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교수님의 글, 정말 '기발'하지 않습니까?
공략의 방법도 대단히 탁월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김 교수님의 '기발'함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앞서 시리즈를 여기서 몽땅 베낀 것이라면?
정녕 이것이 '기발'한 일이 아닌가요?
이 글을 어디서 베낀 것인지는 이미 말씀드렸으니,
이제 대체 얼마나 베낀 것인지를 말씀드려야겠네요.
아마도 99%는 되지 않을까요?
구체적인 근거도 남기겠습니다.
아래는 3회의 시리즈 가운데
김 교수님께서 쓰신 두 번째 글입니다.
베낀 부분을 체크해 올립니다.
아울러, 이에 대한 구체적인 근거도 남깁니다.
앞서처럼.
이제 김 교수님께서 쓰신 세 번째 글을 올립니다.
시리즈의 마지막을 장식한 작품이지요.
교수님의 '베끼기' 신공은 여기서도 어김없이 빛을 발합니다.
우리의 기대를 결코 저버리지 않습니다.
먼저 책에서 베낀 부분을 체크한 다음,
이에 대한 구체적인 근거를 남깁니다.
처음처럼.
[성공적인 예술경영]이라는 책이 나온 것은 1997년 9월이고,
김 교수님께서 이를 베껴 쓴 것이 2000년 7월이네요.
그러니까 책이 출판된 뒤,
꼭 3년이 지나 완벽하게(!) 베껴 쓴 것이지요.
제가 이 책을 구입한 것이 그 해 11월이니,
불과 4개월 뒤에 제가 그의 표절(剽竊) 사실을 인지했던 셈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은 그런 사실을 알고도 왜 지금까지 침묵했는가? 20년이나 지나서 뜬금없이 문제를 제기하는 의도가 무엇인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그러나 이에 대한 답변은 잠시 접어 두겠습니다. 다만, 여기서 분명히 남기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디선가 읽은 이야깁니다(아마 이어령 문학평론가의 어느 책인 듯). 타조(駝鳥)가 사막을 가로지르며 마구 달리고 있습니다. 그 뒤를 사냥꾼이 총을 들고 추격합니다. 한참을 달리던 타조가 어느 순간, 갑자기 제 대가리를 모래 속 깊숙히 푹 처박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모래 속에 파묻힌 타조는 눈에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자기가 보이지 않으니, 아무도 자기를 볼 수 없다고 착각한 것이지요. 타조의 어리석음입니다.
김 교수님도 그랬을 것입니다. 세상에 널린 것이 책인데, 불과 139쪽밖에 안되는 소책자에서 좀 베끼기로서니 그 사실을 과연 누가 알 수 있으랴? 아니, 누가 그 책의 존재를 알기나 할까? 라고 생각할 수 있었겠지요. 그의 도덕적 의식이 매우 박약하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입니다(그의 도덕성 문제는 다음에 언급할 기회가 오겠지요).
그러나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 법입니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다해서 보거나 듣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라는 것이지요. 누군가 보고, 또 누군가는 듣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거지요.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늘의 그물이 성긴 듯하지만, 무엇 하나 놓치는 법이 없다’(天網恢恢疏而不失). 이를 간과한 탓이지요. 그를 위해 애석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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