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가의 이상과 현실 ⑨
부유한 가정, 꿈결같은 삶
김 창 욱(음악평론가)
맑은 눈망울, 갸름한 턱선, 부드러운 입술…
멘델스존(Felix Mendelssohn 1809-1847)은 슈베르트처럼 가난 속에 허덕일 필요도, 베토벤처럼 음악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할 이유도 없었다. 그는 음악역사상 가장 부유한 음악가였고, 그의 이름(Felix, 행운아) 만큼이나 행복한 삶을 누렸다.
‘먹고 사는’ 문제에 일체의 현실적 고민이 필요치 않았으므로 그는 오직 음악예술에 대한 절대적 순수성을 줄곧 견지할 수 있었다. 꿈결같은 삶, 동화같은 상상력, 전설적인 신비! 그것은 풍요로운 재물을 소유한, 윤택한 가문의 후예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낭만적 상상력, 고전적 형식미
19세기 멘델스존은 낭만적 상상력을 고전적 형식에 담아낸 음악가였다. 그는 환상적인 이야기를 표제적·묘사적인 서법으로 녹여냈다. 가령 「한여름밤의 꿈」이나 「핑갈의 동굴」이 그러하다. 그러면서도 그는 과거 고전적 형식미를 잃지 않았다. 요컨대 그는 이전의 음악양식을 유지·계승하는 한편, 음악의 본래적 가치를 찾으려 노력했다. 역사의 뒤안에 잠들어 있던 바흐를 재발견한 인물도 바로 그였다.
멘델스존은 독일인 가계로 함부르크의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 모제스 멘델스존은 독일의 유명한 계몽주의 철학자였고, 아버지 아브라함 멘델스존은 유능한 은행가였다. 어머니 레아 잘로몬은 유태계 은행가의 딸로서 풍부하고 수준 높은 교양을 갖춘 여성이었다. 요컨대 그의 친가와 외가 모두 뼈대 있는 집안이었다!
아브라함과 레아는 모두 4남매를 낳았다. 2남 2녀였고, 멘델스존은 둘째이자 장남이었다. 유년시절, 그는 어머니로부터 피아노를 배웠다. 이후 루드비히 베르그에게 피아노를, 쩰터에게 작곡을 각각 배웠다. 이 무렵 그는 자작 시편가를 작곡하는 등의 음악적 재능을 보였다. 9살 때 첫 공개연주회를 가졌고, 주위로부터 그의 역량이 인정되면서 연주기회도 한층 늘어났다.
소년시절, 멘델스존은 분에 겨울 정도의 문화적 풍요를 경험했다. 라이프치히 3번가에 위치한 부모의 저택은 문화와 예술이 넘실거리는 지상낙원이었다. 그곳은 시인 하이네·괴테·슐레겔, 괴테의 연인 베티나, 철학자 훔볼트·헤겔, 음악가 쇼팽 등 당대 문화계 거장들이 즐겨 찾았던 살롱문화의 아지트였다. 멘델스존은 이곳에서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을 접했고, 그것은 멘델스존이 자신의 예술세계를 구축하는데 더없이 좋은 자양분이었다.
아직 11살의 어린 멘델스존이었지만, 그는 장난감 같은 것에는 애당초 관심이 없었다. 오늘날 스마트 폰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대신에 그는 자신이 직접 작곡한 실내악이나 소편성 관현악 연주를 좋아했다. 매주 일요일이면 으레 저택에서는 살롱콘서트가 열렸다. 이때 그는 많은 습작들을 선보였다. 주위의 애정 어린 칭찬에 그는 한껏 고무되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그는 동화 속의 왕자였다. 그의 삶은 「노래의 날개 위에」의 노랫말처럼 “푸른 풀밭”이었고, “달빛이 환한 언덕”이었으며, “아름다운 꽃동산”이었다. 그의 삶은 “잔잔한 호수”였고, 도처에 “미소 짓는 연꽃들” 뿐이었다.
집안의 재산은 늘 풍족했고, 대부호였던 아버지로부터의 경제적 후원은 ‘마르지 않는 샘’이었다. 14살 때는 아버지로부터 오케스트라를 선물 받았다. 생일선물이었다. 비록 20명 안팎의 소규모 쳄버오케스트라였지만, 그것은 훗날 그가 작곡가로, 그리고 훌륭한 지휘자로 성장하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는 지휘자로서 최초로 지휘봉을 사용한 음악가로 기록되어 있다.
15살에 그는 자작 교향곡 제1번을 완성했고, 17살 때는 베를린대학에 입학, 훔볼트와 헤겔의 강의를 들었다. 그는 헤겔로부터 순수한 예술적 이상을 부여 받았다. 이 무렵 그는 세익스피어와 같은 고전에도 심취했는데, 「한여름밤의 꿈」을 만든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세익스피어의 연극 「한여름밤의 꿈」의 부수음악으로 작곡된 이것은 모두 12곡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가운데 서곡·스케르쪼·간주곡·녹턴·결혼행진곡 등 5곡이 즐겨 연주되는데, 결혼식에서 자주 듣는 ‘결혼행진곡’은 바그너의 ‘혼례의 합창’과 한 짝을 이룬다.
아름다운 꽃동산의 백마 탄 왕자
20살 때 멘델스존은 요한 세바스찬 바흐가 죽은 후 처음으로 그의 「마태수난곡」을 재현해 냈다. 고전의 정당한 평가에 인색했던 시대의 한 복판에서, 구시대의 유물로 묻힐 뻔했던 바흐를 그가 다시금 불러낸 셈이다. 그는 과감한 생략과 수정을 거쳐 「마태수난곡」을 연주했고, 그 성과는 매우 놀라운 것이었다. 바흐를 ‘가장 훌륭하게’ 연주한 독일인 음악가로서의 공로를 인정한 라이프찌히대학은 훗날 26살의 멘델스존에게 명예 박사학위를 수여했다. 그렇지만 고전에 대한 멘델스존의 남다른 관심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외할머니 사라 레비가 오랫동안 수집했던 바흐와 그의 아들들의 악보를 심도 있게 분석하고 연구한 결과였던 터였다.
23살 때는 독일 각지를 비롯해서 오스트리아·이탈리아·프랑스·영국 등지를 돌아다니며 여행을 즐겼다. 베를리오즈·리스트 등과도 교유했다. 이 무렵 착상한 것이 교향곡 제3번 「스코틀랜드」와 제4번 「이탈리아」 등이다.
이국적 풍경과 민속적 요소가 통일성 있게 표현된 「스코틀랜드」는 “잡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더 멀리 달아난다. 스코틀랜드의 안개에 싸인 것 같은 분위기를 표현하는 일은 참으로 어렵다”(멘델스존의 메모, 1831)고 토로할 만큼 13년의 오랜 숙고 끝에 만들어졌다. 이탈리아의 아름다운 풍광을 그린 「이탈리아」는 “영감이 번뜩이는 찬란한 작품”이라는 극찬을 받기도 했다.
26살의 젊은 멘델스존은 유명무실했던 라이프치히의 게반트하우스관현악단 지휘자가 되었다. 제5대 음악감독 겸 상임지휘자였다. 패기만만한 멘델스존이 지휘봉을 잡은 뒤 게반트하우스관현악단은 일약 세계 ‘최고’(最高)의 오케스트라로 명성을 얻었을 뿐 아니라, 오늘날 ‘최고’(最古)의 민간 오케스트라로도 기억되고 있다. 또한 그것은 이후 라이프치히음악원을 설립하는 기반이 되었다.
라이프치히음악원은 1842년, 그러니까 멘델스존이 33살 때 세워져 이듬해 문을 열었다. 그는 라이프치히의 부유한 법률가 하인리히 블룸너의 유언(사회기부)에 따라 거액의 유산을 음악원 설립에 쓰자는 제안을 했고, 라이프치히 시는 그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음악원은 최고의 시설에 당대 최고의 교수진을 초빙했다. 멘델스존(피아노·작곡), 슈만(피아노·작곡), 슈만의 아내 클라라(피아노) 등이 주요한 교수진이었다. 그것은 경제적으로 안정되지 않은 일이었으나, 부유한 멘델스존에게는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를 통해 수많은 음악인재를 양성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그의 존재가 빛난다.
그러나 26살이던 멘델스존에게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자신의 절대적인 후원자였던 아버지가 죽음을 맞은 것이다. 그는 엄청난 정신적 충격과 혼란에 휩싸였다. 해맑던 모습은 이내 의기소침해졌고, 시종 우울한 나날이 계속되었다. 그는 자신을 위로해 줄 아내가 필요했고, 그녀와 함께 안정된 보금자리를 꾸미고 싶었다.
신은 모든 것을 주지 않았다
28살이 되던 1837년, 그는 마침내 결혼했다. 아내는 ‘세실 사를로트 소피 장르노’였고, 그녀는 프랑스 개신교 목사의 딸이었다. 그녀는 허무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멘델스존의 구원자였다. 그녀는 빼어난 미모에 정숙하고 지혜로운 여성이었다. 더구나 그녀는 예술적 교양도 남달랐다. 그런 장르노와의 결혼은 멘델스존에게 있어서 생애 어떤 순간보다 달콤하고 행복했으며, 그의 음악과 음악활동에 있어서 더할 나위없이 긍정적이었다.
더없이 화려했던 이 시기에 작곡한 것이 바로 「바이올린 협주곡」(op. 64)이다. 그것은 독일 낭만파가 낳은 가장 빼어난 협주곡의 하나로 흔히 베토벤·브람스·차이코프스키의 그것과 더불어 세계 4대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30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그의 체력은 급격히 소진되었다. 게반트하우스관현악단 지휘자, 라이프치히음악원 교수로 분망한 나날을 보낼 뿐 아니라, 빅토리아 여왕의 알현에 이어, 잇단 영국 연주회로 말미암아 피로가 누적된 탓이었다. 설상가상, 누이의 사망소식에 그는 또 한 번의 극심한 좌절과 충격에 빠뜨려졌다. 그는 게반트하우스관현악단은 물론, 라이프치히음악원의 모든 업무를 위임하고, 독일 바덴바덴이나 스위스를 떠돌며 정양생활에 들어갔다.
신은 인간에게 모든 것을 허락하지는 않았다. 멘델스존은 명문가의 전통과 부유함을 유산으로 물려 받았고, 탁월한 음악적 재능을 선천적으로 타고 났다. 피아니스트·작곡가·지휘자로서 그는 유례를 찾기 어려울 만큼의 성공을 거두었고, 수많은 음악가의 질투와 경외의 대상이 되었다. 게다가 그는 미모와 교양을 두루 갖춘 여성을 아내로 맞았고, 그들 사이에서 난 알토란같은 5남매와 행복한 가정을 일구었다.
삶이란 한낱 꿈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꿈결같은 그의 삶은 정녕 꿈이었을까? 그는 그 모든 행복을 남겨두고 세상을 떠났다. 1847년 11월 4일, 아버지 아브라함을 여읜지 꼭 12년 뒤였다. 서른여덟, 아직 젊은 나이였다.
들으면 좋을 음악
가곡 「노래의 날개 위에」(1834)
피아노곡 「무언가」 중 ‘봄노래’(1844)
피아노 3중주곡 제2번(1845)
서곡 「핑갈의 동굴」(1846)
교향곡 제3번 「스코틀랜드」(1842)
교향곡 제4번 「이탈리아」(1833)
바이올린 협주곡(1844)
극음악 「한여름밤의 꿈」 중 ‘결혼행진곡’(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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