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12. 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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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움직인 책(11) : '김종삼 전집'
김창욱 음악평론가
궁핍한 시대에 부르는 사랑노래
한 해의 끝자락이다. 벌써 거리를 밝히는 성탄 트리, 이따금 들려오는 캐럴송은 잠시나마 우리의 어두운 마음에 위안을 준다. 그러나 겨울은 언제나 춥고 배고픈 사람들에게 더없이 서러운 계절이다. 갈수록 양극화되는 내일과 모레는 더욱 그러하리라.
김종삼(金宗三 1921-1984)은 한국 현대시사(現代詩史)에서 빼놓을 수 없는 시인이다. 더구나 그는 낮고 가난하고 외로운 사람들의 마음에 누구보다 앞서 따뜻한 기운을 불어 넣어준 이웃이기도 하다.
황해도 은율에서 태어난 김종삼은 한국전쟁 무렵 시작(詩作)에 손을 댔다. 이후 30년을 넘어서는 시력(詩歷)에도 불구하고, 그는 겨우 2백여 편의 시를 남겼을 따름이다. 그러니까 그는 과작(寡作)의 시인이다.
권명옥이 엮고 해설한 '김종삼 전집'(나남출판, 2005)에는 216편의 시와 5편의 산문이 실려 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묵화」(墨畵)라는 시다.
물 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하루 일을 끝낸 소와 할머니의 풍경이 마치 그림처럼 묘사되고 있다. 예전에 한 지인에게 이 시를 보냈더니, 시 전문(全文)을 보내달라고 했다. 2연이나 3연이 더 있을 것으로 생각한 터다.
비록 시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굴뚝에 저녁연기가 피어오르고 밥 짓는 내음새도 코 끝에 전해져 오는 듯하다. 더구나 시는 고단한 하루를 함께 보낸 소에 대한 할머니의 소박한 감사와 연민, 비슷한 처지에 놓인 가축(家畜)과 인간의 소통과 일체감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의 압축된 시의 모습은 「장편」(掌篇) 2에서도 나타난다.
조선총독부가 있을 때
청계천변 10전 균일상 밥집 문턱엔
거지소녀가 거지 장님 어버이를
이끌고 와 서 있었다
주인영감이 소리를 질렀으나
태연하였다.
어린 소녀는 어버이의 생일이라고
10전 짜리 두 개를 보였다.
총독부가 있을 때라면, 광복 이전 시기를 말한다. 어린 거지소녀가 똑같은 처지의 거지 아비와 어미를 이끌고 청계천변에 있는 10전 짜리 균일상 밥집 문턱에 당도한다. 어버이가 모두 장님이었던 까닭에 소녀는 그들의 손을 놓을 수가 없다. 소녀는 어버이의 생일날을 맞아 따뜻한 밥 한 끼를 대접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주인영감은 누추한 몰골을 한 이들이 자기 집에 밥 얻어 먹으러 들어올까 하여 문전박대한다.
그러나 어린 거지소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오히려 동전 2개를 내보이며 손님으로서 당당하게 밥을 사먹겠다는 의사를 표명한다. 10전 짜리 동전 2개는 몇 날 며칠, 어쩌면 몇 달에 걸쳐 어린 거지소녀가 어렵사리 구걸해서 모은 돈인지 모른다. 그러나 어린 소녀는 자기가 먹을 밥값은 아직 마련하지 못했나 보다.
시인은 이 시에서 장님 거지들의 팍팍한 삶을 담으려 했을지 모른다. 또는 거지인 장님 부모에 대한 거지 딸의 극진한 효성을 말하고자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인은 굳이 자신의 생각이나 의사를 시시콜콜하게 늘어놓거나 강조하지 않는다. 그저 눈 앞에 펼쳐진 순간적인 모습을 담담하게 자신의 앵글에 담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김종삼은 현실의 객관적인 묘사, 즉 시적 리얼리즘의 놀라운 성취를 보여준다. 요설(饒舌)이 없기는 「민간인」(民間人)도 마찬가지다.
1947년 봄
심야
황해도 해주의 바다
이남과 이북의 경계선 용당포
사공은 조심조심 노를 저어가고 있었다.
울음을 터뜨린 한 영아를 삼킨 곳.
스무 몇 해나 지나서도 누구나 그 수심을 모른다.
시는 해방공간 때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씌어졌다. 좌우익의 갈등이 첨예했던 시기, 남과 북의 경계인 해주 용당포에는 은밀하게 배를 타고 월남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틈바구니 속에는 갓 태어난 핏덩이가 제 엄마 품에 안겨서 울고 있다. 핏덩이는 필시 배가 고팠거나 어디가 아팠을 것이다. 울음을 터뜨린 영아(嬰兒)의 목소리는 좀처럼 잦아들지 않는다. 자칫 군인한테 들키면 다들 목숨을 내놓아야 할 판이다. 발각될까 두려웠던 누군가가 어미의 품속에서 아이를 낚아챘을 것이다. 그리고는 냉큼 바다에 던져버렸을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아이의 울음소리는 들리지 않았고, 아이를 삼킨 바다도 깊은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핏덩이를 수장한 어미의 슬픔이 얼마나 큰 것인지, 피붙이의 죽음이 얼마나 가슴을 아프게 하는지에 대해서 언급이 없다. 다만 그는 어미의 통한(痛恨)을 바다의 수심에 견주고 있다. 즉 누구나 바다의 수심을 모르듯이 누구도 어미의 통한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김종삼은 시인일 뿐 아니라, 예술 전반에 관심이 많았던 낭만적 자유주의자였다. 그는 언제나 베레모를 쓰고 파이프를 물었다. 한평생 직장다운 직장을 가져보지 않았던 그는 자신의 시에도 그다지 애착을 느끼지 않았다. 그에게 시란 “장난 삼아 그적거리”는 어떤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와는 달리, 그는 술과 음악에는 전심전력으로 몰입했다. 특히 음악이 그랬다. 그는 바흐와 모차르트, 드뷔시와 모리스 라벨, 세자르 프랑크와 스티븐 포스터와 그들의 음악을 사랑했다. 덕지덕지한 세상에서 음악은 “종교적이라 할 만한 정화력(淨化力)”을 갖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종삼은 궁극적으로 평화주의적 휴머니스트였다. 참혹한 한국전쟁을 경험했던 그는 “하루를 살아도 온 세상이 평화롭게”, “영원토록 평화롭게” 되기를 소망했다. 나아가 그는 자신의 「내가 재벌이라면」이라는 시에서 소박한 휴머니스트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내가 재벌이라면
메마른
양로원 뜰마다
고아원 뜰마다 푸르게 하리니
참담한 나날을 사는 그 사람들을
눈물 지우는 어린 것들을
이끌어 주리니
슬기로움을 안겨 주리니
기쁨 주리니.
김종삼은 만약 자신이 재벌이 된다 하더라도 가난한 이들에게 뭉텅이 돈을 쥐어주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회의 소외된 곳(양로원과 고아원의 뜰)을 푸르게 만들어주고 싶어 했다. 그리고 참담한 나날을 살아가는 그곳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슬기로움과 기쁨을 덤뿍 안겨주고자 했다.
바람이 차다. 가난하고 외로운 사람들은 겨울나기도 두려울 게다. 시인의 사랑노래가 더욱 생각나는 요즈음이다.
김창욱
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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