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면 | 입력시간: 2003-04-30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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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수현 하면 으레 떠오르는 노래가
바로 1947년에 지은 '그네'다.
이 노래는 결이 고운
모시 한복을 단아하게 차려입은 처녀가
평화롭게 그네 타는 풍경을 그린 가곡이다. 전통적인 3박자에
향토색이 짙은 이 노래는
오래 전부터 중·고교의 교과서에
실려 있으며,노래가 담긴 레코드만도
20여 종이나 되는 한국인의 대표적인
애창곡 중의 하나이다.
그래서 모든 이들이 한 번 이상씩은
불러보았거나,쉽게 흥얼거리는 노래다.
그러나 금수현이
'그네'를 작곡했다는 사실은
그의 수많은 업적 가운데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그는 70여 년을 살면서 음악 관련 일뿐 아니라 한글전용운동과 잡지발행 등 여러 방면에 걸쳐서 수많은 활동을 펼쳤다. 때문에 진정 그는 초창기 부산 서양음악 문화의 개척자였으며,나아가 한국 서양음악계에 디딤돌로서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금수현은 1919년 7월 22일,부산 강서구 대저 1동 전금(全金) 마을에서 김녕김씨(金寧金氏) 충의공파(忠毅公派)의 26세손으로 태어났다.
정미업과 땅콩재배를 했던 아버지 김득천(金得千)의 3남 1녀 중 장남이었다. 소년시절 그는 독실한 불교 집안의 비교적 유복한 환경 속에서 자랐다.
그러나 소년 금수현이 음악에 입문하는 계기는 초창기 서양음악가들이 대부분 기독교 문화를 통해 음악에 입문한 것과는 달리,초등학교 학예회 때 김두성(金斗星) 담임 선생님의 칭찬에 크게 고무되어서였다. 이런 인연으로 낙동강변에 노래비가 세워졌다.
하지만 금수현은 사업가나 금융가로 키우려던 아버지의 뜻에 따라 부득이 하게 부산제2상고(현재 부산상고)에 입학했으나,음악에 대한 꿈을 결코 저버릴 수 없었다.
마침내 아버지를 설득시킨 그는 졸업과 동시에 일본으로 건너가서 동양음악학교 본과에 성악전공(바리톤)으로 응시했다. 그가 이 학교를 지원한 것은 비록 희망했던 작곡과는 없었지만,사립으로 꽤나 전통이 있다는 소문을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졸업 후 청년 금수현은 호시 유메지(星夢二)로 창씨개명하고,아사쿠사(淺草)의 국제극장 내 마츠다케(松竹) 오페라부 합창단원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당시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으로 전운이 감도는 어수선한 분위기였기 때문에 오페라단이 해체되는 등,그의 활동무대는 여의치 않았다. 이에 그는 1941년 5월 마침내 조선으로 영구 귀국했다.
고향에 돌아온 금수현은 맨 먼저 부산좌(지금의 부산극장)에서 독창회를 갖고,친구들과 노래극을 만들어 김해 마산 삼천포 통영 등지를 순회 공연했다. 1942년 4월에 동래고등여학교 음악교사가 되었다. 그는 이곳에 재직할 당시 소설가 김말봉(1901~1961)의 딸 전혜금(全蕙金)을 만나 1943년 10월 27일 백년가약을 맺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전혜금은 동래고녀를 졸업하고,인천에서 교편을 잡던 그의 제자였다. 김말봉은 그녀의 의붓어머니였는데,이런 인연으로 1947년 작곡한 그의 대표작 '그네'는 김말봉이 시를 지었다. 해방이 되자 금수현은 건국준비위원회 경남도위원회 문화위원으로 위촉되었다.
27살의 최연소 건국준비위원회의 도위원으로서 해야 할 첫 임무는 관악대와 혼성합창단을 만드는 일,'독립'이라는 오페레타를 작사·작곡하여 연습하는 일 등이었다. 그러다 그 해 10월 금수현은 동래고녀에서 경남여고 교감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 무렵 경남도 학무국장이자,신설된 부산사범학교 교장이었던 윤인구(尹仁駒,부산대 초대 총장)의 요청에 따라 '8월 15일'이라는 행진곡풍의 노래를 작곡했다.
'죽음의 쇠사슬 풀리고 자유의 종소리 울린 날'로 시작되는 이 노래는 학생들이 쉽게 부를 수 있는 행진곡풍이었다. 이 노래는 곧바로 프린트가 되어 모든 학교에 배포되었으며,부산방송국에서는 작곡자 자신이 매일같이 노래지도를 하면서 보급했다. 진정 부산은 이제야 온통 '8월 15일'이었다. 당시 술집 접대부들도 이 노래를 젓가락을 두드리면서 불렀으며,손님들도 이구동성으로 함께 노래하면서 해방의 기쁨을 맘껏 누렸다.
금수현은 부산의 음악인과 음악교사들을 중심으로 1946년 '경남음악협회'를 결성하고, 초대 회장이 되었다.
이 협회는 경남에 음악문화를 보급하기 위해 조직되었는데 교육음악부,성악부,기악부,작곡부의 4부문으로 구성되었다. 음악 인구의 저변 확대를 꾀하기 위해 경남음악콩쿠르대회,음악주보 발간 등을 수행하였다.
1946년 제1회 경남음악콩쿠르대회가 경남여고 강당에서 열렸다. 이 콩쿠르는 해방 이후 전국에서 처음 시도된 것인데,경연대회의 전범이 되었다.
한편 경남음악협회는 해방 후 첫 음악간행물인 '음악주보(音樂週報)'를 정기적으로 펴냈다. 8절지 1매(4면)를 프린트한 것이었는데,음악계의 주요 뉴스와 교재용 노래 1곡을 실어 부산과 경남의 각 학교에 배부했다. 특히 주보는 매월 3원의 유가지였는데도 희망 학생이 많아 매주 2천 부를 찍어야 했다. 이 경험으로 1951년 금수현은 대청동에 새로이출판사를 차려 일반도서 및 악보출판을 시도했다. 1970년에는 음악잡지 '월간음악'을 창간했으며,1992년까지 무려 22년 동안이나 발행함으로써 척박했던 한국음악계의 디딤돌 역할을 다했다.
1947년 금수현은 경남도립극장의 극장장으로 취임하자 한국의 쟁쟁한 음악가들을 불러와 매달 1회의 '희망음악회'를 열었다. 이 음악회는 희망하면 누구나 무대에 섰으며,곡목은 청중의 요청에 따라 조정되는 독특한 형태였다.
1년 후 극장장직을 그만둔 그는 '새들예술원'이라는 음악극 공연단체를 만드는 한편,교단으로 복귀해 부산사범학교의 교감이 되었다.
1949년에 그는 음악인뿐만 아니라 문화를 사랑하는 30여 명을 모아 '노래하자회'를 조직하고,매월 쉬운 새노래를 만들어 미공보원에서 청중들과 함께 부르는 개창운동을 전개했다.
공교롭게도 1950년 동족상잔의 비극이 일어난 날은 경남음악협회의 제5회 경남음악콩쿠르가 동광국교 강당에서 열리는 날이었다.
사상 유례가 없을 만큼 많은 인원이 참가했던 음악콩쿠르는 잇따라 전해오는 전쟁소식에 본선을 치르지도 못한 채 아쉽게도 해산되고 말았다.
1952년 금수현은 34살의 젊은 나이에 파격적으로 경남여중 교장으로 발탁되었다. 1956년 2월에는 통영고 교장을 역임했으며,1957년에는 문교부 편수관으로 6년간 근무했다.
편수관은 각급 학교의 교육과정을 정하고,국정교과서의 편찬과 검인정교과서의 검열 등을 수행하는 주요한 직책이었다.
한편 1961년 5·16 직후 금수현은 박정희 군부정권의 중앙정보부 행정이사관 시사정보실장에 발탁되었다. 이때 그는 중앙정보부의 기관지 '양지(陽地)'의 발행일을 맡기도 했다.
곧 공화당이 조직되자 중앙상임위원이 되어 부산 동구에서 국회의원으로 출마했으나,처참하게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이것은 그에게 있어서는 일생일대의 외도이자,최대의 실패였다.
1963년부터 1965년까지 금수현은 국제신보 고문을 맡아 '거리의 표정'이라는 칼럼을 썼으며,이를 '거리의 심리학'이라는 책으로 묶어 간행했다.
또 1965년 '영 필하모니관현악단' 이사장직을 맡았으며,1968년 금잔디유치원을 설립했으며,1970년에는 '월간음악'을 창간했다. 그리고 1972년 음악저작권협회 회장,1982년 한국작곡가협회 회장,1982년 한성로타리클럽 회장 등을 지냈다.
그는 필생의 작품인 오페라 '장보고'를 3년여의 각고 끝에 완성하고 난 후,당뇨합병증으로 오랜 투병생활을 하다가 1992년 8월 31일,73세로 세상을 떠났다. 김창욱·동의대 강사(음악사)
바로 1947년에 지은 '그네'다.
이 노래는 결이 고운
모시 한복을 단아하게 차려입은 처녀가
평화롭게 그네 타는 풍경을 그린 가곡이다. 전통적인 3박자에
향토색이 짙은 이 노래는
오래 전부터 중·고교의 교과서에
실려 있으며,노래가 담긴 레코드만도
20여 종이나 되는 한국인의 대표적인
애창곡 중의 하나이다.
그래서 모든 이들이 한 번 이상씩은
불러보았거나,쉽게 흥얼거리는 노래다.
그러나 금수현이
'그네'를 작곡했다는 사실은
그의 수많은 업적 가운데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그는 70여 년을 살면서 음악 관련 일뿐 아니라 한글전용운동과 잡지발행 등 여러 방면에 걸쳐서 수많은 활동을 펼쳤다. 때문에 진정 그는 초창기 부산 서양음악 문화의 개척자였으며,나아가 한국 서양음악계에 디딤돌로서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금수현은 1919년 7월 22일,부산 강서구 대저 1동 전금(全金) 마을에서 김녕김씨(金寧金氏) 충의공파(忠毅公派)의 26세손으로 태어났다.
정미업과 땅콩재배를 했던 아버지 김득천(金得千)의 3남 1녀 중 장남이었다. 소년시절 그는 독실한 불교 집안의 비교적 유복한 환경 속에서 자랐다.
그러나 소년 금수현이 음악에 입문하는 계기는 초창기 서양음악가들이 대부분 기독교 문화를 통해 음악에 입문한 것과는 달리,초등학교 학예회 때 김두성(金斗星) 담임 선생님의 칭찬에 크게 고무되어서였다. 이런 인연으로 낙동강변에 노래비가 세워졌다.
하지만 금수현은 사업가나 금융가로 키우려던 아버지의 뜻에 따라 부득이 하게 부산제2상고(현재 부산상고)에 입학했으나,음악에 대한 꿈을 결코 저버릴 수 없었다.
마침내 아버지를 설득시킨 그는 졸업과 동시에 일본으로 건너가서 동양음악학교 본과에 성악전공(바리톤)으로 응시했다. 그가 이 학교를 지원한 것은 비록 희망했던 작곡과는 없었지만,사립으로 꽤나 전통이 있다는 소문을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졸업 후 청년 금수현은 호시 유메지(星夢二)로 창씨개명하고,아사쿠사(淺草)의 국제극장 내 마츠다케(松竹) 오페라부 합창단원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당시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으로 전운이 감도는 어수선한 분위기였기 때문에 오페라단이 해체되는 등,그의 활동무대는 여의치 않았다. 이에 그는 1941년 5월 마침내 조선으로 영구 귀국했다.
고향에 돌아온 금수현은 맨 먼저 부산좌(지금의 부산극장)에서 독창회를 갖고,친구들과 노래극을 만들어 김해 마산 삼천포 통영 등지를 순회 공연했다. 1942년 4월에 동래고등여학교 음악교사가 되었다. 그는 이곳에 재직할 당시 소설가 김말봉(1901~1961)의 딸 전혜금(全蕙金)을 만나 1943년 10월 27일 백년가약을 맺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전혜금은 동래고녀를 졸업하고,인천에서 교편을 잡던 그의 제자였다. 김말봉은 그녀의 의붓어머니였는데,이런 인연으로 1947년 작곡한 그의 대표작 '그네'는 김말봉이 시를 지었다. 해방이 되자 금수현은 건국준비위원회 경남도위원회 문화위원으로 위촉되었다.
27살의 최연소 건국준비위원회의 도위원으로서 해야 할 첫 임무는 관악대와 혼성합창단을 만드는 일,'독립'이라는 오페레타를 작사·작곡하여 연습하는 일 등이었다. 그러다 그 해 10월 금수현은 동래고녀에서 경남여고 교감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 무렵 경남도 학무국장이자,신설된 부산사범학교 교장이었던 윤인구(尹仁駒,부산대 초대 총장)의 요청에 따라 '8월 15일'이라는 행진곡풍의 노래를 작곡했다.
'죽음의 쇠사슬 풀리고 자유의 종소리 울린 날'로 시작되는 이 노래는 학생들이 쉽게 부를 수 있는 행진곡풍이었다. 이 노래는 곧바로 프린트가 되어 모든 학교에 배포되었으며,부산방송국에서는 작곡자 자신이 매일같이 노래지도를 하면서 보급했다. 진정 부산은 이제야 온통 '8월 15일'이었다. 당시 술집 접대부들도 이 노래를 젓가락을 두드리면서 불렀으며,손님들도 이구동성으로 함께 노래하면서 해방의 기쁨을 맘껏 누렸다.
금수현은 부산의 음악인과 음악교사들을 중심으로 1946년 '경남음악협회'를 결성하고, 초대 회장이 되었다.
이 협회는 경남에 음악문화를 보급하기 위해 조직되었는데 교육음악부,성악부,기악부,작곡부의 4부문으로 구성되었다. 음악 인구의 저변 확대를 꾀하기 위해 경남음악콩쿠르대회,음악주보 발간 등을 수행하였다.
1946년 제1회 경남음악콩쿠르대회가 경남여고 강당에서 열렸다. 이 콩쿠르는 해방 이후 전국에서 처음 시도된 것인데,경연대회의 전범이 되었다.
한편 경남음악협회는 해방 후 첫 음악간행물인 '음악주보(音樂週報)'를 정기적으로 펴냈다. 8절지 1매(4면)를 프린트한 것이었는데,음악계의 주요 뉴스와 교재용 노래 1곡을 실어 부산과 경남의 각 학교에 배부했다. 특히 주보는 매월 3원의 유가지였는데도 희망 학생이 많아 매주 2천 부를 찍어야 했다. 이 경험으로 1951년 금수현은 대청동에 새로이출판사를 차려 일반도서 및 악보출판을 시도했다. 1970년에는 음악잡지 '월간음악'을 창간했으며,1992년까지 무려 22년 동안이나 발행함으로써 척박했던 한국음악계의 디딤돌 역할을 다했다.
1947년 금수현은 경남도립극장의 극장장으로 취임하자 한국의 쟁쟁한 음악가들을 불러와 매달 1회의 '희망음악회'를 열었다. 이 음악회는 희망하면 누구나 무대에 섰으며,곡목은 청중의 요청에 따라 조정되는 독특한 형태였다.
1년 후 극장장직을 그만둔 그는 '새들예술원'이라는 음악극 공연단체를 만드는 한편,교단으로 복귀해 부산사범학교의 교감이 되었다.
1949년에 그는 음악인뿐만 아니라 문화를 사랑하는 30여 명을 모아 '노래하자회'를 조직하고,매월 쉬운 새노래를 만들어 미공보원에서 청중들과 함께 부르는 개창운동을 전개했다.
공교롭게도 1950년 동족상잔의 비극이 일어난 날은 경남음악협회의 제5회 경남음악콩쿠르가 동광국교 강당에서 열리는 날이었다.
사상 유례가 없을 만큼 많은 인원이 참가했던 음악콩쿠르는 잇따라 전해오는 전쟁소식에 본선을 치르지도 못한 채 아쉽게도 해산되고 말았다.
1952년 금수현은 34살의 젊은 나이에 파격적으로 경남여중 교장으로 발탁되었다. 1956년 2월에는 통영고 교장을 역임했으며,1957년에는 문교부 편수관으로 6년간 근무했다.
편수관은 각급 학교의 교육과정을 정하고,국정교과서의 편찬과 검인정교과서의 검열 등을 수행하는 주요한 직책이었다.
한편 1961년 5·16 직후 금수현은 박정희 군부정권의 중앙정보부 행정이사관 시사정보실장에 발탁되었다. 이때 그는 중앙정보부의 기관지 '양지(陽地)'의 발행일을 맡기도 했다.
곧 공화당이 조직되자 중앙상임위원이 되어 부산 동구에서 국회의원으로 출마했으나,처참하게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이것은 그에게 있어서는 일생일대의 외도이자,최대의 실패였다.
1963년부터 1965년까지 금수현은 국제신보 고문을 맡아 '거리의 표정'이라는 칼럼을 썼으며,이를 '거리의 심리학'이라는 책으로 묶어 간행했다.
또 1965년 '영 필하모니관현악단' 이사장직을 맡았으며,1968년 금잔디유치원을 설립했으며,1970년에는 '월간음악'을 창간했다. 그리고 1972년 음악저작권협회 회장,1982년 한국작곡가협회 회장,1982년 한성로타리클럽 회장 등을 지냈다.
그는 필생의 작품인 오페라 '장보고'를 3년여의 각고 끝에 완성하고 난 후,당뇨합병증으로 오랜 투병생활을 하다가 1992년 8월 31일,73세로 세상을 떠났다. 김창욱·동의대 강사(음악사)
금수현 하면 으레 떠오르는 노래가
바로 1947년에 지은 '그네'다.
이 노래는 결이 고운
모시 한복을 단아하게 차려입은 처녀가
평화롭게 그네 타는 풍경을 그린 가곡이다. 전통적인 3박자에
향토색이 짙은 이 노래는
오래 전부터 중·고교의 교과서에
실려 있으며,노래가 담긴 레코드만도
20여 종이나 되는 한국인의 대표적인
애창곡 중의 하나이다.
그래서 모든 이들이 한 번 이상씩은
불러보았거나,쉽게 흥얼거리는 노래다.
그러나 금수현이
'그네'를 작곡했다는 사실은
그의 수많은 업적 가운데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그는 70여 년을 살면서 음악 관련 일뿐 아니라 한글전용운동과 잡지발행 등 여러 방면에 걸쳐서 수많은 활동을 펼쳤다. 때문에 진정 그는 초창기 부산 서양음악 문화의 개척자였으며,나아가 한국 서양음악계에 디딤돌로서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금수현은 1919년 7월 22일,부산 강서구 대저 1동 전금(全金) 마을에서 김녕김씨(金寧金氏) 충의공파(忠毅公派)의 26세손으로 태어났다.
정미업과 땅콩재배를 했던 아버지 김득천(金得千)의 3남 1녀 중 장남이었다. 소년시절 그는 독실한 불교 집안의 비교적 유복한 환경 속에서 자랐다.
그러나 소년 금수현이 음악에 입문하는 계기는 초창기 서양음악가들이 대부분 기독교 문화를 통해 음악에 입문한 것과는 달리,초등학교 학예회 때 김두성(金斗星) 담임 선생님의 칭찬에 크게 고무되어서였다. 이런 인연으로 낙동강변에 노래비가 세워졌다.
하지만 금수현은 사업가나 금융가로 키우려던 아버지의 뜻에 따라 부득이 하게 부산제2상고(현재 부산상고)에 입학했으나,음악에 대한 꿈을 결코 저버릴 수 없었다.
마침내 아버지를 설득시킨 그는 졸업과 동시에 일본으로 건너가서 동양음악학교 본과에 성악전공(바리톤)으로 응시했다. 그가 이 학교를 지원한 것은 비록 희망했던 작곡과는 없었지만,사립으로 꽤나 전통이 있다는 소문을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졸업 후 청년 금수현은 호시 유메지(星夢二)로 창씨개명하고,아사쿠사(淺草)의 국제극장 내 마츠다케(松竹) 오페라부 합창단원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당시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으로 전운이 감도는 어수선한 분위기였기 때문에 오페라단이 해체되는 등,그의 활동무대는 여의치 않았다. 이에 그는 1941년 5월 마침내 조선으로 영구 귀국했다.
고향에 돌아온 금수현은 맨 먼저 부산좌(지금의 부산극장)에서 독창회를 갖고,친구들과 노래극을 만들어 김해 마산 삼천포 통영 등지를 순회 공연했다. 1942년 4월에 동래고등여학교 음악교사가 되었다. 그는 이곳에 재직할 당시 소설가 김말봉(1901~1961)의 딸 전혜금(全蕙金)을 만나 1943년 10월 27일 백년가약을 맺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전혜금은 동래고녀를 졸업하고,인천에서 교편을 잡던 그의 제자였다. 김말봉은 그녀의 의붓어머니였는데,이런 인연으로 1947년 작곡한 그의 대표작 '그네'는 김말봉이 시를 지었다. 해방이 되자 금수현은 건국준비위원회 경남도위원회 문화위원으로 위촉되었다.
27살의 최연소 건국준비위원회의 도위원으로서 해야 할 첫 임무는 관악대와 혼성합창단을 만드는 일,'독립'이라는 오페레타를 작사·작곡하여 연습하는 일 등이었다. 그러다 그 해 10월 금수현은 동래고녀에서 경남여고 교감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 무렵 경남도 학무국장이자,신설된 부산사범학교 교장이었던 윤인구(尹仁駒,부산대 초대 총장)의 요청에 따라 '8월 15일'이라는 행진곡풍의 노래를 작곡했다.
'죽음의 쇠사슬 풀리고 자유의 종소리 울린 날'로 시작되는 이 노래는 학생들이 쉽게 부를 수 있는 행진곡풍이었다. 이 노래는 곧바로 프린트가 되어 모든 학교에 배포되었으며,부산방송국에서는 작곡자 자신이 매일같이 노래지도를 하면서 보급했다. 진정 부산은 이제야 온통 '8월 15일'이었다. 당시 술집 접대부들도 이 노래를 젓가락을 두드리면서 불렀으며,손님들도 이구동성으로 함께 노래하면서 해방의 기쁨을 맘껏 누렸다.
금수현은 부산의 음악인과 음악교사들을 중심으로 1946년 '경남음악협회'를 결성하고, 초대 회장이 되었다.
이 협회는 경남에 음악문화를 보급하기 위해 조직되었는데 교육음악부,성악부,기악부,작곡부의 4부문으로 구성되었다. 음악 인구의 저변 확대를 꾀하기 위해 경남음악콩쿠르대회,음악주보 발간 등을 수행하였다.
1946년 제1회 경남음악콩쿠르대회가 경남여고 강당에서 열렸다. 이 콩쿠르는 해방 이후 전국에서 처음 시도된 것인데,경연대회의 전범이 되었다.
한편 경남음악협회는 해방 후 첫 음악간행물인 '음악주보(音樂週報)'를 정기적으로 펴냈다. 8절지 1매(4면)를 프린트한 것이었는데,음악계의 주요 뉴스와 교재용 노래 1곡을 실어 부산과 경남의 각 학교에 배부했다. 특히 주보는 매월 3원의 유가지였는데도 희망 학생이 많아 매주 2천 부를 찍어야 했다. 이 경험으로 1951년 금수현은 대청동에 새로이출판사를 차려 일반도서 및 악보출판을 시도했다. 1970년에는 음악잡지 '월간음악'을 창간했으며,1992년까지 무려 22년 동안이나 발행함으로써 척박했던 한국음악계의 디딤돌 역할을 다했다.
1947년 금수현은 경남도립극장의 극장장으로 취임하자 한국의 쟁쟁한 음악가들을 불러와 매달 1회의 '희망음악회'를 열었다. 이 음악회는 희망하면 누구나 무대에 섰으며,곡목은 청중의 요청에 따라 조정되는 독특한 형태였다.
1년 후 극장장직을 그만둔 그는 '새들예술원'이라는 음악극 공연단체를 만드는 한편,교단으로 복귀해 부산사범학교의 교감이 되었다.
1949년에 그는 음악인뿐만 아니라 문화를 사랑하는 30여 명을 모아 '노래하자회'를 조직하고,매월 쉬운 새노래를 만들어 미공보원에서 청중들과 함께 부르는 개창운동을 전개했다.
공교롭게도 1950년 동족상잔의 비극이 일어난 날은 경남음악협회의 제5회 경남음악콩쿠르가 동광국교 강당에서 열리는 날이었다.
사상 유례가 없을 만큼 많은 인원이 참가했던 음악콩쿠르는 잇따라 전해오는 전쟁소식에 본선을 치르지도 못한 채 아쉽게도 해산되고 말았다.
1952년 금수현은 34살의 젊은 나이에 파격적으로 경남여중 교장으로 발탁되었다. 1956년 2월에는 통영고 교장을 역임했으며,1957년에는 문교부 편수관으로 6년간 근무했다.
편수관은 각급 학교의 교육과정을 정하고,국정교과서의 편찬과 검인정교과서의 검열 등을 수행하는 주요한 직책이었다.
한편 1961년 5·16 직후 금수현은 박정희 군부정권의 중앙정보부 행정이사관 시사정보실장에 발탁되었다. 이때 그는 중앙정보부의 기관지 '양지(陽地)'의 발행일을 맡기도 했다.
곧 공화당이 조직되자 중앙상임위원이 되어 부산 동구에서 국회의원으로 출마했으나,처참하게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이것은 그에게 있어서는 일생일대의 외도이자,최대의 실패였다.
1963년부터 1965년까지 금수현은 국제신보 고문을 맡아 '거리의 표정'이라는 칼럼을 썼으며,이를 '거리의 심리학'이라는 책으로 묶어 간행했다.
또 1965년 '영 필하모니관현악단' 이사장직을 맡았으며,1968년 금잔디유치원을 설립했으며,1970년에는 '월간음악'을 창간했다. 그리고 1972년 음악저작권협회 회장,1982년 한국작곡가협회 회장,1982년 한성로타리클럽 회장 등을 지냈다.
그는 필생의 작품인 오페라 '장보고'를 3년여의 각고 끝에 완성하고 난 후,당뇨합병증으로 오랜 투병생활을 하다가 1992년 8월 31일,73세로 세상을 떠났다. 김창욱·동의대 강사(음악사)
바로 1947년에 지은 '그네'다.
이 노래는 결이 고운
모시 한복을 단아하게 차려입은 처녀가
평화롭게 그네 타는 풍경을 그린 가곡이다. 전통적인 3박자에
향토색이 짙은 이 노래는
오래 전부터 중·고교의 교과서에
실려 있으며,노래가 담긴 레코드만도
20여 종이나 되는 한국인의 대표적인
애창곡 중의 하나이다.
그래서 모든 이들이 한 번 이상씩은
불러보았거나,쉽게 흥얼거리는 노래다.
그러나 금수현이
'그네'를 작곡했다는 사실은
그의 수많은 업적 가운데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그는 70여 년을 살면서 음악 관련 일뿐 아니라 한글전용운동과 잡지발행 등 여러 방면에 걸쳐서 수많은 활동을 펼쳤다. 때문에 진정 그는 초창기 부산 서양음악 문화의 개척자였으며,나아가 한국 서양음악계에 디딤돌로서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금수현은 1919년 7월 22일,부산 강서구 대저 1동 전금(全金) 마을에서 김녕김씨(金寧金氏) 충의공파(忠毅公派)의 26세손으로 태어났다.
정미업과 땅콩재배를 했던 아버지 김득천(金得千)의 3남 1녀 중 장남이었다. 소년시절 그는 독실한 불교 집안의 비교적 유복한 환경 속에서 자랐다.
그러나 소년 금수현이 음악에 입문하는 계기는 초창기 서양음악가들이 대부분 기독교 문화를 통해 음악에 입문한 것과는 달리,초등학교 학예회 때 김두성(金斗星) 담임 선생님의 칭찬에 크게 고무되어서였다. 이런 인연으로 낙동강변에 노래비가 세워졌다.
하지만 금수현은 사업가나 금융가로 키우려던 아버지의 뜻에 따라 부득이 하게 부산제2상고(현재 부산상고)에 입학했으나,음악에 대한 꿈을 결코 저버릴 수 없었다.
마침내 아버지를 설득시킨 그는 졸업과 동시에 일본으로 건너가서 동양음악학교 본과에 성악전공(바리톤)으로 응시했다. 그가 이 학교를 지원한 것은 비록 희망했던 작곡과는 없었지만,사립으로 꽤나 전통이 있다는 소문을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졸업 후 청년 금수현은 호시 유메지(星夢二)로 창씨개명하고,아사쿠사(淺草)의 국제극장 내 마츠다케(松竹) 오페라부 합창단원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당시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으로 전운이 감도는 어수선한 분위기였기 때문에 오페라단이 해체되는 등,그의 활동무대는 여의치 않았다. 이에 그는 1941년 5월 마침내 조선으로 영구 귀국했다.
고향에 돌아온 금수현은 맨 먼저 부산좌(지금의 부산극장)에서 독창회를 갖고,친구들과 노래극을 만들어 김해 마산 삼천포 통영 등지를 순회 공연했다. 1942년 4월에 동래고등여학교 음악교사가 되었다. 그는 이곳에 재직할 당시 소설가 김말봉(1901~1961)의 딸 전혜금(全蕙金)을 만나 1943년 10월 27일 백년가약을 맺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전혜금은 동래고녀를 졸업하고,인천에서 교편을 잡던 그의 제자였다. 김말봉은 그녀의 의붓어머니였는데,이런 인연으로 1947년 작곡한 그의 대표작 '그네'는 김말봉이 시를 지었다. 해방이 되자 금수현은 건국준비위원회 경남도위원회 문화위원으로 위촉되었다.
27살의 최연소 건국준비위원회의 도위원으로서 해야 할 첫 임무는 관악대와 혼성합창단을 만드는 일,'독립'이라는 오페레타를 작사·작곡하여 연습하는 일 등이었다. 그러다 그 해 10월 금수현은 동래고녀에서 경남여고 교감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 무렵 경남도 학무국장이자,신설된 부산사범학교 교장이었던 윤인구(尹仁駒,부산대 초대 총장)의 요청에 따라 '8월 15일'이라는 행진곡풍의 노래를 작곡했다.
'죽음의 쇠사슬 풀리고 자유의 종소리 울린 날'로 시작되는 이 노래는 학생들이 쉽게 부를 수 있는 행진곡풍이었다. 이 노래는 곧바로 프린트가 되어 모든 학교에 배포되었으며,부산방송국에서는 작곡자 자신이 매일같이 노래지도를 하면서 보급했다. 진정 부산은 이제야 온통 '8월 15일'이었다. 당시 술집 접대부들도 이 노래를 젓가락을 두드리면서 불렀으며,손님들도 이구동성으로 함께 노래하면서 해방의 기쁨을 맘껏 누렸다.
금수현은 부산의 음악인과 음악교사들을 중심으로 1946년 '경남음악협회'를 결성하고, 초대 회장이 되었다.
이 협회는 경남에 음악문화를 보급하기 위해 조직되었는데 교육음악부,성악부,기악부,작곡부의 4부문으로 구성되었다. 음악 인구의 저변 확대를 꾀하기 위해 경남음악콩쿠르대회,음악주보 발간 등을 수행하였다.
1946년 제1회 경남음악콩쿠르대회가 경남여고 강당에서 열렸다. 이 콩쿠르는 해방 이후 전국에서 처음 시도된 것인데,경연대회의 전범이 되었다.
한편 경남음악협회는 해방 후 첫 음악간행물인 '음악주보(音樂週報)'를 정기적으로 펴냈다. 8절지 1매(4면)를 프린트한 것이었는데,음악계의 주요 뉴스와 교재용 노래 1곡을 실어 부산과 경남의 각 학교에 배부했다. 특히 주보는 매월 3원의 유가지였는데도 희망 학생이 많아 매주 2천 부를 찍어야 했다. 이 경험으로 1951년 금수현은 대청동에 새로이출판사를 차려 일반도서 및 악보출판을 시도했다. 1970년에는 음악잡지 '월간음악'을 창간했으며,1992년까지 무려 22년 동안이나 발행함으로써 척박했던 한국음악계의 디딤돌 역할을 다했다.
1947년 금수현은 경남도립극장의 극장장으로 취임하자 한국의 쟁쟁한 음악가들을 불러와 매달 1회의 '희망음악회'를 열었다. 이 음악회는 희망하면 누구나 무대에 섰으며,곡목은 청중의 요청에 따라 조정되는 독특한 형태였다.
1년 후 극장장직을 그만둔 그는 '새들예술원'이라는 음악극 공연단체를 만드는 한편,교단으로 복귀해 부산사범학교의 교감이 되었다.
1949년에 그는 음악인뿐만 아니라 문화를 사랑하는 30여 명을 모아 '노래하자회'를 조직하고,매월 쉬운 새노래를 만들어 미공보원에서 청중들과 함께 부르는 개창운동을 전개했다.
공교롭게도 1950년 동족상잔의 비극이 일어난 날은 경남음악협회의 제5회 경남음악콩쿠르가 동광국교 강당에서 열리는 날이었다.
사상 유례가 없을 만큼 많은 인원이 참가했던 음악콩쿠르는 잇따라 전해오는 전쟁소식에 본선을 치르지도 못한 채 아쉽게도 해산되고 말았다.
1952년 금수현은 34살의 젊은 나이에 파격적으로 경남여중 교장으로 발탁되었다. 1956년 2월에는 통영고 교장을 역임했으며,1957년에는 문교부 편수관으로 6년간 근무했다.
편수관은 각급 학교의 교육과정을 정하고,국정교과서의 편찬과 검인정교과서의 검열 등을 수행하는 주요한 직책이었다.
한편 1961년 5·16 직후 금수현은 박정희 군부정권의 중앙정보부 행정이사관 시사정보실장에 발탁되었다. 이때 그는 중앙정보부의 기관지 '양지(陽地)'의 발행일을 맡기도 했다.
곧 공화당이 조직되자 중앙상임위원이 되어 부산 동구에서 국회의원으로 출마했으나,처참하게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이것은 그에게 있어서는 일생일대의 외도이자,최대의 실패였다.
1963년부터 1965년까지 금수현은 국제신보 고문을 맡아 '거리의 표정'이라는 칼럼을 썼으며,이를 '거리의 심리학'이라는 책으로 묶어 간행했다.
또 1965년 '영 필하모니관현악단' 이사장직을 맡았으며,1968년 금잔디유치원을 설립했으며,1970년에는 '월간음악'을 창간했다. 그리고 1972년 음악저작권협회 회장,1982년 한국작곡가협회 회장,1982년 한성로타리클럽 회장 등을 지냈다.
그는 필생의 작품인 오페라 '장보고'를 3년여의 각고 끝에 완성하고 난 후,당뇨합병증으로 오랜 투병생활을 하다가 1992년 8월 31일,73세로 세상을 떠났다. 김창욱·동의대 강사(음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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