적인 행위”라고 주장했다. 이들을 집약하면, 춤이란 정신적·육체적 해방을 갈망하는 역동적인 기술 정도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사실 춤의 역사는 매우 오랜 것이다. 고대부터 무지케(Musike)나 악가무(樂歌舞)가 행해져 왔던 터이다. 그것은 종교적 제의(祭儀)를 위한 신성한 존재인 동시에, 정신적·육체적 정화작용(카타르시스)을 위한 어떤 존재이기도 했다. 부여(夫餘)에서는 정월(正月)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국중대회를 열어 먹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기를 여러 날 동안 계속했고, 예(濊)에서도 10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밤낮으로 술을 마시고 노래와 춤을 추었다.

 

이처럼 춤은 경건한 유희(遊戱)다. 성속(聖俗)을 넘나들면서 의미와 재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또한 춤은 난마처럼 얽히고 설킨 심신(心身)의 불안과 공포를 해소해 주기도 한다. 사리가 그러하다면, 춤의 궁극적 기능은 인간 속에 내재된 병증(病症)의 치유(治癒)에 있는 것이 아닐까?

 

 

볼거리·들을거리가 많았던 무대

 

오늘날 부산에서는 많은 국제적 예술축제가 열리고 있다. 국제음악제·국제영화제·국제연극제 등이 그러하다. 물론 국제무용제도 빠뜨릴 수 없는 국제무대다.

 

올해로 10돌을 맞는 부산국제무용제는 지난 5월 30일부터 6월 3일까지 닷새 간에 걸쳐 부산문화회관에서 펼쳐졌다. 무용워크숍·국제무용포럼·특별홍보공연 등의 부대행사가 곁들여진 이번 무용제에는 한국을 비롯해서 이스라엘·중국·남아프리카공화국·스페인·뉴칼레도니아·미국·아르헨티나·이탈리아 등 11개국 34개의 작품이 무대에 올랐다.

 

6월 1일 부산문화회관 대극장에서의 공식초청공연에는 8팀의 무용단이 무대를 수놓았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케이프 댄스 컴퍼니(Cape Dance Campany), 한국의 무빙 채널 댄스 컴퍼니(Moving Channel Dance Campany), 미국의 발 말라다 댄스(Bal Mahlada Dance), 한국의 레드 스텝(Red Step), 아르헨티나의 소피아 앤 헤브(Sofia & Heber), 이탈리아의 오닌 댄스 컴퍼니(Oniin Dance Campany), 한국의 애매모호한 무용단, 이스라엘의 마리아 콩 댄스즈 컴퍼니(Maria Kong Dances Campany)가 바로 그들이다. 이들의 무대는 각각 10-20분 정도였고, 옴니버스 형식으로 꾸며졌다.

 

먼저 눈에 띈 것은 무대음악이다. 여기에는 기존 음악을 원형 그대로 쓴 경우(케이프 댄스 컴퍼니의 ‘볼레로’, 소피아 앤 헤브의 ‘라 쿰파르시타’, 애매모호한 무용단의 ‘인간의 리듬’), 기존 음악을 편곡이나 편집한 경우(무빙 채널 댄스 컴퍼니의 ‘희생’), 새로운 음악을 작곡한 경우(레드 스텝의 ‘외치다’, 오닌 댄스 컴퍼니의 ‘오니리코’) 등과 같이 다양했다.

 

기존 음악을 원형 그대로 쓴 경우는 음악뿐 아니라 무용 자체도 매우 익숙해 보였다. ‘볼레로’(Bolero)는 프랑스 인상주의 작곡가인 라벨(Ravel)이 쓴 것으로 감각적인 음색, 명징한 선율선, 규칙적인 악절과 형식, 치밀한 구성력 등이 돋보인다. 특히 고조되는 리듬과 춤의 역동성은 케이프 댄스 컴퍼니의 남자 무용수에게서 두드러졌다.

 

우루과이 작곡가 마토스 로드리게스(Rodríguez)의 탱고 ‘라 쿰파르시타’(La Cumparsita)는 3부로 구성된 단조(短調) 음악으로 화려한 음색과 명쾌한 리듬이 매력적이다. 그런 만큼 소피아 앤 헤브의 현란한 춤사위와 여자 무용수의 자유로운 다리[脚]가 돋보였다.

 

무빙 채널 댄스 컴퍼니는 기존 음악을 편곡, 혹은 편집한 음악을 썼다. 여기에는 아프리카 민속음악와 모차르트 음악, 그리고 록음악이 두루 버무려졌다. 그러나 이 무용단이 말하고자 하는 몸의 언어가 무엇인지 가늠하기는 어려웠다. 추상적인 것을 구체화할 필요가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무용의 추상성을 넘어서 심각성까지 더해진 무대로는 발 말라다 댄스의 ‘포’(for)였다. 뚜렷한 표제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왜 위하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마치 그림에 선을 긋거나, 점을 하나 찍어 놓고서 ‘무제’(無題)라는 제목을 달고 있듯이.

 

레드 스텝의 ‘외치다’에서는 새로운 음악을 썼다. 인도의 전통악기 따블라와 한국의 아쟁소리, 그리고 전통장단도 활용되었다. 동양적 색채감이 농후했으나, 표현언어의 추상성과 소통의 한계를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마리아 콩 댄스즈 컴퍼니의 ‘오픈 소스’(Open Source)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애니메이션 음악을 연상케 하는 전자음향, 빠른 비트, 타악적 역동성, 남녀 무용수들의 변화무쌍한 연기력에도 불구하고, 애당초 의도했던 인간의 ‘정체성 찾기’에 대한 공감대는 쉽게 형성되지 않았다.

 

 

언어가 쉬워야 소통도 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매모호한 무용단’의 퍼포먼스는 무엇보다 눈에 띄었다. ‘애매모호한’이라는 단체명에서 심상찮은 뉘앙스를 물씬 풍겼다. 애매모호(曖昧模糊)란, 말이나 태도 따위가 흐리터분하고 분명하지 못한 것을 가리키는데 그들의 무용이 과연 얼마만큼 애매모호할 것인가 하는 생각이 먼저 궁금증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이들의 스테이지 ‘인간의 리듬’(Rhythm of human)은 결코 애매모호하지 않았다.

 

무대에는 5명의 남자 무용수가 모차르트의 피아노협주곡 제20번의 2악장에 맞춰 춤을 춘다. 음악은 조용하고 느리다. 2명의 여자 무용수가 차례로 등장한다. 그들은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팬티와 브레지어만 걸쳤을 뿐 온몸은 벗은 채다. 팬티와 브레지어는 색깔만 다르다. 하이힐을 신은 여자들의 워킹, ‘쭉쭉빵빵’한 그들은 자신의 몸매를 마음껏 과시한다. 남자 무용수들이 잇따라 여자 뒷꽁무니를 따라간다. 그러나 이들의 노력은 번번히 수포로 돌아간다. 여자 무용수들은 또 그들끼리 서로의 눈매를 쏘아보기도 한다. 결국 여자들을 쫒던 5명의 남자 무용수들은 마침내 여자에게 제압당하고 만다.

 

애매모호한 무용단은 이 작품에서 어쩌면 예쁜 여자는 남자를 잘 홀린다, 여자의 적은 여자다, 순진한 남자는 여자에게 유혹 당한다, 언젠가 여자는 남자를 배반한다, 그것이 남녀의 관계다 등등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런 점에서 애매모호한 무용단의 무대는 애매모호하지 않음은 물론, 추상적이지도 않다. 오히려 너무나 구체적이고, 너무도 일상적이다. 게다가 유모러스한 스토리의 구성력도 유독 두드러졌다. 모처럼 무용의 즐거움과 유쾌함이 무엇인지를 새삼 보여준 무대였다.

 

무용은 몸의 언어다. 몸의 표현으로써 소통하는 예술이다. 관객과 쉽게 소통하기 위해서는 보다 쉬운 몸의 언어로 표현해야 한다. 소통이 되어야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공감하기 어려운 몸의 언어가 많았다는 것이 이번 무용제를 본 필자의 솔직한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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