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중의 발견
『부산일보』 2011. 01. 24 (15)
김창욱 음악평론가
사람은 누구나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간다. 작게는 가정과 직장, 크게는 국가나 국제사회가 우리 삶의 공동체들이다. 첩첩이 둘러싸인 공동체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공동체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란 '남을 위해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을 주는 일'이다. 주고 나면 결국 받게 되는 것이고, 이처럼 주고받는 일이 우리 삶의 기초를 이루는 것이다.
음악가와 청중, '주고받음' 관계
그렇다면 무엇을 주고받는가?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도 없이 우리는 삶을 통해서 '물자나 서비스, 정보 같은 경제적 가치'를 주고받는다. 그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정이나 사랑과 같은 정신적 가치'도 주고받는다. 요컨대 주고받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개인과 개인, 개인과 사회, 사회와 사회의 상호관계를 구축하는 기본적인 요소이다.
'주고받음'의 원리는 음악 쪽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그것이 상품이든 아니든, 음악가들은 음악이 가진 고귀한 가치와 향기를 수용자들에게 준다. 작곡가는 작품을, 연주자는 연주를 통해 음악을 청중에게 준다. 그러면 청중은 그들이 음악가로부터 받은 만큼의 대가를 음악가에게 되돌려 준다. 작곡료·연주료 등이 그것이다. 이같이 음악가와 청중의 원활한 '주고받음'은 보다 긍정적인 음악문화를 형성시키는 토대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중은 오랫동안 음악회의 중심에서 밀려나 있다. 그들은 작곡가나 연주자와는 달리, 단 한 번도 음악회의 주빈으로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적이 없다. 그러나 특정 소수의 귀족이건 불특정 다수의 시민이건 간에 수용자 청중은 지난날 음악역사를 변화시킨 또 하나의 주역이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이미 무대를 향해 박수나 쳐 주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다.
이제 음악가들은 마땅히 청중의 존재를 발견해야 한다. 그들이 오후 7시 30분에 열리는 음악회에 늦지 않으려 애쓴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하루 일과를 마친 그들이 파김치가 된 몸으로 꽉 막힌 퇴근길을 겨우 뚫고 온다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또한 그들이 저녁을 거르거나, 기껏 라면이나 김밥으로 허기를 달래고 연주장에 들어선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한다. 그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존재들인가?
그런 만큼 청중은 자신이 원하는 바를, 원하는 만큼 충족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첫째, 그들은 연주회 가치가 그들이 구입한 티켓가격보다 더 커야 할 것을 기대한다. 가령 1만 원짜리 티켓을 샀는데, 연주자가 5천 원짜리 정도의 역량밖에 보여주지 못했다면 청중은 '속았다'거나, '본전 생각 난다'와 같은 마음이 들기 마련이다. 이후 그들은 다시금 그쪽으로 발길을 옮기지 않을지도 모른다.
둘째, 그들은 자신이 듣고 싶어 하는 레퍼토리로 프로그램이 짜여 지기를 기대한다. 청중이 듣고 싶어 하는 음악이 무엇인지 굳이 알려고도 하지 않고, 최소한의 시장조사도 없이 오직 연주자 자신이 하고 싶은 음악만을 무대에 올린다면 청중의 기대는 크게 약화되고 말 것이다.
청중 기대에 적극 다가서야
셋째, 그들은 연주 팸플릿에서 당일 연주회에 대한 정보를 손쉽게 얻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화려한 컬러에 코팅까지 입힌 팸플릿이라 할지라도 원어로만 악곡명을 써 놓거나 악곡해설도 없이 오직 주최 측의 격려사·인사말·스폰서 광고 등으로 지면을 빼곡하게 메운다면 청중은 아예 팸플릿을 거들떠보지 않을 것이다.
넷째, 그들은 좀 더 색다른 음악회 형식을 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연주자의 무대 출입에 따라 흑백으로만 비춰지는 조명, 어떠한 내레이션도 없이 오직 프로그램 순서에 따라 연주만 계속되는 구태의연한 형식은 청중의 흥미를 자극하지 못한다.
이럴 때 청중에게 돌아오는 무형의 만족도는 반감될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음악회가 부산에서도 적잖이 열리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떠올릴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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