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억 작사, 최영섭 작곡의 '그리운 금강산'(1962)
소프라노 김영미가 노래하는 '그리운 금강산'
테너 플라치도 도밍고가 노래하는 '그리운 금강산'
소프라노 베로니카가 노래하는 '그리운 금강산'
최영섭의 '그리운 금강산'
"누구의 주제련가, 맑고 고운 산...".
분단이라는 민족의 비극과 통일이라는 민족의 염원, 그것을 아름다운 시상(詩想)으로 승화시킨 시문학, 그리고 그 시가 주는 감동으로 빛어진 악상(樂想). 분단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가슴에 가장 와 닿는 노래를 꼽으라면 누구나 주저없이 '그리운 금강산'을 꼽을 것이다. 가곡 '그리운 금강산'은 분단이라는 비극과 통일의 염원을 아름다운 시상으로 승화 시킨 시문학과 그 시가 주는 감동으로 빚어진 악상의 결합으로 결실을 맺었다.
우리 근. 현대사 음악사에 있어서 '그리운 금강산' 만큼이나 반응을 일으킨 화제작은 아마 없을 것이다. 남 북 적십자회담, 남북 이산가족 상봉, 남북 예술단 교환 공연 등 남북행사에 즈음해서 언제나 "통일 주제가"로서 민족 화해와 통일의 무드를 조성해 주는 곡이 '그리운 금강산'이며, 성악가들이 제일 부르고 싶어 하는 가곡, 가장 많은 성악가들이 음반으로 취입한 가곡,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가곡, 한국 가곡사에서 최고의 힛트작, 저작권료를 가장 많이 받는 가곡 등 각종 기록과 함께 "국민가곡"이란 신조어를 만들어 낸 곡이 바로 이 '그리운 금강산'이다.
그런데 사실 '그리운 금강산'은 통일 주제가라기 보다는 反共 주제가로, 가곡이 아니라 칸타타로 이땅에 태어났다. 1961년 KBS는 반공과 조국 강산을 주제로 한 노래의 제작을 시인 한상억과 작곡가 최영섭에게 의뢰하였다. 이 의뢰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11편의 곡으로 구성된 '아름다운 내 강산'이란 제목의 칸타타이며 '그리운 금강산'은 그 중 네 번째 곡이였다.
'그리운 금강산'은 발표와 동시에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되였고,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1972년, 분단 이후 최초로 남북 적십자회담이 개최될 때 남북 화해의 분위기 조성을 위한 곡으로 채택되어 방송에서 연일 틀어준 것이 계기가 되었으며 통일 주제가라는 명칭과 함께 "국민가곡"이란 칭호까지 얻게 된 것이다. 그 후 1985년 9월에는 분단 이후 최초로 개최된 "남북 이산가족 고향 방문 예술단 교환공연"의 레퍼토리로 채택되는 영광을 누리게 되였다. 남한을 대표하는 노래로써 북한 주민에게 들려주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 가사는 민족 화합을 조성하는데 적합하지 않았다. "더럽힌 지 몇 해", "우리 다 맺힌 원한", "더럽힌 자리" 등의 원가사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북한에 대한 적대 감정을 가지고 금강산을 묘사했기 때문이다. 그 후 가사를 일부 수정하였다. "더럽힌 지 몇 해"가 "못 가 본 지 몇 해" 로, "우리 다 맺힌 원한"이 우리다 맺힌 슬픔" 으로, "더럽힌 자리" 가 "예대로인가" 로 바뀐 것이다.
그리고 이로 인해 적대적인 통일 주제가가 아니라, 명실공히 민족 화합의 정신을 바탕으로 한 통일 주제가로 다시 태어나게 되였다. 문자 그대로 우리민족이 다 같이 부를 수 있는 "한민족의 송가" 로 바뀐 것이다.그 강산은 이제 갈 수 없는 산이 아니라 갈 수 있는 산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운 금강산'은 여전히 애창되고 있고 오히려 더 절실하게 우리의 가슴에 와 닿고 있다. 금강산에 갈 수 있다고 해서 '그리운 금강산'의 역할이 끝난 것이 아니라 통일이 되는 그 날까지도 널리 불릴 것이다. 단순히 금강산을 그리워 하는 노래가 아니라 통일을 염원하는 노래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역설적으로 '그리운 금강산'이 불리는 것보다 이제 더 이상 안 불리는 때를 동경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민경찬(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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