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칼럼] '오부리'를 위하여

浩溪 金昌旭 2018. 3. 25. 20:35



2018. 03. 26 (31)


[아침시선]

'오부리'를 위하여

 

 

김창욱 음악평론가·부산시의회 정책연구위원

  

'오부리 뛴다'는 말이 있다. 주로 클래식 연주자들이 쓰는 용어다. 여기서 '오부리', '오블리가토(obbligato)'에서 비롯된 것으로 음악의 주선율 연주를 도와주는 보조적 연주를 뜻한다. 그러니까 주된 선율 연주가 화려한 빛이라면, 보조적 연주는 그 빛을 더욱 빛나게 만드는 그림자다.


언제, 누가 명명했는지 알 수 없지만 '오부리'라는 말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때 오부리란, 클래식 무대에서 행해지는 화려하고 품위 있는 연주회가 아니라 공연장 밖의 각종 행사, 가령 기념식 결혼식 개막식 등에서 행해지는 음악 연주를 폄하해서 일컫는 말이다. 요컨대 '오부리 뛴다'는 말은 행사의 보조적 수단으로서 음악을 연주한다는 의미다.


클래식 음악계 '오부리' 풍토

과연 경멸하고 비하할 일인가

줄어드는 음악 일자리와 공연

제대로 된 오부리로 돌파하길

 

오부리는 많이 뛸수록 좋다. 그럴 경우 수용자는 그만큼 음악 향유 기회를 늘릴 수 있고, 연주자는 반대급부로 더 많은 대가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래식 음악계에서는 오히려 그러한 행위를 경멸하거나 비하하는 풍토가 없지 않다. 음악을 위한 음악, 이른바 예술지상주의적 관념이 아직도 뿌리 깊이 남아 있는 까닭이리라.

 

그러나 보라! 작금의 클래식 음악계의 현실이 어떠한가?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같은 서유럽은 우리 젊은 음악인들이 선망하는 유학지다. 그들은 적지 않은 비용과 젊음을 소진하면서 끝내 물설고 낯선 나라로 떠난다. 짧게는 5, 길게는 10, 각자 청운의 꿈을 성취하기 위해 고독한 삶을 감내하며 고군분투한다. 그래서 마침내 빛나는 학위를 따서 금의환향한다.

 

그런데 현실은 그들을 수용할 만한 마당이 못 된다. 제일 먼저 대학의 문을 두드리지만 강의 한 시간 따기조차 하늘의 별 따기요, 대학마저 학생 수가 줄어 통폐합을 앞두고 있거나 머잖아 문을 닫을 판이다. 관립 합창단이나 교향악단에 들어가려 해도 좀처럼 자리가 나지 않고, 레슨 시장은 이미 파장 분위기다. 그 흔하던 음악학원도 3곳 중 2곳이 폐업이다.

 

그래도 남들보다 한발 앞서려면 더 자주, 더 많이 무대를 열어 스펙을 쌓아야 한다. 쥐꼬리만 한 지원금을 타거나, 하다못해 자비를 들여서라도 음악회를 연다. 코앞에 성큼 다가선 무대연습에 매진해야 할 연주자가 대관·홍보는 물론, 청중 동원에까지 골머리를 앓아야 한다. 그래 봐야 객석은 가족과 친지, 친구와 선후배들로 겨우 절반을 메우는 형편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젊은 그들에게 권하고 싶다. 자신을 구속하는 울타리를 과감하게 박차고 나오기를. 그래서 오히려 광활한 오부리의 세계로 나아가기를!

 

그렇다고 오부리를 쉽거나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그럴 경우 수용자의 참여도와 만족도가 현저히 반감될 뿐 아니라, 오부리의 영역과 기회조차 점차 축소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만족도 낮은 오부리가 여기저기서 횡행하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보다 그들은 오부리에 대한 비전이나 철학이 없고, 그 추진 동력이 되는 의지력마저 박약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오부리를 우습게 여긴다면, 어찌 수용자 대중의 만족도를 드높일 수 있겠는가.

 

사실 오부리를 하려면, 많은 생각을 해야 한다. 먼저 수용자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한다. 성별·연령·지역을 불문하고, 수용자의 공통분모를 이끌어 내려면, 최소한의 시장조사가 필요하다. 가령 '전국노래자랑'을 진행하는 송해 씨는 맨 먼저 현지에 도착, 목욕탕 손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고 한다. 해당 지역민의 관심과 취향을 파악하기 위해서다.

 

그러고 나서 그들의 눈높이에 맞는 기획, 레퍼토리 구성, 작곡과 편곡, 연습과 실연(實演) 등의 매뉴얼을 갖추어야 한다. 언제, 어디서나, 어떤 음악이든 오부리를 뛸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요컨대 수용자가 원하는 음악을, 원하는 만큼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 된다면 음악에 대한 사회적 수요는 갈수록 늘어날 수밖에 없다. 바야흐로 제대로 된 오부리를 뛰어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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