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문화

쇼팽을 아시나요?

浩溪 金昌旭 2015. 7. 1. 13:06

 

『예술부산』 2015년 7호(통권 제121호) 

 

 

음악가의 이상과 현실

 

파리 상류사회의 피아니스트

     


김 창 욱

음악평론가

 


쇼팽(Frederic Francois Chopin 1810-1849)은 본디 허약한 체질로 태어났다. 반평생 폐결핵을 앓았다. 게다가 순진하고 마음이 여렸던 그는 자신의 속내를 주위에 노출시키는 법이 없었다. 그는 늘 고독하고 우울했다. 순수하고 높은 이상을 열망했으나, 그는 언제나 무기력했다. 더구나 잇단 실연은 그로 하여금 깊은 좌절과 절망의 수렁 속으로 깊이 빠뜨렸다. 그럼에도 그의 음악은 화려하고 현란하다. 더구나 섬세한 감정표현에, 풍부한 음향과 다양한 음색도 두드러진다. 19세기 파리 상류층의 살롱문화를 반영했기 때문이다

 

 

피아노의 표현 가능성 극대화시켜

 

19세기 낭만시대를 대표하는 피아노 음악가로 제일 먼저 쇼팽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이 시기 리스트와 더불어 피아노 음악의 견인차 역할을 했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였다.

 

그는 연습곡·춤곡·녹턴·즉흥곡·판타지·발라드와 같은 피아노 성격소품(性格小品, character piece)을 즐겨 썼고, 거기에는 레가토(legato, 음과 음 사이가 끊어지지 않도록 부드럽게 이어서 연주하는 기법)나 템포 루바토(Tempo rubato, 리듬에 적절한 융통성을 허용하는 기법)가 많이 쓰였다. 더구나 그의 피아노 음악은 완벽한 텃치는 물론, 피아니스틱한 효과를 극대화시키려 한 흔적이 두드러진다.

 

쇼팽은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니콜라스 쇼팽은 프랑스 사람으로 폴란드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치는 교사였고, 어머니 유스티나 크지자노프스카는 폴란드의 몰락한 귀족가문 출신이었다. 이들은 모두 13녀의 자식을 생산했는데, 루드비카·프레데리크·이자벨라·에밀리아가 그들이다. 쇼팽은 둘째였다.

 

아버지 니콜라스는 프랑스 랑시 출신으로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폴란드에 정착했다. 바르샤바의 담배공장 경리로 취직했으나, 폴란드 분할로 공장이 폐쇄되는 바람에 실직자가 되었고, 이후 스카르벡 백작 집안의 가정교사를 지내다가 신설학교 프랑스어 교사로 들어갔다. 그는 폴란드 재건을 위해 코시우코스가 이끄는 혁명군에 가담해서 대위 계급장을 달기도 했다. 그러나 혁명은 실패로 돌아가고 러시아의 압박으로 혁명군은 해체되고 말았다.

 

쇼팽은 4살 때 피아노 초보교습, 6살 때 정식으로 피아노 교습을 받았다. 노래와 피아노를 좋아했던 어머니에 있어서 자식의 피아노 공부는 필수였다. 쇼팽은 일찍부터 음악실력을 발휘했다. 8살 때 바르샤바에서 첫 연주회를 가졌는데, 폴란드 귀족들로부터 '2의 모차르트'라는 극찬을 받았다.

 

12살 때는 바르샤바음악원 원장이었던 엘스너에게 화성학과 대위법을 배웠다. 그는 쇼팽으로 하여금 피아노 레슨을 일절 받지 않게 하고, 오직 작곡에 전념케 했다. 복잡한 규칙에 얽매이게 되면, 쇼팽의 창의력과 독창성을 잃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14살 때 중학교에 진행해서도 그는 오직 음악에만 집중했다. 여러 편의 오페라는 물론, 파가니니·후멜 등의 수준 높은 연주를 구경하러 다녔다. 처녀곡 론도를 비롯해서 다량의 피아노곡을 작곡하고 변주곡집을 출판하기도 했다.

 

19살 때는 콘스탄치아 글라노코프스카와 잠시 첫 사랑에 빠지기도 했으나, 이내 헤어지고 말았다. 소심하고 내성적인 그의 성격 탓이었다. 그는 충격과 슬픔을 애써 뒤로하고 폴란드를 떠났다. 하모베(하이든·모차르트·베토벤)가 주름 잡았던 비엔나는 일찍이 그가 꿈꾸어 왔던 음악의 도시였다

 

 

창백한 예술가, 명성에도 수입은 적어

 

그러나 비엔나는 쇼팽을 반겨주지 않았다. 오히려 오스트리아는 정치적으로 폴란드와 폴란드인에게 적대적이었다. 바르샤바에서 폴란드의 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적국 러시아는 이를 무력으로 제압했고,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독일)은 그같은 러시아의 입장에 동조하고 있었다.

 

바르샤바가 러시아군에게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21살의 청년 쇼팽은 다시 짐을 쌌다. 비엔나를 떠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때 그는 비통하고 참담한 심경을 피아노 연습곡 혁명을 통해 과감하게 드러냈다. 질풍노도와 같은 연속적 패시지는 당시 쇼팽의 격동과 격정을 동시에 보여준다.

 

그는 파리로 건너갔다. 파리는 폴란드인에게 호의적인 도시였다. 정치적으로도 프랑스는 오스트리아·러시아와 대립적이었다. 더구나 파리는 세계에서 가장 자유로운 도시였다. 프랑스 혁명의 영향으로 사상적 자유가 허용되었고, 지식인·문화예술인들의 집회장소로 안성맞춤이었다.

 

파리에서의 쇼팽의 데뷔연주회는 가히 성공적이었다. 음악이론가 페티스(F. J. Fetis 1784-1871)는 "그의 선율에는 영혼이 있다. 그의 피규레이션(음형의 활용)에는 현란함이 있고, 온갖 것에 독창성이 있다. 또한 그의 연주는 우아하며 화려하기까지 하다"고 평가했고, 음악에서 우러나오는 환희감, 품위 있고 세련된 연주력, 화려하고 우아한 몸짓은 파리 상류층을 감동시켰다. 그것은 쇼팽의 수입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수많은 상류층 자녀들이 그에게 피아노 레슨을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쇼팽의 형편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커져가는 명성에도 수입이 적었던 셈이다. 무엇보다 그는 청중을 압도하는 연주자가 아니었다. 야성적이고 초인적인 타력을 과시했던 리스트와는 달리, 그는 작은 무대에서의 부드럽고 섬세한 살롱콘서트를 선호했고, 그것은 돈이 되는 연주회가 아니었다. 연주자로서 수익을 얻은 연주회는 겨우 3건에 불과했다.

 

그는 슈베르트와 마찬가지로 돈에 흥미가 없을 뿐더러, 돈 계산에 신경 쓰는 일도 싫어했다. 자신의 모든 창작음악에 대한 저작권료는 17천 프랑, 700시간의 레슨시간에 비해 레슨비는 14천 프랑에 지나지 않았다. 더구나 파리에 콜레라가 발병하면서 레슨 제자들의 발길도 뚝 끊어졌다.

 

쇼팽은 수입에 비해 지출이 많았다. 14천 프랑의 수입 가운데 아파트 전세값 연 1275프랑, 하인급료 연 840프랑, 마차 임대료 연 56천 프랑이 나갔다. 그 밖에 가난한 친지들에게 과도한 부조금을 제공했고, 돈이 생기는대로 지인들에게 선물이나 팁을 주었다. 쇼팽의 인품에 대한 주위의 잇단 상찬에도 불구하고, 정작 당사자는 가난에 허덕일 수밖에 없었다

 

 

연상의 여인, 조르주 상드

 

쇼팽의 연인은 여럿 있었다. 10대 때 만났던 헤어진 글라도코프스카(바르샤바 음악원에서 성악을 공부했다) 외에도 마리아 보젠스카와 조르주 상드가 있다.

 

보젠스카는 어릴 적 여자친구로 25살 때 연인으로 다시 만났다. 쇼팽은 그녀로부터 결혼승낙까지 받았으나, 집안의 극심한 반대에 부딪혔다. 사랑하는 딸을 결핵환자에게 맡기지 못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절망했고, 무능하고 무력한 자신을 재삼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쇼팽은 25살에 파리의 유명한 여성작가인 조르주 상드를 만났다. 리스트의 주선에 의한 것이었다. 그녀는 쇼팽보다 6살이나 나이가 많았고, 16살 때 카지미르 뒤드방 남작과 결혼해서 아들 모리스와 딸 솔랑즈를 둔 어머니이기도 했다. 자유분방한 연애론자이자 여권신장·여성해방론자였던 그녀는 지방공무원·언론인·문인·이웃남자 등과 잇따라 동거했다. 나이도, 직업도 가림이 없었다.

 

결국 그녀는 남편과 이혼했고, 오로르 뒤팽이라는 본명도 버렸다. 조르주 상드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소설을 쓴 최초의 여성작가였다. 그녀는 "말처럼 일하고 고양이처럼 밤을 새우는 삶"을 살았다. 일찍이 귀족적 생활을 버리고 적극적으로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돈과 시간이 드는 치장을 않기 위해서 남장(男裝)도 마다하지 않았다.

 

상드는 쇼팽의 즉흥연주를 사랑했다. 쇼팽의 연주는 그녀의 마음을 한 순간에 앗아갔다. 쇼팽과 상드는 음악과 언어의 결합을 통해 이상적 아름다움을 모색한 예술적 동반자였다. 또한 결핵을 앓는 환자와 환자를 모성애로 극진하게 보살핀 간병인의 관계이기도 했다. 그런 이유로, 쇼팽의 피아노 명곡이 이 시기에 가장 많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이들의 연애는 10년을 넘어서지 못했다. 36살의 쇼팽과 42살의 상드, 9년 간에 걸친 동거생활이 마침내 파국을 맞았다. 상드의 아이들 문제는 언제나 이들 사이에 갈등을 일으켰고, 갈등이 격화되자 이들은 냉정히 갈라섰다. "나는 이전에 어떤 사람도 저주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상드, 그 여자를 저주한다." 쇼팽의 고별사였다.

 

실연에 따른 좌절과 절망은 그를 죽음의 늪으로 급격히 빠뜨렸다. 정신적·육체적 건강은 이미 회복 불능상태가 되었고, 일체의 작곡·연주활동도 불가능했다. 다행히 이 시기 주위의 후의도 없지 않았다. 제인 스털링이란 여성이었다. 그녀는 쇼팽의 피아노 제자이자 6살 연상으로 수려한 미모의 소유자였다. 더구나 그녀는 막대한 재력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그녀는 쇼팽을 위해 에든버러의 호화주택을 아낌없이 제공했고, 거금 25천 프랑의 후원금도 제공했다. 쇼팽은 고마웠지만, 그다지 달갑지 않았다. 아니, 귀찮았다.

 

19491017, 쇼팽은 39살의 나이로 파리에서 죽음을 맞았다. 폐결핵과 후두결핵이 사인(死因)이었다. 모차르트의 레퀴엠으로 장례식이 치러졌고, 그는 펠 라세즈 묘지에 묻혔다. 이후 폴란드로 이송, 바르샤바 성 십자가교회에 안치되었다. 오랫동안 이국을 떠돌던 쇼팽이 2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셈이다

 

 

들으면 좋을 음악

 

즉흥환상곡(Fantaisie Impromptu, op. 66)

발라드(Ballade) 1(op. 23)

왈츠(Waltz) 2(op. 64)

녹턴(Nocturne) 1(op. 9)

연습곡(Etude) 12번 '혁명'(op. 9)

연습곡(Etude) 3번 '이별의 곡'(op. 10)

프렐류드(Prelude) 15번 '빗방울 전주곡'(op. 28)

안단테 스티아나토와 화려한 대 폴로네이즈(op. 22)

피아노협주곡1(op.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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