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02. 17
<칼럼>
구멍가게가 사라졌다
두어 달이나 지났을까? 길거리를 지나다 동네 구멍가게에 들렀다. 음료수를 사기 위해서였다. 우두커니 가게를 지키고 섰던 주인 할머니가 음료수를 건네주며 연신 고맙다며 머리를 조아렸다. 기껏 음료수 몇 병 사는데, 이렇게 연세 드신 분이? 워낙 가게에 손님이 없다보니 가게를 찾아주는 손님만 봐도 고마운 일이란다. 그러나 그 가게는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을 닫았고, 그 자리에는 곧장 24시 편의점이 들어섰다.
동네 구멍가게, 승자독식 대자본 정글의 희생양으로
그러고 보면 내가 사는 동네에서도 그 많던 구멍가게가 깡그리 사라졌다. 자본으로 중무장한 프랜차이즈 가맹점이나 대형 슈퍼마켓들이 눈 깜짝할 사이에 잡아먹었기 때문이다. 어려웠던 시절, 그래도 구멍가게를 하면서 먹고 살았던 영세 자영업자들이 오늘에 와서는 실업자로 전락하거나, 거대 자본시장의 종업원으로 내몰리고 말았다.
이렇게 된 것은 1979년 중소기업의 안전핀이었던 중소기업 보호업종 제도가 2006년 말에 들어와 마침내 폐지되고 말았던 탓이다. 대기업의 무차별적 사업 확장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가 해제되자 시장 생태계는 급격히 붕괴되었고, 대기업의 사업영역 확장은 순식간에 중소기업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이제 시장은 약육강식의 정글로 변했고, 정글에서 이긴 대기업은 바야흐로 승자독식 시대를 맞았다.
사실 대기업의 '지네발식' 사업확장은 비단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흔히 대기업의 사업확장을 '문어발식'이라 표현되기도 하는데, '고르디우스의 매듭'이라는 책은 재벌의 탐욕을 '문어발'이 아니라 '지네발'이라는 표현을 써야 한다고 지적한다. 문어발은 몸집만 키우지만, 지네발은 중소기업의 싹을 완전히 잘라버리는 독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무소속 정태근 의원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30대 재벌그룹의 계열사 수는 2006년 1월 500개에서 2011년 1천87개로 늘어났고, 자산총액도 무려 63.7%가 증가한 것으로 드러났다.
SK․롯데․CJ 등은 생수사업에 진출했고, LG전자는 정수기 시장에 뛰어들었다. 삼성․SK 등 많은 재벌그룹이 문방구같은 소모성 자재를 공급하는 계열사 운영에 나섰다. 업종에 있어서도 대형마트, 소모성자재 유통뿐만 아니라 피자체인점, 빵집, 커피전문점, 떡볶이․꼬치구이 체인점, 와인 수입․유통, 골프교실 운영 등의 중소기업이나 영세 자영업자들의 영역까지 뛰어들어 무차별적으로 시장을 빼앗고 있는 것이다.
내가 사는 사하구는 SSM(기업형 슈퍼마켓)이 전국에서 두 번째로 많은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사하구 신평골목시장 근처에는 롯데마트를 비롯해서 벌써 3개의 대형마트가 들어섰다. 최근에는 이 시장 가까이에 대형 식자재 마트가 들어온다는 소식이다. 이에 지역 상인들이 느끼는 불안감과 공포감은 극도에 달했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갈수록 위협 받는 생존권 앞에서 이들의 반발과 저항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사하구 SSM 전국 2위…영세자영업 지켜낼 법적 장치 시급
'인간'(人間)이란 '사람과 사람의 사이'를 뜻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세상에 '나'뿐만 아니라, '너'와 '우리'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남이야 죽든 말든 나만 잘 먹고 잘 살면 된다는 사람이 다름 아닌 '나뿐'(나쁜) 사람이라는 사실도 깨달아야 한다.
나와 너와 우리가 함께 어울려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리고 대기업의 맹독성 지네발로부터 영세 자영업자나 중소기업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이를 위한 법적·제도적 장치가 시급히 마련되어야 한다. 일자리 만들기보다 있는 일자리부터 먼저 지켜주는 일이 오히려 급선무다. 총선과 대선이 치러지는 올해는 이래저래 중요한 시기다.
/김창욱 (http://blog.daum.net/kcw66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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