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일의 기억, 전쟁에서 꽃핀 문화] 2. 예술이 흐르는 거리 ① 광복로 극장가
남포동 일대 영화관들, 피란시절 흥행 구도 좌지우지
『부산일보』 2017.08.10(29)
윤여진 기자 onlypen@busan.com
▲ 옛 모습이 그대로 살아있는 문화극장 건물은 보존해야 할 문화적 자산이다. 왼쪽 사진은 1939년 당시 보래관.
1부에서는 전쟁 당시 활동했던 생존 작가들과 휴전 직후 문화예술계를 구성했던 원로 예술인들의 육성 등을 통해 6·25 한국전쟁 기간 피란수도 부산에서 펼쳐진 다양한 문화 예술 콘텐츠를 소개했다. 이어지는 2부에선 전문가들과 동행해 거리 등 공간을 중심으로 이뤄졌던 당시 문화예술상을 그려보기로 한다.
동래 최초의 상설영화관 '동래극장', 부산 동구의 세 번째 극장 '중앙극장', 구포 최초의 극장 '구포극장', 영도의 '항구극장' 등 부산 곳곳에 영화관이 들어서 있었지만, 피란수도 부산시절 부산 극장의 흥행 구도는 남포동 일대의 극장가들이 주도했다. 극장들은 영화뿐만 아니라 연극, 창극, 국극, 음악공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를 무대에 올리면서 전쟁의 아픔을 달래줬다. 김한근 부경근대사료연구소 소장과 함께 당시 극장가를 둘러봤다.
연극·창극·음악 공연…
극장에서 다양한 무대 제공
부산극장 등 대표적 역할
일제 강점기 건물 동아극장
당시 뼈대 유일하게 남은 곳
문화극장도 과거 흔적 간직
■극장에서 악극과 대중공연도 많아
아쉽게도 피란수도 부산 당시 거리와 극장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사진 속에 존재하는 극장과 오늘날 새로 들어선 건물을 비교하며 걸었다. 관광객들로 북적이는 광복로 거리. 전쟁 당시엔 전쟁의 고통을 잊기 위한 몸부림과 전쟁에도 꽃핀 문화예술을 잇는 통로였다.
지금은 사라진 '동아극장'과 '시민관', 아직도 제 이름을 유지하며 극장으로 운영되고 있는 '부산극장'이 전시 극장 구도의 주축을 이뤘다. 김 소장은 "문화극장은 국회의사당에 이어 미군 전용극장으로 사용되면서 극장으로서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동아극장은 외화 상영관의 강자로 군림하며 영화가 많이 상영된 가운데 가극, 키노드라마, 연극 등을 간간이 무대에 올렸다.
부산에 연극 전용 극장이나 소극장이 없었던 탓에 서울에서 활동하던 유명한 배우와 작품 해석이 뛰어난 연출가, 스태프 등이 협업해 만든 연극 무대가 극장을 채우면서 부산 시민들에게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기도 했다. 상대적으로 무대가 큰 부산극장이 대표적이다. 부산극장에선 연극과 창극, 국극, 대중가요 공연, 연극과 가극 등을 아우른 연예대전 등 공연이 활발하게 펼쳐졌다. 부산극장은 서울을 제외한 지역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향토극장이기도 하다. 메가박스 부산극장이라는 이름으로 지금까지 극장으로서 역할을 해내고 있다.
광복로 끝자락에 위치한 시민관도 빼놓을 수 없다. 1916년 상생관에서 시작돼 대중극장, 부민관으로 이름을 바꿨다가 1953년 환도 이후 시민관으로 바뀌면서 1976년 폐관 때까지 이어졌다. 전쟁 발발 뒤 임시피란민 수용소 시설로 이용됐으며, 1951년 전시연합대학 개교식이 열리기도 했다. 동아극장이나 부산극장보다 한국영화가 더 많이 개봉됐다. 지금은 한국투자증권 건물이 들어서 흔적조차 없다.
■문화극장·동아극장 보존에 관심을
당시 있었던 수많은 극장이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졌지만 아직도 옛 모습을 간직한 극장이 있다. 바로 '동아극장'과 '문화극장'이다.
현재 부산 중구 광복로 동아데파트 자리에 있던 동아극장은 1931년 '소화관'에서 해방 후 '조선극장' '동아극장' 순으로 이름을 바꿨다가 1960년 '광복극장'으로 다시 이름을 바꾸고 1968년 폐관 때까지 극장 역할을 해냈다. 홍영철 한국영화자료연구원장은 생전에 남긴 <부산극장사>를 통해 "일제 때 건축된 당시 뼈대 그대로 남아있는 유일한 곳"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실제로 건물 정면이 일부 증축된 것을 제외하면 외관 전체에 옛 모습이 남아있었다.
동아극장만 뼈대가 남아있는 것이 아니다. 동아데파트 맞은편 KB국민은행 광복동지점 자리의 문화극장이다. 김기수 동아대 건축학과 교수와 황수환 연구원의 연구로 밝혀진 문화극장은 1914년 보래관으로 출발해 1928년, 1938년 재건축됐다. 곡선형 입구 외관 등을 비롯해 1층 회전형 계단과 1~3층을 연결하는 내부계단, 옥상의 환기구로 추정되는 시설 등은 1930년대 재건축된 당시와 흡사하다.
지금까지 옛 모습이 남아있는 1층의 회전형 계단. 부산일보DB
과거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는 것 외에도 문화극장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는 바로 '먼구름 한형석 선생'이다. 광복 후 미군 전용극장으로 활용되던 문화극장은 1948년 선생이 문교부로부터 극장장으로 임명되면서 비로소 극장의 면모를 갖추게 됐다. 국립극장을 위한 공사를 진행 중이던 선생은 1950년 국회 부결에 굴하지 않고 자비를 대거 투입해 문교부 직할 부산문화극장으로 만들었다. 국립극장의 모습으로 시민의 품에 돌아온 것이다. 하지만 개관 1주일 만에 6·25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국회의사당과 미군 전용 위안극장으로 징발되고 말았다.
김 소장은 "피란 시절 가장 큰 사건이었던 문화극장은 특히 지역을 대표하는 독립운동가의 열정이 서린 곳"이라며 "100년 가까운 지금도 옛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국립극장으로서 가치가 크기 때문에 부산시에서 관심을 가지고 보존해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자문위원: 김창욱 부산시의회 정책연구위원, 김한근 부경근대사료연구소 소장, 김형균 부산발전연구원 부산학센터장, 박미욱 임시수도기념관장, 박진희 부산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 이순욱 부산대 국어교육과 교수(이하 가나다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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