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문화

가수 현인

浩溪 金昌旭 2011. 3. 14. 16:50

부산일보 | 6면 | 입력시간: 2003-07-23 [00:00:00]

 

 

문화
[역사속 부산사람] <14> 현인 (1919~2002)
고단했던 한국현대사 '희망'을 노래한 歌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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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부산사람] <14> 현인 (1919~2002)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부두에/

목을 놓아 불러봤다 찾아를 봤다/

금순아 어디로 가고 길을 잃고 헤매었던가/

피눈물을 흘리면서

일사이후 나홀로 왔다.'

이것은 1951년 피난지 대구에서

오리엔트레코드사가 내놓은

대 히트곡으로

누구나 쉽게 흥얼거리는

'굳세여라 今順아'의 노랫말이다.

사실 이 노래

가장 부산적인 대중가요이자,

가수 현인의 존재를

대중의 가슴 속에 깊이 각인시킨

노래로 유명하다.

또 흥남부두·국제시장·영도다리 등의

어휘를 통해 전쟁으로

가족과 생이별을 하고 낯선 타향에서

고통받았던 서민들의

절절한 슬픔을 그려낸 노래이기도 하다.

한국음악사에서 볼 때 일제강점기에 노래를 시작한 '가수 1세대'의 대표주자인 현인(玄仁,본명 玄東柱)은 1919년 영도구 영선동에서 태어났다. 영국 스탠더드 석유회사에 다녔던 아버지 현명근과 일신여학교를 나온 신여성 어머니 오봉식의 2남 1녀 중 맏이였다.

그는 풍족한 가정환경에서 아버지 회사의 사원주택이 있던 영도와 할머니댁이 있던 동래군 구포면을 오가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5살 때 마이니치(每日) 신문의 동경지사 기자로 근무하고 있던 아버지를 만나러 갔는데,마침 히비야(日比谷) 공회당에서 열린 러시아의 가수 샬리아핀의 독창회에서 본격적인 음악을 처음 접했다.

소년 현인은 구포소학교에 입학,2학년 때 초량의 영주소학교로 옮겼다. 5학년 때 아버지가 경성지국으로 전근하자 서울 죽첨소학교로 전학했고,1931년 경성제2고보(지금의 경복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영어와 일어 그리고 음악에 재능을 보였던 그는 학교의 배구선수였을 만큼 운동도 잘 했으며,방과후에는 밴드부에서 일본의 대중가요나 미국의 포크송을 트럼펫으로 즐겨 불었다.

3학년 때 장티푸스에 걸려 죽을 고비를 넘겼지만,이때 어머니가 동생을 낳다 세상을 떠나는 아픔도 겪는다.

1935년 어린 시절의 꿈인 파일럿이 되기 위해 일본 육사에 시험을 치러 도쿄에 갔지만,일본 군인이 싫어서 우에노음악학교(上野音樂學校,지금의 동경예대) 성악과에 입학해 본격적으로 음악공부를 시작했다.

당시 일본은 서구문화를 접할 수 있는 통로였는데,'근대'라는 이름의 제국주의가 아시아에서 선명했던 곳은 상하이(上海)와 조선 지식인의 지적(知的)인 메카였던 도쿄(東京)였다. 음악도 예외는 아니었다. 대표적으로 관립(官立) 우에노음악학교는 조선의 음악엘리트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곳은 홍난파(洪蘭坡)의 언급처럼 수준 높은 음악교육을 받을 수 있는 '최고 이상'이자 '유일무이한 이상의 정점'이었지만,조선인의 입학이 거의 허용되지 않았다.

그나마 일선융화(日鮮融和)의 의도 아래 조선총독부의 관비유학생(官費留學生)으로 소프라노 윤심덕(尹心悳),바이올리니스트 홍난파,동요작곡가 윤극영(尹克榮) 등 극소수만 입학했다. 그러나 음악학교에 진학했다는 이유로 아들을 괘씸하게 여긴 아버지가 학비를 보내주지 않자,그는 학비를 벌기 위해 마이니치신문의 보급소에서 신문을 손수 포장했다.

1년 뒤 NHK 합창단원이 된 그는 음악이론보다는 재즈나 샹송을 좋아했으며,방송국에 드나들며 최신 음악정보나 악보를 구해 열심히 익혔다.

1939년 창씨개명 때 고토 징(後藤仁)이라는 일본 이름을 얻었다. 해방 후 그가 현인이라는 예명을 갖게 된 것은 이때의 이름을 따랐기 때문이다. 그는 유학시절 일본 왕족 출신의 마리코와 교제했지만,본과 3학년 때 귀국해 소학교 교사 조창길과 첫 결혼을 했다.

1942년 우에노음악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해 성악교수가 되려 했으나 여의치 않자,성보악극단의 음악교사로 들어갔다.

제2차 세계대전이 치열했던 1943년 강제징용을 피하기 위해 황해 등과 악극단을 구성해 중국 텐진(天津)으로 떠났다. 그는 텐진의 클럽 신태양의 무대에서 샹송 등 외국가요를 본격적으로 불렀다.

중국의 주요 도시 순회공연 후 상하이의 국제클럽에 취직한 현인은 마리아라는 혼혈 여가수와 사랑에 빠져 동거를 했다.

그러나 해방 후 1946년 귀국한 현인은 그의 음악활동에 일대 전환기를 맞는다. '성악을 전공한 나는 샹송·탱고 등 외국 곡이 아닌 유행가를 부를 수 없다'고 고집했지만,작곡가 박시춘(朴是春)의 강력한 권유로 대중가수의 길로 접어들었다.

박시춘은 유호(兪湖)가 작사한 '신라의 달밤'을 작곡하여 럭키레코드사 창설 제1회 취입곡으로 출반케 하여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달빛이 비치는 산사에서 풍류객이 고도 경주를 내려다보며 흥얼거리는 듯한 가사,이국적인 멜로디,가수 특유의 부르르 떠는 창법 등이 대중들의 마음을 일순 사로잡았다.

1949년 한국 최초의 음악영화 '푸른 언덕'의 주인공으로 등장,영화주제가를 부른 것도 치솟는 인기 덕분이었다. 더욱이 그는 당시 세계를 풍미하던 '베사메 무쵸' 등을 번안해 노래함으로써 트롯트 일변도의 대중음악계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으며,1952년에는 '장미빛 인생' 등을 불러 샹송 붐도 불러 일으켰다.

하루아침에 스타가 된 그는 '럭키 서울' 등을 잇따라 히트시킴으로써 1950년대에 가장 빛나는 대중예술가의 한 사람으로 자리매김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때 남태평양으로 징용간 젊은이들의 망향을 그린 '고향만리',6·25전쟁으로 고향을 등지고 남하한 사람들의 그리움을 노래한 '비 내리는 고모령',전쟁 중 국군장병들의 사기를 북돋아 준 '전우여 잘 자라' 등은 고단했던 한국현대사를 반영한 민족의 노래이자,서민의 아픔을 달래준 희망의 노래였다.

그러나 한국전쟁기 부산에서의 삶은 그에게도 고통스런 시기였다. 1950년 4월부터 그는 동아극장 은방울악극단의 '은방울쇼'에서 당대 스타였던 가수 남인수(南仁樹),영화배우 황정자(黃貞子)·최은희(崔銀姬) 등과 연예활동을 꾀했다. 또 1951년에는 동아극장에서 '현인과 그 악단'을 만들어 '멍기의 노래'를 무대에 올렸다. 1952년 신청년극단의 가극 '성웅 이순신'에 남인수·김정구·신카나리아·이난영 등과 출연하며 어려운 삶을 영위했다.

1967년에는 문화공보부 공로상을 받으며 이따금 방송을 통해 음악활동을 했지만,지난 시절의 영화를 다시 누리지는 못했다. 그것은 1974년 미국이민을 떠나 7년 만인 1981년 돌아온 후의 가수활동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990년대 말에 악극 '그때 그 쇼를 아십니까'에 출연했던 현인은 1천여 곡을 노래한 업적을 평가받아 KBS가요대상 공로상(1990),제30회 가수의 날 특별공로대상(1996),제6회 대한민국연예예술대상(문화훈장,1999) 등을 수상했다. 그리고 2002년 4월 당뇨합병증을 얻어 마침내 세상을 떠났다.

우울한 시대에 서민의 희망을 노래한 대중예술가 현인! 비록 그는 떠났지만,그의 노래는 우리의 가슴 깊이 남아 있다.

이미 대구 파크호텔 입구에 '비 내리는 고모령',경주 불국사 앞에 '신라의 달밤' 노래비가 각각 섰으며,부산시와 영도구청도 옛 영도다리 입구에 '굳세어라 금순아'의 노래비를 곧 세울 예정이다. 그날에 그를 다시 되새길 수 있을 것이다. 김창욱·음악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