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부산』 2015년 10월호(통권 제124호)
음악가의 이상과 현실 ⑩
이탈리아가 낳은 오페라 스타
김 창 욱
음악평론가
문화네트워크 음악풍경 기획위원장
19세기 이탈리아 최고의 오페라 작곡가인 베르디는 여인숙을 운영하는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젊은 시절, 그는 매우 성실하고 노력하는 음악가였지만 결코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게다가 이 무렵 사랑하는 자신의 두 혈육과 스물일곱의 꽃다운 아내마저 잃고 말았다. 자살까지 결심했던 그는, 그러나 이를 악물고 오페라에 매달렸다. 잇단 오페라의 성공에 따라 그의 작곡료는 천정부지로 치솟았고, 철저하게 저작권을 지킨 그는 초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전형적인 직업음악가의 모델이 되었다.
“가난한 하층민”
낭만시기, 베르디(Giuseppe di Verdi 1813-1901)는 동갑나기 바그너와 쌍벽을 이룬 오페라 작곡가였다. 27편의 오페라를 작곡했고, 그 가운데 「리골레토」·「라 트라비아타」·「일 토레바토레」·「아이다」 등은 그가 남긴 4대 걸작이자 ‘불후의 명작’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는 롯시니·도니젯티·벨리니에 이어, 또 하나의 이탈리아 오페라의 기수를 자임했다. 더욱이 그는 이탈리아의 철저한 애국주의자였다. 당시 독일·프랑스에 널리 퍼졌던 낭만주의 운동에 반기를 든 그는 선율(아리아) 중심의 이탈리아적 호모포니(화성음악)를 지키고자 노력했다. 특히 오페라는 종합예술이다. 독창·중창·합창에서 독주·중주·오케스트라에 이르기까지 음악의 총체와 더불어 연극(의상·소품·무대장치·연기)과 무용을 포괄한 복합장르다. 그것은 오페라 작곡이 이 모두를 충분히 고려해야 할 만큼 어렵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베르디는 이탈리아 파르마의 작은 농촌마을(레론콜레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카를로 주세페는 여인숙 겸 식료품 가게를 운영했고, 베르디는 카를로의 장남이었다. 변변치 못한 생업으로 베르디는 스스로 “가난한 하층민”이라 썼다.
그는 농민의 소박한 기질이 있었고, 아버지의 여인숙을 거쳐 간 떠돌이 악사와 그들의 음악에 관심이 많았다. 특히 인근의 미카엘교회에서 들려오는 오르간 소리는 소년 베르디의 마음을 온통 휘저어 놓았다. 마침내 7살이 되면서 교회의 음악가 피에트로에게 음악기초를 배우게 되었다. 베르디의 비상한 음악적 능력은 이내 빛을 발했다.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피에트로가 더 이상 가르칠 게 없다고 선언할 정도였으니까.
10살 때 베르디는 부세토에서 하숙을 하며 그곳 교회의 오르가니스트로 활동했다. 여기서 그는 부유한 상인이자 아마추어 음악가였던 안토니오 바레치를 운명처럼 만났다. 바레치는 플루트·클라리넷을 곧잘 불었고, 부세토필하모닉협회를 만들어 협회장을 맡기도 했다. 그는 베르디를 자기 집으로 불러 음악공부를 시켰다. 밀라노의 유명한 오페라 작곡가였던 빈센초 라비니아를 스승으로 붙여주었다. 물론 레슨비는 그가 전액 지원했다.
그러나 그에게 곡절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18살 때 밀라노의 음악원에 입학하려 했으나 나이가 많아 낙방거사가 되었고, 26살 때는 최초의 오페라 「산 보니파치오의 오베르토」를 작곡, 스칼라극장에서 발표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더구나 23살 때는 마리게리타(후원자 바레치의 딸로서 2살 연하)와 결혼했으나, 불행의 연속이었다. 26살 때 큰 아이, 28살 때는 작은 아이가 병으로 죽었다. 급기야 29살 때는 사랑하는 아내 마리게리타마저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는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고, 게다가 경제적으로도 궁핍했다. 23살 때 바레치가 만든 부세토필하모닉협회의 음악감독이 되었다. 여기서 그는 성악·기악·작곡을 가르치고, 필하모닉오케스트라의 지휘도 맡았다. 그렇지만 연봉은 고작 567리라에 불과했고, 그것은 겨우 하루하루 먹고 사는 생계비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르디의 음악에 대한 정념과 의지는 매우 굳건한 것이었다. 법(法)의 그물이 성긴 듯해도 실은 물샐 틈없이 촘촘하다고 했던가! 세상은 그런 그를 끝내 외면하지 않았다. 30살 때 그가 쓴 「나부코」가 밀라노 라 스칼라극장에서 초연되었고, 여기서 그는 전무후무한 대성공을 거두었다. 오페라 작곡가로서 마침내 토대를 마련한 셈이었다.
철두철미한 저작권자
작품료도 하루가 다르게 높아져 갔다. 이탈리아 최대의 음악출판사였던 리코르디는 30살 때 「나부코」의 작품료 4,000리라를 베르디에게 지불했다. 그러던 것이 이듬해 31살 때는 「십자군 롬바르디아인」과 「에르나니」에 각각 12,000리라를 지불했다. 35살 때에 이르러서 「군도」(떼도둑)는 무려 20,000리라로 수직 상승했다.
이 시기 베르디는 리코르디와 장기계약을 맺었다. 오페라 공연 때마다 자신의 작품은 본인이 직접 편곡을 맡아야 하고, 이에 대한 편곡료를 12,000리라로 책정했다. 그리고 오페라 초연 때는 4,000리라의 작품료를 내야 하고, 2년 동안 공연 때마다 200리라, 그 다음 3년 동안 300리라, 그 다음 5년 동안은 200리라, 그리고 초연 10년 뒤에는 모든 작품의 권리를 리코르디에게 귀속시키는 것이었다.
더구나 베르디는 그동안 작곡가들 위에 군림하던 극장의 횡포에 맞서 대부분의 이탈리아 극장주들과 협약을 체결했다. 즉 그의 작품은 저작권자의 허락없이 공연할 수 없다는 것과 작곡자의 허락없이 악기편성을 임의로 바꿀 수 없다는 것이었다. 만약 이를 위반할 경우 1,000프랑의 벌금을 물도록 명시했다. 그것은 작곡가 스스로 저작권을 지키는 동시에, 당시 저작자로서의 작곡자 위상을 높이고자 했기 때문이다. 요컨대 베르디는 음악출판사와 오페라극장을 좌지우지할 수 있을 정도의 지위를 획득했다!
그것은 베르디가 이후 38살 때 「리골레토」(1851), 40살 때 「라 트라비아타」와 「일 트로바토레」(1853), 58살 때 「아이다」(1871)과 같이 세기의 걸작들을 잇따라 낳은 음악가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의 오페라는 한결같이 드라마틱한 죽음으로 갈무리된다. 「리골레토」에서는 곱추인 리골레토가 자신의 딸을 농락한 만토바 공작을 죽이려다가 오히려 딸(질다)을 죽이고 만다. 「라 트라비아타」에서는 고급 창녀(娼女) 비올레타와 귀족가문 출신의 청년 알프레도의 사랑을 그리고 있지만, 비올레타가 폐병으로 죽음으로써 막이 내린다. 또한 「일 토레바토레」는 아우인지 모르고 그를 죽인 형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며, 「아이다」는 라다메스 장군과 패전으로 노예가 된 아이다와의 사랑이 핵심내용이다. 그러나 둘은 암네리스 공주의 질투로 성벽 속에 갇혀 죽는다.
일찍이 아내 마리게리타를 잃은 베르디는 새로운 연인을 얻었다. 39살에 만난 주세피나 스트레포니였다. 그녀는 그의 제자이자 당시 유럽 일대를 휩쓸었던, 오페라계의 빼어난 프리마 돈나(prima donna, 오페라의 여주인공)였다. 46살에 새 장가를 든 베르디는 이후의 삶도 언제나 승승장구였다.
그는 「운명의 힘」의 러시아 공연허가를 내주는 조건으로 60,000프랑을 벌었고, 「아이다」의 이집트 내 공연허가를 내주면서 150,000프랑을 벌어들였다. 여기에 영국 왕실 음악감독직을 맡으면서 연봉 90,000프랑을 받았다. 오페라 1편 작곡에 대한 작품료 6만 프랑과 지휘료 3만 프랑이 합쳐친 것이었다. 연간 6개월만 영국에서 체재하는 조건이었다.
농부의 배상 청구서 받아
그러나 그는 고향 이탈리아에서만큼은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했다. 편당 저작료가 20,000프랑에 지나지 않았다. 어느 농부와 관련된 에피소드 역시 그러한 사례로 보여진다. 「아이다」 초연 무렵이었다.
어느날, 베르디는 가난한 농부가 보낸 청구서를 받았다. 편지에서 농부는 만사를 제쳐두고 2번 씩이나 「아이다」를 봤지만,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고 썼다. 그래서 농부는 「아이다」를 보기 위해 소요된 기차요금 5.9리라, 입장료 8리라, 식비 2리라 등 회당 15.9리라의 배상금을 청구했다. 이에 베르디는 즉시 출판업자로 하여금 다시는 자신의 오페라 공연을 보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원하는 액수대로 배상해 주도록 했다. 관객의 권리를 인정하는 한편, 작곡자의 음악적 자존심을 지켜낸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르디는 조국 이탈리아를 결코 잊지 않았다. 애국자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베르디는 이탈리아 민족주의의 상징적 인물이었다. 오스트리아의 지배에 항거하는 운동이 일어났을 때 그의 몇몇 합창곡들이 저항음악으로서 기능했고, 이들은 순식간에 민중 속으로 옮아붙었다. 이른바 ‘비바 베르디!’(Viva Verdi, 베르디 만세!)는 베르디와 이탈리아를 동일시하는 구호였다. 이후 베르디는 민중의 지지로 조국의 국회의원이 되었다.
아무리 지위와 명성이 높다한들 죽음 앞에서는 누구나 무력하다. 베르디라해서 다를 수 없다. 그는 1901년, 88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후처 스트레포니가 죽고 4년 뒤였다. 베르디가 남긴 유산은 총 705만 리라, 엄청난 거액이었다. 유언에 따라 그의 재산은 일부 친척과 하인에게 상속되었으나, 대부분의 재산은 자선단체·병원·장학재단에 기부했다. 또한 저작권 수익은 전액 밀라노의 ‘음악가 휴식의 집’에 기부했다. 그의 장례식에는 수천 명의 인파가 모여들어 그를 추모했다. 세상에 빛을 던져준 덕이었다.
들으면 좋을 음악
「나부코」 중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
「리골레토」 중 ‘이것도 저것도’(만토바의 아리아)
「리골레토」 중 ‘여자의 마음’(만토바의 아리아)
「라 트라비아타」 중 ‘축배의 노래’(알프레도와 비올레타의 2중창)
「라 트라비아타」 중 ‘이꽃에서 저꽃으로’(비올레타의 아리아)
「라 트라비아타」 중 ‘프로벤자 내고향으로’(제르몽의 아리아)
「일 토레바토레」 중 ‘대장간의 합창’
「일 토레바토레」 중 ‘저 타오르는 불꽃을 보라’(만리코의 아리아)
「아이다」 중 ‘정결한 아이다’(라다메스의 아리아)
「아이다」 중 ‘개선행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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