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부산』 2015년 8월호(통권 제122호)
음악가의 이상과 현실 ⑧
분방한 사회인에서 경건한 신앙인으로
김 창 욱
음악평론가
문화네트워크 음악풍경 기획위원장
오똑한 콧날, 길게 늘어뜨린 금발, 마치 조각과도 같은 마스크!
리스트(Franz von Liszt 1811-1886)는 매력적인 외모와 고혹적인 분위기의 소유자였다. 그는 피아노로써 풍부한 오케스트라적 화현을 재현해 냈고, 뭇 여성들은 그의 현란한 연주력에 몸을 떨었다. 부와 명예로 화려하게 장식했던 젊은 시절의 리스트는 당대 음악가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다. 수많은 염문을 뿌렸던 그는, 그러나 인생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가톨릭 사제로 종교에 귀의했다. 그는 검소하고 겸손했고 소박했다. 더구나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봉사활동에 최선을 다했다.
초인적인 힘과 고난도의 테크닉
리스트는 19세기 쇼팽과 쌍벽을 이룬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였다. 피아니스트로 하여금 초인적인 힘과 고난도의 테크닉을 요구하는 그의 피아노 음악은 궁극적으로 독주악기의 표현 가능성을 극대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피아노를 위한 혁신적인 작곡기법을 개발했고, 오늘날 보편화된 ‘피아노 독주회’를 최초로 만들어 냈다.
또한 리스트는 교향시(symphonic poem)를 창안했다. 그것은 다악장의 절대음악인 교향곡(symphony)과 달리, 단악장의 표제음악이다. 즉 음악외적(문학적·회화적·철학적) 요소를 음악 속에 적극 끌어들인 관현악곡이다. 그가 쓴 교향시로는 「전주곡」이 있다. 죽음에 대한 전주곡이라는 의미에서 흔히 철학적 교향시로 이야기되고 있다.
더구나 그는 편곡(arrangement)의 귀재이기도 했다. 그가 남긴 800여 편 가운데 무려 절반이 넘는 400여 편이 여러 작곡가의 음악이 피아노용으로 편곡된 것이다. 베토벤의 교향곡 전곡, 슈베르트의 「방랑자 환상곡」, 슈만의 「헌정」, 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협주곡」 제2번 3악장은 피아노 연습곡 「라 캄파넬라」로 재구성되었다. 피아노가 보편화되면서 그의 편곡음악에 대한 대중적 수요가 갈수록 늘자, 더불어 그의 악보인세 수입도 크게 늘어났다.
리스트는 헝가리 라이딩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 게오르크 아담은 권력가였다. 그는 3번이나 결혼을 했고, 모두 27명의 자식을 생산했다. 권력이 있으면, 재력은 자동적으로 따라온다. 아버지 아담은 에스테르하찌 궁정의 토지관리인이자 후작이 운영하는 악단의 단원이기도 했다. 그는 마리아 안나와 눈이 맞아 결혼했는데, 리스트는 외아들이었다.
리스트는 6살 때부터 피아노 교습을 시작했다. 8살 때는 아버지가 일하는 에스테르하찌 궁정에서 피아노 연주를 선보였는데, 귀족들을 모두 깜짝 놀라게 했다. 그의 빼어난 연주력은 이후 쇼프론·프레스부르크 등지에서의 독주회에서도 빛을 발했다. 신문은 연일 그의 음악적 역량을 대서특필했고, 그의 연주에 감동한 귀족들이 6년 동안 연 600구르텐의 장학금을 후원했다.
피아노 교본 저작자로 잘 알려진 체르니도 가만 있지 않았다. 그는 리스트에게 공짜로 피아노 레슨을 해주는가 하면, 일정 정도의 생활비 제공도 마다하지 않았다. 나아가 그는 리스트를 비엔나 음악계에 데뷔시켜 주는데도 크게 기여했다.
10대가 된 리스트는 모차르트 제자였던 후멜의 협주곡과 즉흥연주에서도 발군의 실력을 발휘했다. 연주를 지켜 본 베토벤은 그의 이마에 입맞춤을 해 주었다. 리스트가 12살이 되자, 그의 아버지는 22년 동안이나 일했던 에스테르하찌 궁정을 그만두고 아예 아들의 매니저로 따라 나섰다.
아버지와 아들은 독일의 뮌헨·아우구스부르크·슈투트가르트·스트라스부르크 등지를 순례하며 연주회를 열었다. 가는 곳마다 리스트를 환영하는 인파가 넘쳐났고, 그는 ‘모차르트의 부활’이라는 극찬을 받았다. 어느새 리스트는 음악적 영웅으로 우뚝 섰고, 그를 따르는 수많은 여성팬들의 연인이 되어 있었다. 내친 김에, 그들은 영국·프랑스·스위스 등 유럽의 여러 나라를 쉴새없이 넘나들었다.
강행군 탓이었을까? 리스트가 16살이 되는 해, 아버지 아담이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이후 3년은 리스트에게 고난의 시기였다. 이가 없으니 잇몸이 시린 짝이었다. 아버지는 죽으면서 아들에게 유언을 남겼다. 재산상속에 관한 것이 아니라 “여자를 조심하라!”는 것이었다. 숱한 여성과의 무절제한 생활태도를 염려한 터였다.
“여자를 조심하라!”
그러나 리스트는 아버지의 유언을 귓등으로 흘려 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프랑스 고관 생에리크의 딸인 카롤리느의 피아노 선생으로 들어갔는데, 둘은 순식간에 연인 관계로 발전했다. 생에리크의 완강한 반대가 아니었더라면, 리스트는 아버지의 유언을 따를 수 없었을 것이다. 카롤리느와 헤어진 그는 문학과 종교서적을 탐닉했다. 그것은 훗날 그가 교향시를 창안하고, 가톨릭 신부가 된 일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카롤리느와의 이별의 슬픔도 잠시, 리스트는 아직 팔팔한 20대였다. 그는 여전히 많은 여성들 사이에 파묻혀 지냈다. 자신이 원하든 그렇지 않든, 그의 초인적인 피아노 연주는 수많은 여성을 실신케 했다. 무대 위에는 꽃다발이 던져졌고, 그 속에는 때때로 값비싼 보석도 없지 않았다. 연주가 끝나면 객석은 으레 환호와 비명으로 뒤범벅되었고, 무대는 물고기처럼 뛰어오른 여성들로 아수라장이 되기 일쑤였다. 그녀들은 리스트의 장갑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서 몸싸움을 벌였고, 심지어 리스트가 버린 담배꽁초를 죽을 때까지 간직한 여성도 있었다 한다.
리스트를 따랐던 여성들 가운데 유독 그가 마음을 품었던 여성은 2명이었다. 바로 다구백작 부인과 비트겐슈타인 후작의 부인이었다. 둘다 유부녀였다.
다구 부인은 파리에서 꽤나 이름 높은 교양인으로 재능과 미모를 골고루 겸비한 여성이었다. 후멜로부터 피아노를 배운 적도 있었다. 아들 하나를 둔 그녀는 24살의 젊은 리스트를 만나자마자 순식간에 눈 멀고 귀 먹었다. 젊고 매력적인 리스트에게 송두리째 정신을 빼앗긴 그녀는 곧장 남편을 버리고, 리스트와 함께 제네바로 건너갔다. 둘 사이에서 두 딸이 태어났다. 둘째 딸 이름은 코지마였다. 그녀는 훗날 바그너의 후처가 되었다. 뒤이어, 아들 다니엘도 낳았다. 그러나 자식이 늘어나는 만큼 둘 사이의 불화도 깊어졌고, 그것은 리스트의 창작생활에 적잖은 장애가 되었다. 34살이 된 리스트는 마침내 10년 간의 다구 부인과의 동거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30대 중반이 되었어도 리스트의 매력은 여전했다. 그에게 다시 한 여성이 나타났다. 비트겐슈타인 후작의 부인 카롤리네였다. 36살의 리스트, 카롤리네는 마리라는 외동딸을 둔 28살의 어여쁜 유부녀였다. 문학·철학·종교서적에 탐닉한 인텔리였지만, 남편과는 일찌감치 별거 중이었다.
리스트는 러시아 키에프 자선연주회 때 그녀로부터 100루블의 의연금을 받았다. 그는 이에 대한 감사편지를 그녀에게 보냈고, 그녀와 두 차례의 만남 끝에 비로소 사랑의 불길이 전신으로 타올랐다. 주위의 비난에도 아랑곳 않고 카롤리네는 급기야 남편과의 이혼소송을 냈다. 이혼절차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지만, 그들은 더 이상 떨어져 지낼 수 없었다. 마침내 둘은 황급히 바이마르로 도피, 14년 동안의 행복한 동거생활에 들어갔다. 이 무렵 그는 유명한 「콘솔레이션」(위로) 제3번을 썼다.
이 시기 리스트는 자신의 작품마다 “모든 것을 던지고 내게 진실과 사랑과 희망과 행복을 안겨준 카롤리네에게”라는 헌사를 붙였다. 그들은 결혼식 날짜를 잡았지만, 친인척의 완강한 반대로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카롤리네는 “모든 것이 신의 뜻”이라 체념하고 리스트와 결별을 선언했다. 그리고 홀연히 로마 가톨릭교회의 수녀로 들어갔다. 교회를 기웃거리던 리스트도 56살에 그녀의 뒤를 따라 가톨릭에 귀의했다. 75살의 리스트가 세상을 뜨자, 그녀는 7개월 후 그를 따라 먼길을 떠났다.
청빈하고 검소한 메피스토펠레스
리스트는 신부가 되기 훨씬 이전부터 재능기부에 열을 올렸다. 그는 함부르크 대화재, 부다페스트 대홍수 때 구호기금 마련 연주회를 잇따라 열었고, 수익금 전액을 기부했다. 부다페스트에서는 모두 9차례의 피아노 독주회를 열었는데, 연일 대만원을 기록했다.
그의 연주회에는 베를린의 빌헬름 황제도 빠짐없이 참석했고, 리스트를 한 번만이라도 보려는 시민들이 장사진을 이루었다. 부다페스트시는 그를 명예시민으로 추대했고, 이를 축하하는 행사에는 수 천명의 인파가 횃불행진을 벌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리스트는 뛰어난 재능에도 불구하고 경제적 여유가 허락되지 않았던 수 천명의 청년음악가들을 제자로 거둬 무료로 피아노를 가르쳤다.
반면에, 그는 질이 떨어지는 커피와 값싼 술을 마셨고, 싸구려 시가를 피웠다. 열차를 탈 때도 한결같이 2등석이나 3등석을 탔다. 청빈하고 검소한 리스트의 일관된 사제생활에도 불구하고, 그를 비난하는 무리가 적지 않았다. 특히 그는 브람스파의 집중적인 표적이 되었다. 그들은 리스트를 “사제의 옷을 뒤집어 쓴 메피스토펠레스”라며 비아냥댔다. 리스트의 현란하고 악마적인 연주력, 청중을 압도하는 초절정 테크닉 따위가 자신들이 지지했던 브람스의 보수적 음악과 현저히 달랐던 터였다.
리스트는 독일 바이로이트에서 객사하고 그곳에 묻혔다. 급성폐렴이었다. 만년에 살았던 바이마르의 집은 리스트박물관으로 리모델링되었다.
들으면 좋을 음악
「헝가리 랩소디」(Hungarian Rhapsody) 제2번
「녹턴」(Nocturne) 제3번 ‘사랑의 꿈’
「연습곡: 라 캄파넬라」(La Campanella)
「피아노 협주곡」 제1번
「콘솔레이션」(Consolation) 제3번
「메피스토 왈츠」(Mephisto Walz) 제1번
「교향시」 제3번 ‘전주곡’(Les Prelud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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