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부산』 2015년 11월호(통권 제125호)
음악가의 이상과 현실 ⑪
오페라 혁명가, 그러나 타고난 바람둥이
김 창 욱
음악평론가
문화네트워크 음악풍경 기획위원장
바그너는 생계와 음악을 위해 일찍이 돈벌이에 나서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자신의 예술적 재능을 과신했고, 대중적 인기에 연연하지 않을 만큼 오만했다. 점차 작곡가로서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그는 적지 않은 수입을 올렸다. 그렇지만 그의 타고난 허영심과 낭비벽은 평생동안 그를 빚더미에 올려놓았다. 그럼에도 그는 수많은 여성들을 거느렸다. 불행하게도 그에게 여성이란, 자신의 성적 욕망을 충족시키는 도구이자, 돈벌이에 이용할 수 있는 수단에 불과했다.
게르만 신화의 부활
낭만시기, 바그너(Richard Wagner 1813-1883)는 동갑나기 베르디와 쌍벽을 이룬 오페라 작곡가였다. 그는 13편의 오페라를 작곡했다. 이들은 한결같이 거대한 규모에 장대하고 웅장한 오케스트레이션에 의한 것이었다.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탄호이저」, 「로엔그린」, 「니벨룽겐의 반지」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 가운데 「니벨룽겐의 반지」는 ‘라인의 황금’, ‘발퀴레’, ‘지그프리드’, ‘신들의 황혼’과 같이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다. 작곡가가 직접 대본을 쓴 이것은 창작기간이 무려 26년이나 소요될 만큼의 대작이다. 연주시간은 약 16시간이다.
여기에 나오는 ‘발퀴레’는 라인강에서 전해 오는 전설 상의 여신이다. 언제나 날개가 달린 백마를 타고 용감무쌍하게 적진에 돌진하는데, 가는 곳마다 승리를 거둠으로써 게르만 민족의 의기를 북돋운다. 특히 여기서는 일정한 리듬이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발퀴레의 출정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베트남전을 다룬 영화 「지옥의 묵시록」(1979)에도 나온다.
주로 게르만 민족의 전설이나 신화를 토대로 만든 그의 오페라는 기존의 이탈리아 오페라와 차별화를 위해 ‘음악극’(Musikdrama)이라는 새로운 음악장르를 창안했다. 곧 그것은 성악중심의 이탈리아식 오페라에 반발, 음악·연극·무용의 동등한 결합을 꾀한 것이었다.
바그너는 독일 라이프찌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루드비히는 경찰서 서기였고, 어머니 요한나는 빵집 딸이었다. 그다지 대단한 집안이 아니었던 셈이다. 그는 9번째 아들이었는데, 생후 6개월 만에 아버지가 죽고 말았다. 어머니는 곧장 드레스덴으로 이주하고 배우 루드비히 가이어와 재혼했다. 바그너의 어려운 유·소년기를 예견하기 어렵지 않다.
그는 9살 때 피아노 교습을 시작했으나, 까다로운 운지법에 이내 싫증을 느꼈다. 그래서 11살 때는 그리스 문학이나 세익스피어의 희곡에 열중했다. 라이프찌히로 이주한 그는 베토벤 음악에 감동을 받아 음악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18살 때는 라이프찌히대학에서 음악과 철학을 청강했는데, 이 무렵 성 토마스교회 합창장이었던 테오도르 바인리히에게서 대위법을 배웠다.
그 결과, 20살 때는 뷔르츠부르크합창단의 지휘자가 되었고 이듬해에는 라우프슈타트 베토만극장의 지휘자가 되었다. 이때 미모의 여배우 민나 플라너와 연애를 시작했다. 그녀는 25살(4살 연상)의 처녀로 이름이 꽤나 높았다. 23살 때 자작대본에 의한 「연애금제」(戀愛禁制)라는 작품을 무대에 올렸으나, 처절한 실패를 맛보았다. 그가 짝사랑한 플라너가 쾨니히베르크 가극장으로 옮기자 그도 자리를 옮겨갔다. 그곳에서 극적인 결혼에 성공한 바그너는, 그러나 가난과 불행의 연속이었다. 그는 아내가 된 플라너에게 가까운 친척과 지인들을 통한 생계비 구걸에 나서기를 강요했고, 그녀는 결혼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가출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지만 바그너는 언제나처럼 “나의 위대한 명성을 얻기 위해 가난의 고통은 당연하다”고 말했다.
25살에 실직한 바그너는 결국 빚더미에 올랐다. 빚쟁이에게 쫒겨 쾨히니베르크 항에서 파리로 도주했다. 도중에 폭풍우를 만나 보른홀름 성에 피신하기도 했다. 이때의 처절하고도 쓰라린 경험은 이후 「방랑하는 네덜란드인」을 작곡하는 토대가 되었다. 신을 모독한 죄로 영원히 항구에 돌아갈 수 없게 된 네덜란드인의 배가 희망봉 근처나 북해를 떠다닌다는 북유럽의 전설을 소재로 삼았다.
빚쟁이 혁명가
파리에 겨우 발을 디딘 26살의 바그너는 궁핍한 생활을 이어갔다.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오페라 편곡으로 가까스로 생계를 꾸려나갔고, 빚을 청산하지 못해 교도소에 수감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때 명작 「리엔찌」와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을 잇따라 썼다. 그것은 드레스덴으로 이주한 30대의 바그너를 일약 유명 작곡가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특히 「리엔찌」는 바그너 최초의 오페라이자 출세작이었다. 14세기 로마 교황의 공증인 리엔찌가 민중의 힘을 모아 귀족을 누르고 호민관이 되었으나, 귀족들은 틈만 나면 리엔찌를 암살하려 한다. 리엔찌의 암살자를 체포했으나, 이들을 풀어줌으로써 오히려 민중의 분노를 자극한다. 결국 민중봉기로 리엔찌가 불태워진다는 이야기다.
바그너는 작센 궁정악장에 임명되면서 생활이 차츰 안정되어 갔고, 32살 때 「탄호이저」와 25살 때 「로엔그린」을 잇따라 작곡했다. 「탄호이저」는 13세기 독일의 민네징거(사랑노래를 부르는 음유시인)이자 기사의 이름. 그는 요염한 마녀의 유혹에 빠져 관능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 그러나 연인 엘리자베트의 진실한 사랑과 죽음으로 마침내 영혼의 구원을 얻는다는 내용이다. 곧 ‘여성의 절대적인 사랑과 헌신을 통한 예술가의 구원’이 주제다. 또한 「로엔그린」은 13세기 독일 서사시를 바탕한 것으로 기사 로엔그린과 브라반트의 미녀 엘자와의 사랑을 그렸다. 여기에 그 유명한 결혼식 신부입장 때의 「혼례의 합창」이 나온다.
바그너는 36살 때 독일 드레스덴에서 일어난 5월 혁명에 가담했다. 1인 군주정치에 반대하는 동시에, 모든 계급이 참여하는 공화정치 실현을 위해서였다. 그러나 혁명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의 초상화가 그려진 체포장이 발부되었고, 그는 독일에서 추방되었다. 무려 13년 동안 스위스·이탈리아 등지를 떠돌며 망명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49살 때 그의 추방령이 비로소 해제되기는 했으나, 그는 경제적으로 이미 절망상태였다. 일찍이 그는 「음악에 있어서의 유태주의」라는 글을 썼다. “유태인 음악가는 신기함과 곡예적 트릭으로 사람을 즐겁게 하나, 인간의 마음과 영혼에 깊은 감정을 불러 일으키지 못한다”는 것이 그 요지였다. 더구나 그는 당대 최고의 비평가 마이어베어와 작곡가 멘델스존을 신랄하게 공격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유태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누렸던 부와 명예에 대한 강렬한 질투심 때문이었다. 이후 바그너의 음악은 히틀러의 나찌스에 적극 활용되었다. 유태인에 대한 극단적인 증오로 말미암아 게르만 민족의 우월성을 과시할 수 있었던 까닭이다.
빗나간 우정, 헤픈 연애
바그너가 쉰 살 무렵, 그를 숭배하는 후원자가 나타났다. 바이에른의 젊은 국왕 루드비히 2세였다. 그는 ‘낭만적이고 사치스러우며 화려한 왕’이었다. 그는 바그너에게 10년 동안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바그너에게 뮌헨에 숙소를 제공하고, 사재로 연봉 1만 2천 굴덴을 꼬박꼬박 지불했다. 1만 2천 굴덴은 당시 바이에른 수상 연봉의 3배에 해당하는 거액이었다.
그 뿐만 아니었다. 루드비히 2세는 「니벨룽겐의 반지」를 공연하기 위한 바이로이트축제극장 건립에도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건립비 30만 마르크에 추가로 10만 마르크를 지원했다. 또한 그는 바그너의 개인 저택 건립자금으로 7만 7천 마르크도 지원했다. 바이로이트 시장도 극장 부지를 무상으로 제공하는가 하면, 은행가와 자산가 등 유력인사의 지원도 잇따랐다.
32년이나 어린 루드비히 2세와의 우정은 눈물 겨운 것이었다. 루드비히 2세는 수 백통에 이르는 편지에서 바그너를 “오직 하나뿐이자 나의 모든 것”으로 추앙했고, 바그너는 그에게 “늘 애인에게 가듯이 날아간다”고 맞장구를 쳤다. 그러나 바이에른 왕국이 프로이센에 패하고 루드비히 2세는 왕위에서 쫒겨나고 말았다.
바그너는 그를 따르는 여성이 많았다. 그렇지만 그는 여성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순간적인 성적 쾌락을 위해서, 또는 오직 자신의 이익을 위해 여성을 택했다. “넉넉한 환경에서 작곡할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는 여성이 그의 주요 타깃이었다. 만약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여성의 면전에 욕설을 퍼붓고 또 다른 여성을 찾아나섰다.
44살 때 바그너는 마틸데와 깊은 사랑에 빠지기도 했다. 마틸데는 자신의 은인이었던 베젠동크의 부인이었고, 베젠동크는 바그너에게 생활비 일체와 호화별장을 지어서 제공한 인물이었다. 요컨대 바그너는 은인 베젠동크의 뒷통수를 친 셈이다. 마틸데와의 열애는 그가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작곡하는 토대가 되었다. 트리스탄이 그의 백부(伯父)인 마르크의 아내 이졸데와 관능적인 사랑에 빠진다는 스토리다. 이 사건으로 아내 플라너는 히스테리컬한 질투를 일삼았고, 마침내 둘은 파국을 맞고 말았다.
바그너가 53살 때 자신을 위해 구걸도 마다 않았던 플라너가 죽었다. 그는 그녀의 불행한 죽음에도 아랑곳 않고 4년 후 오랫동안 동거했던 코지마와 새로 결혼식을 올렸다. 코지마는 리스트의 둘째 딸로 마리 다구부인 사이에서 난 사생아였다. 그녀는 동료인 지휘자 한스 폰 뵐로의 아내였고, 뵐로와의 사이에 이미 3명의 아이를 두고 있었다.
바그너는 베니스에서 가족여행을 즐기다 갑작스런 죽음을 맞았다. 나이 70, 심장마비였다. 유해는 바이로이트에 옮겨져 자신의 사저에 안치되었다. 매우 훌륭한 음악가였으나, 그의 죽음을 비통해 하는 장례행렬은 없었다. 바그너가 죽은 다음, 아내 코지마는 47년 더 살다 죽었다.
들으면 좋을 음악
「발퀴레」 중 ‘발퀴레의 기행’
「리엔찌」 서곡
「로엔그린」 서곡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서곡
「탄호이저」 서곡
「뉘른베르크의 명가수」 서곡
「트리스탄과 이졸데」 서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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