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한형석 선생 기념사업

浩溪 金昌旭 2015. 4. 30. 08:54

 

내가 살고 있는 사하구에서는 나를 찾지 않는다. 오히려 이곳을 벗어난 곳에서 나를 찾는 경우가 태반이다. 공자나 예수도 고향에서는 잘 알아주지 않는다던데, 그렇다면? 최근 서구청이 펴내는 구보 『서구신문』이 나를 찾았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한 필 썼다. 2015. 4. 30 들풀처럼.

 

 

올해로 광복 70주년을 맞는다. 길고 어두운 역사의 터널을 뚫고, 마침내 한민족이 광명을 되찾은 해이다. 이에 즈음해서, 부산 서구청이 발 벗고 나선 한형석 기념사업은 여간 뜻 깊고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먼구름 한형석(韓亨錫 1910-1996) 선생이 누구던가!

 

독립운동가 한흥교(韓興敎) 선생의 차남으로 태어난 그는, 일찍이 중국에서 애국지사 조성환(曺成煥) 선생으로부터 “예술구국(救國)”을 하라는 가르침을 받았다. 즉 예술도 독립운동의 훌륭한 무기가 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조국 독립을 위해서 백만 대군보다 민족적인 단결이 앞서야 하며, 이를 위해서 정신생활에 보다 깊이 파고 들 수 있는 음악·연극 등의 예술활동이 필요하다는 언설이었다.

 

이에, 한형석 선생은 상해 신화(新華)예술대학 예술교육과를 거쳐 중국 국립음악원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예술교육을 받은 선생은, 이후 「압록강행진곡」·「조국행진곡」·「광복군 제2지대가」·「국기가」 등의 광복군가, 「흘러가는 저 구름」·「우리나라 어머니」·「작은 새의 노래」 등의 서정가곡, 그리고 「리나」·「아리랑」 등의 오페라를 잇따라 작곡, 발표했다. 동시에 선생은 한국청년전지공작대, 광복군 제2지대 선전참모, OSS특수부대원으로서 맡은 바 소임을 다했다.

 

1948년에 귀국한 선생은 정부의 고위직 제안을 마다하고 낙향했다. 1953년 8월 15일 선생은 전쟁에 버려진 아이들을 위해 그의 판잣집 위 언덕배기에 자유아동극장을 열었다. 부산 부민동 변전소 옆 35평 규모의 목조단층이었다. 사재를 털었지만, 목수를 구할 돈이 없었으므로 공사 전 과정을 모두 그가 책임졌다.

 

“걸식아동·부랑아동·반직업아동(구두 닦는 아동, 신문 판매하는 아동, 아동 소행상 등), 고아원 아동과 일반 실학(失學) 아동의 교도를 위하여” 문을 연 아동극장에서는 명작동화를 각색한 영화와 아동극·인형극·그림연극 등이 공연되었다. 2년간 500여 회가 열렸고, 11만 8천여 명이 찾아올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

 

이 시기 선생이 아동교육에 관심을 기울였던 것은 “전재(戰災)아동, 부랑아동의 복리와 생활을 위해서 세계 각국이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고 있는데, 유독 우리의 아동들만은 그 혜택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며, 특히 선생이 예술교육에 집중한 것은 “백 권의 독서보다 음악·아동극·무용·인형극 등이 아동의 지식계몽과 정서육성에 한층 민속(敏速)한 효과를 거둘 수 있기 때문”이었다.

 

반 세기 동안 방치돼 왔던 자유아동극장의 복원. 여기에 한형석 선생 기념관 건립과 기념음악회 등의 잇단 사업추진은 서구청의 굳건한 역사의식과 실천의지를 잘 보여준다.

 

나라도 구제 못한 가난과 궁핍의 시절, 낮고 어두운 곳에서 기꺼이 빛이 되어준 한형석 선생. 올 8월, 진정한 광복의 기쁨을 더불어 나누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