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예술문화비평가협회, '예술문화비평' 2012년 봄호
청산해야 할 '뽀대' 문화
대형 문화시설 건립에 즈음해서
김 창 욱(음악평론가)
'세계 최고의 ○○', '동양 최대의 ○○', '○○의 랜드마크'…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말이다. 주로 거대한 규모, 화려한 외양, 무엇보다 돈이 많이 들어가는 건물 앞에 붙여지는 칭호다. 권력과 자본이 눈빛만 맞으면 얼마든지 지을 수 있는 구조물을 일컫기도 한다.
문화시설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1천624억원의 건립비가 들어간 부산국제영화제(BIFF) 전용관이자 다목적 공연장인 '영화의 전당'이 들어섰다. 축구장 두 배에 이르는 지붕(빅 루프)은 가히 '기네스' 감이다.
권력과 자본의 합작품, 대형 문화시설
그 뿐이 아니다. 머잖아 대형 문화시설이 앞다투어 부산에 들어설 계획이다. 제2벡스코(4천석 규모의 강당, 건립비 1천19억원, 올해 완공예정), 부산국립극장(2천석 규모의 대극장, 건립비 2천547억원, 2015년 완공예정), 오페라 하우스(2천석 규모의 대극장, 건립비 5천억원 예상), 제2시립미술관(건립비 410억원, 2015년 개관예정), 유엔평화기념관(건립비 289억원, 올해 완공예정)이 그러하다. 모두 막대한 건립비가 들어가는 건물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이들 문화시설에 무엇을 담고 어떻게 운영할 것인지에 대한 폭넓은 논의가 없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가령 북항 재개발지역에 부산시가 건립하고자 하는 부산오페라하우스도 그렇다.
지난 2008년 5월 15일 부산시는 롯데그룹과 '부산오페라하우스'(가칭, 새롯데 뮤지컬센터) 건립기부 약정식을 체결했다. 약정서는 롯데그룹이 사업비 1000억원을 들여 북항 재개발지역 내 부지 6만여㎡에 연면적 2만3100㎡ 규모의 오페라하우스를 건립, 부산시에 기부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 2000석 규모의 전용극장과 1500석 규모의 다목적 극장, 부대시설을 포함하는 오페라하우스는 당초 건립비 1천억원을 훨씬 넘어서는 무려 5천억원이 투입될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부산시는 '부산오페라하우스 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지난해 4월 25일부터 한 달간 부산오페라하우스 국제 아이디어를 현상공모전을 열었다. 여기에는 총 43개국에서 302점을 응모했고, 최종 당선작은 올 상반기에 결정될 예정이다.
그러나 '영화의 전당'만 해도 한 해 40억원 이상의 적자가 예상된다. 적자 폭은 더 커질 수도 있다. 1천624억원을 들인 '영화의 전당'이 매년 40억원 이상의 적자가 누적된다면, 기껏 0.1% 내외의 극수소 향수자를 위한 5천억 짜리 오페라하우스의 적자 폭은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게다가 여기에 소요되는 운영비는 모두 시민들의 혈세로 메워야 할 판이 아닌가!
문화시설, 건립보다 운영이 더 큰 문제
이같은 문제는 지난해 8월 11일 부산시청 국제회의실에서 열린 오페라하우스 전문가 초청 심포지엄에서도 지적되었다. 이들의 공통된 지적사항은 랜드마크에 너무 매달리지 말라는 것이었다.
“오페라하우스를 랜드마크로 짓는 것도 좋지만 부산의 도시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미국 펜실바니아대학 데이비드 레터바로 교수), “랜드마크를 만드는 것은 2차적인 문제다. 오페라하우스를 크고 멋지게 짓는데만 치중한다면 지은 뒤 5년 후에는 단순한 고층건물로 전락할 수 있다. 엄청난 비용을 감수해야 한다”(프랑스 파리건축대학 로랑 살로몽 교수), “오페라하우스를 건립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든다. 오슬로는 20년에 걸쳐 준비하고 만들었으며, 건축비용으로 5억5천만 유로(약 8천4백억원)가 들었다. 그렇게 많은 공적 자금을 투자하는 것이 과연 적당한가에 대해 오랫동안 논쟁이 끊이지 않았다”(오슬로 오페라하우스 번트 하우그 사무처장)는 등의 비판이 그것이다.
더구나 이들은 한결같이 오페라하우스 건립뿐만 아니라 운영에 대해서도 사전에 충분한 준비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오페라 하우스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전문 예술단과 스탭은 물론 경험 많은 전문 행정요원 등이 필요하며, 따라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동시에 진행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부산시는 과연 이들 대형 문화공간에 대한 콘텐츠 발굴, 기능에 따른 공간활용, 그리고 소프트웨어와 운영인력 확보에 고민을 하고 있는가. 시장조사나 경제적 타당성 조사뿐 아니라, 전반적인 시설 조율조차 하지 않은 채 일사천리로 정책을 집행하고 있지는 않는가. 이와 같은 문제는 최근 부산시의 제2시립미술관 건립과정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부산시는 부산비엔날레 전시 등을 위해 하단동 을숙도문화회관 옆에 총 사업비 410억 원을 들여 연면적 1만5천620㎡(지하 1층, 지상 4층 예상) 규모의 가칭 제2시립미술관을 건립하기로 했다. 지난해 9월 부산도시공사와 사업기본협약을 체결했고, 부산도시공사는 이미 턴키(turn key)방식의 공사 입찰공고를 냈다. 올 2월 설계 적격자 선정을 거쳐, 늦어도 7월에는 시공에 들어갈 계획이다.
그러나 문제는 부산시와 부산도시공사가 예술창작촌, 비엔날레 홍보관, 다목적 전시실을 미술관에 들인다는 기본계획만 세웠을 뿐 미술관의 정식 명칭이나 성격, 운영방안에 관한 구체적인 계획을 전혀 수립하지 않았다. 410억 원이라는 혈세를 투입하면서도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도 없이, 우선 건물부터 짓고 보자는 식이다.
더구나 문화시설 건립에 턴키방식을 적용하는 것도 문제다. 대형 토목공사에 주로 채택되는 턴키방식은 시행업체가 설계와 시공을 일괄 수주하고 공사를 마치면 발주처에게 열쇠를 되돌려 주기만 하면 되는 것을 말한다. 이럴 경우 지역업체의 참여나 지역민의 여론이 원천적으로 봉쇄되거나 왜곡될 가능성이 크다. 더욱이 사후에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시행업체에 책임을 묻기도 어렵다.
'전시행정'의 표본, 지역문화회관
브레이크 없는 행정권력은 자치구(區)에도 엄연히 존재한다. 각 구청에 소속된 지역문화회관의 조직과 운영을 통해서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1990년대 이후 지역문화회관들은 자치단체장의 권위와 위광을 한껏 드러내면서 잇따라 개관되었다. 동래문화회관(1999), 금정문화회관(2000), 을숙도문화회관(2002), 해운대문화회관(2007), 영도문화예술회관(2009)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부족한 기획공연 예산, 민간 전문가의 부재, 관장의 잦은 교체 등의 문제를 여전히 안고 있다. 지역민에 대한 양질의 문화 서비스를 제대로 제공하지 못하는 이유다.
재작년 각 지역문화회관의 자체 기획공연 예산을 보면, 해운대가 1억7천7백만원으로 가장 많았다. 그 다음으로 을숙도가 1억4천만원, 영도가 1억3천만원, 금정이 1억원, 동래가 2천만원에 불과했다. 서울 중구 충무아트홀과 안산 문화예술의 전당이 연간 자체 기획예산만 20억원을 상회한다는 점을 비추어 볼 때 다양한 장르와 질 높은 공연은 애당초 기대하기 어렵게 한다.
또한 각 문화회관의 공연기획 전문가의 부재도 문제다. 문화회관은 대부분 민간 전문가도 없이 오직 행정공무원들이 운영을 맡고 있을 뿐 아니라, 관장의 평균 재임기간이 1년 6개월도 채 되지 않아 근본적으로 책임경영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그 결과, 젊고 유능한 문화예술가들이 부산을 떠나고, 볼 만한 공연이 없는 무대에 객석을 채우기도 어렵다. 급기야 알맹이 없는 문화회관은 껍데기로 남을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대형 문화시설 건립에 앞서 이미 존재하는 문화시설을 어떻게 잘 운영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일이 더 급선무다.
시쳇말로 '뽀대 난다'는 말이 있다. '폼 난다'는 뜻이다. 더 큰 규모, 더 화려한 외양을 가진 대형 문화시설의 건립은 정말 '뽀대' 나는 일이다. 그러나 여기에 무엇을, 어떻게 채울 것인가 하는 자기 성찰도 없이 오직 '짓고 보자'는 것은 막무가내식, 묻지마식 토건행정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는 '뽀대' 문화도 청산해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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