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부산의 음악비

浩溪 金昌旭 2017. 6. 30. 07:25


예술부산 20177월호(통권 제145호)


부산의 음악비를 찾아서


김  창  욱

음악평론가·부산시의회 정책연구위원

 

()는 세상을 떠난 이의 업적을 기리고, 이를 후세에 전하기 위해 만들어진다. 기념비(記念碑기적비(紀蹟碑송덕비(頌德碑)를 비롯해서 시비(詩碑문학비(文學碑)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현재 부산에는 시비와 문학비가 압도적으로 많지만, 그렇다고 음악가를 송축하는 비가 없지는 않다. 가령 고태국 음악비, 금수현 노래비, 오태균 음악비가 그것이다.

 

 

성악가·합창지도자로 획을 그은 고태국 선생

 

고태국(高泰國 1917~1977) 선생은 테너가수이자 합창지도자, 나아가 음악교육자로서 부산지역의 음악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이에, 뜻 있는 문화예술가들이 20086월 건립추진위원회(회장 김상훈)를 결성하고, 같은 해 10월 초 공사에 들어가 1120일 부산진구 초읍동의 부산학생교육문화회관 앞뜰에 음악비를 완공했다.


음악비는 그랜드 피아노와 높은음자리표를 형상화하고 있으며, 부일미술대전에서 대상을 수상한 바 있는 정희욱 씨가 만들었다. 기부체납된 음악비는 부산시 녹지정책과가 소유권을 갖고, 관리는 부산학생교육문화회관이 맡고 있다.


선생은 경상북도 고령의 한학자 집안에서 5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나 도쿄 동양음악학교에서 성악을 공부했다. 1944년에 귀국, 대구사범학교 교유(敎諭)로 부임했다. 1947년 부산에 정착, 동래중학교·금성고등학교·동래여자고등학교 교사와 부산교육대학 교수를 지내면서 성악가이자 합창지도자로 활동했다

 

성악가로서 선생은 1931년과 1937년 두 차례에 걸쳐 도쿄음악콩쿠르에서 1위로 입상하면서 두각을 나타냈다. 처음 무대에 선 것은 1941년 구단하군인회관(九段下軍人會館)에서 개최된 제6회 신인 소개 연주회였으며, 이후 부민관(府民館, 현 서울시의회 건물)에서도 연주했다. 또한 1946년 두 차례의 독창회를 열었는데, 부산관현악단과 부산기독연합찬양대가 특별 출연했다.


합창지도자로서도 선생은 발군의 실력을 발휘했다. 1945년에 대구사범학교 합창단 일부와 일반인으로 구성된 서라벌합창단을 이끄는 한편, 부산사범학교(현 부산교육대학)에 재직하던 1957년에는 콜 에오리안(Chor Aeolian) 합창단을 만들어 연 2회의 정기연주회를 열었다. 그 밖에 19609월부터 부산연합합창단과 은성합창단도 조직해서 지도했다.


선생은 1962년 부산시문화상을 수상했고, 1999년에는 선생을 기리는 '고태국 성악콩쿠르'(부산일보사 주최, 이후 부일성악콩쿠르로 개칭됨)가 창설되었다.


예순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 선생은 경상남도 양산시 상북면 상삼리의 천주교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음악비 건립 10주년을 맞는 내년에 선생을 기념하는 성대한 행사가 열릴 계획이며, 현재 부산음악협회 고정화 회장이 선생의 딸이다.


  

초창기 부산에 서양음악의 씨앗을 뿌린 금수현 선생

 

작곡가 금수현(金守賢 1919~1992) 선생을 기념하는 「그네」 노래비는 고향인 강서구 대저1동 사덕 상리마을 앞둑 낙동강 제방에 세워졌다. 강서구청이 선생의 차남이자 조각가인 금누리에게 의뢰, 1992221일에 건립되었다.


노래비는 높이 4m, 지름 2m의 반원형 검은색 대리석판 위에 대표작 그네의 악보가 작곡가의 친필로 새겨져 있다. 곡선 원통은 '그네'의 율동과 낙동강의 흐름을 형상화한 것이다. 강서구청이 소유, 관리하고 있다.


선생의 본관은 김녕(金寧). 호는 낙초(洛初가락(駕洛)이고, 아버지는 김득천(金得千)이다. 정미업과 땅콩 재배를 하던 가정의 3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선생은 사업가나 금융가로 키우려던 아버지의 뜻에 따라 부산제2공립상업고등학교(현 개성고등학교)에 입학했으나, 졸업과 동시에 일본으로 건너가서 동양음악학교 본과에서 성악을 전공했다.


1941년 귀국한 선생은 부산좌(현 부산극장)에서 독창회를 가졌고, 1942년 동래고등여학교 음악교사가 되었다. 이 무렵 소설가 김말봉(金末峰 1901~1961)의 딸 전혜금(全蕙金)을 만나 1943년 결혼, 금난새를 낳았다. 전혜금은 동래고등여학교를 졸업하고, 인천에서 교편을 잡았던 선생의 제자였다. 김말봉은 전혜금의 의붓어머니였는데, 이런 연유로 1947년 작곡한 금수현의 대표작 그네가 김말봉의 시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선생은 경남여자고등학교 교감, 부산사범학교 교감을 거쳐 195234살의 젊은 나이에 파격적으로 경남여자중학교 교장으로 발탁되어 지역 음악교육에 크게 기여했다. 19562월에는 통영고등학교 교장을 역임했으며, 1957년에는 문교부 편수관으로 6년간 근무했다

 

초창기 부산에 서양 음악의 씨앗을 뿌린 선생은 당뇨 합병증으로 오랜 투병 생활을 하다가 1992831, 73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선생은 1960년에 녹조훈장을 수상했고, 1981년에 외솔상을 수상했다.


  

부산 교향악운동의 선구자 오태균 선생

 

지휘자 오태균(吳泰均 1922~1995) 선생을 기리는 음악비는 사하구 하단동 에덴공원 내에 건립돼 있다. 부산음악협회(회장 유호석)가 주축이 되어 20013월 건립추진위원회가 결성, 그 해 630일 소유주 백광덕 씨로부터 부지를 제공 받았다. 여기에는 선생과 소유주와의 두터운 친분이 한 몫 했다.


3,000만 원의 예산을 들인 음악비는 대리석 비석 위에 3m 높이의 자연석을 얹은 형태이다. 자연석에는 '오태균 음악비'라는 표식이 검은색 반흘림체로 새겨져 있다. 비석 앞면에는 선생을 음악의 길로 안내한 베토벤(L. v. Beethoven)의 교향곡 제5운명의 주제선율 악보를 새겨 넣었다.


선생은 충청남도 공주에서 아버지 오영세(吳寧世)와 어머니 이신덕(李信德)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음악적으로 타고난 기질이 보였으며, 초등학교 4학년 때인 1933년 레코드 가게에서 우연히 흘러나와 듣게 된 베토벤의 운명교향곡을 듣고 운명처럼 음악에 입문했다.


1947년경 부산제2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한 선생은 서울로 진출, 국립 서울교향악단의 제1바이올린 주자로 자리를 잡았고, 1948년 대전공회당에서 첫 바이올린 독주회를 가졌다. 이후 6·25가 발발하자 해군정훈음악대에 편입, 활동하다 1·4 후퇴로 말미암아 부산에 정착하게 되었다.


부산 피난시절, 선생의 재능을 인정한 해군 관계자의 도움으로 일본 동경국제음악학교로 유학을 다녀왔다. 여기서 3년 동안 바이올린과 지휘법을 배웠다. 부산으로 돌아온 선생은 1950년대에 다양한 음악활동을 통해 부산음악문화의 초석을 놓았다.


1954년 선생은 부산대학교 교수로 부임하여 대학생들을 모아 1955년 부산에서 첫 관현악단을 창설했다. 이렇듯 선생은 초창기 부산의 관현악운동을 주도했고, 그의 끈질긴 노력으로 1957812일에 부산교향악단이 탄생하기도 했다.


1962년에는 5년 간 이끌어 온 부산교향악단이 부산시립교향악단으로 거듭 나게 되었는데, 이때 초대 상임 지휘자를 맡아 9년 동안 연 평균 6회의 연주회를 갖는 등 모두 53회의 정기연주회를 지휘했다.


9년 간의 부산시립교향악단 지휘자를 그만 둔 선생은 부산여자대학(현 신라대학교) 음악학과에서 후진 양성을 꾀했다. 나아가 동대학 교학처장과 대학원장, 예술대학장을 거쳐 1992년 초대 총장을 맡아 대학행정에도 크게 기여했다.

 

부산 교향악운동의 선구적 역할을 해 왔던 선생은 1958년 경남지사 문화공로상을 수상했으며, 1964년에는 부산시문화상, 1970년에는 내무부장관 문화공로상, 1987년 문화부장관 문화공로상, 19905월 대통령 수여 국민포상을 잇따라 받았다. 1995429일 지병인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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