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부산』 2015년 12월호(통권 제126호)
음악가의 이상과 현실 ⑫
슬라브의 국제주의자
김 창 욱
음악평론가
문화네트워크 음악풍경 기획위원장
차이코프스키는 극도로 내성적이며 예민한 감수성의 소유자였지만, 음악에서만큼은 한결같이 열정적인 작곡가였다. 37살의 순정파였던 그는 9살 연하의 여성으로부터 열렬한 구애에 넘어가 덜컥 결혼해 버렸다. 그녀는 모스크바음악원 교수시절의 제자였고, 남편의 일에 이해가 전혀 없는 아내였다. 결혼생활은 순식간에 파탄지경에 이르렀고, 그는 극심한 노이로제에 시달려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마침내 차이코프스키는 아내를 버리고 페테르부르크로 도망치고 말았다. 결혼생활 2개월 만의 일이었다.
서유럽 주류가 된 러시안
차이코프스키(P. I. Tchaikovsky 1840-1893)는 흔히 '절충파', 혹은 '서구파'라고 불린다. 스크리아빈이나 라흐마니노프 같은 작곡가도 이 계열에 포함된다. 이들은 당대 민족주의 음악가들(러시아 5인조)의 편협되고 과장된 의식을 강조하지 않고, 때때로 러시아적인 음악방언을 사용하면서도 본질적으로는 '보편적이고 순수한 음악미'를 지향하는 국제적 음악양식을 따랐다.
그의 음악은 짜임새 있는 구성, 화려한 오케스트레이션, 센티멘탈한 서정성, 애수와 격정이 동시에 넘쳐 흐른다. 이같은 그의 음악은 국제적인 연주무대에서 중요한 레퍼토리가 되었고, 특히 러시아 음악을 서양음악의 주류 속에 편입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차이코프스키는 러시아 캄스코 보트킨스크의 시골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일리야 페트로비치는 광산 감독관이었고, 어머니 알렉산드라 안드레예브나는 프랑스계 러시아인으로 피아노와 노래에 관심이 있는 딜레땅뜨였다. 이들은 슬하에 5남을 생산했는데, 차이코프스키는 그 가운데 차남이었다.
그는 5살 때 프랑스인 여성 가정교사로부터 수업을 받았다. 그때 그 가정교사는 문학과 예술, 특히 음악에 소양이 깊었다. 그녀는 차이코프스키가 7살이 되던 해 그에게 피아노를 가르쳤다.
떠돌이 삶을 살던 아버지를 따라 8살 때는 모스크바로 이사를 갔고, 거기서 다시 페테르부르크로 거처를 옮겼다. 페테르부르크에 있는 기숙학교에 입학한 그는 밀리토프에게 정규 피아노 레슨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가정이 어려웠으므로 10살 때 페테르부르크 법률학교 예비학교에 진학했고, 19살 때 마침내 페테르부르크의 법률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법률을 공부했지만, 차마 음악의 끈을 놓지는 못했다. 교내에서 코러스 활동을 하거나, 음악이론을 배우기도 했다. 피아노 소품 「왈츠」를 작곡하기도 했다. 14살 때 어머니가 콜레라로 죽고, 15살 때 아버지가 파산지경에 이르기까지도 그러했다.
법률학교를 졸업한 그는 곧바로 법무부 서기(공무원)로 취직할 수 있었다. 덕분에 그는 줄곧 안정된 생활을 유지했다. 이탈리아의 오페라나 프랑스 연극과 발레를 자유롭게 즐길 수 있었던 것도 고정수입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공무원 생활은 얼마 가지 않았다. 23살이 된 그는 3년 만에 안정된 직장을 포기하고, 곧장 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서 본격적으로 음악을 공부하기로 결정했다. "천하에 쓸모 없는 놈, 법률가와 딴따라를 바꾸다니!"라며 주위에 비난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으나, 그의 아버지만큼은 아들의 뜻을 존중하고 애써 격려했다.
"연주 불가능!"
차이코프스키는 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들어갔다. 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은 1859년에 개설된 것으로 안톤 루빈슈타인과 동생 니콜라이 루빈슈타인이 설립했는데, 러시아음악협회의 인준을 받아 음악원으로 승격되었다. 그곳은 러시아에서 서유럽 음악의 전통을 이식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차이코프스키는 여기서 안톤 루빈슈타인에게 배웠다. 그는 당대 러시아의 위대한 피아니스트였고, 서유럽 음악의 작곡수법을 기꺼이 그에게 전수해 주었다. 이때 그는 니콜라이의 집에 기거했고, 5년이나 그의 집에 얹혀 살았다. 그 결과, 그는 마침내 프로 작곡가로서의 명성이 차츰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25살 때부터 그는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화성학 교수생활을 했는데, 10년이나 계속되었다. 그러나 스승 루빈슈타인과 차이코프스키는 음악에 관한 한 마찰과 갈등이 없지 않았다. 루빈슈타인이 브람스와 같은 서유럽 보수파의 음악전통을 따른데 반해, 차이코프스키는 리스트·바그너 등의 혁신파 음악에 러시아 전통을 접목시키려 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는 러시아 5인조와의 대척점에 있었다. 28살 때 러시아 민족주의 음악그룹인 러시아 5인조(글링카의 후예인 발라키레프·뭇소르그스키·큐이·보로딘·림스키코르사코프)와 친교를 나누었다. 음악에 있어서 민족주의란, 자국의 음악전통을 유지·계승하려는 것으로 19세기 말 주로 비유럽에서 일어났던 사조였다. 곧 자국의 전설이나 역사, 혹은 자국의 민요를 토대로 작품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는 오래지 않아 국제파로 거듭 났다. 국제주의란, 음악적 민족주의 전통을 바탕으로 하되, 서유럽 음악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서구 지향적 음악관인 셈이다.
40대 전후는 차이코프스키가 작곡가로서 절정을 이룬 시기였다. 그는 35살 때 피아노협주곡 제1번을 작곡했다. 은인이었던 안톤 루빈슈타인에게 헌정하려 했으나, 그는 "이것도 음악인가? 피아노로 연주하기에 부적당하고 독창성도 전혀 없다"며 비난했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난 차이코프스키는 헌정사를 찢어버리고, 지휘자 한스 폰 뵐로에게 헌정했다. 서정적인 선율, 거칠고 중후한 화음, 색채적인 관현악, 고도의 기교를 요구하는 작품이다.
38살 때 그는 바이올린 협주곡을 썼다. 이 작품은 유럽 작곡가들에게서 발견할 수 없는 러시아적 우수와 우울감이 너울댄다. 바이올린의 달인 레오폴드 아우어가 "연주 불가능!"이라 할 만큼 고도의 테크닉을 요구한다. 영화 「더 콘서트」에 소개된 바 있다.
한편 40살 때 쓴 서곡 「1812」는 나폴레옹이 65만 프랑스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 모스크바를 침공한 해를 상징한다. 영하 40도의 혹한 속에서 보급로마저 끊겨 침공 6개월 만에 프랑스 군대는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차이코프스키는 이 작품에서 러시아 군의 저항과 승리의 과정을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시작과 함께 "신이여, 짜르를 보호하소서"가 합창으로 나오고 여러 선율이 얽히고 설키다가 마침내 러시아 민요가 프랑스 국가 「라 마르세예즈」를 압도하면서 전쟁이 막바지에 이른다. 특히 16발을 대포소리가 클라이막스를 이룬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후원자
차이코프스키의 주위에는 몇몇 여인들이 존재했다. 그 가운데는 28살 때 교제한 벨기에 출신의 여가수 레지나 아르토가 있다. 그녀는 연상이었고, 그와 약혼까지 했으나, 연애만큼은 적극적이지 않았던 차이코프스키가 망설이던 동안 그녀는 스페인 가수와 곧장 결혼해 버렸다.
37살에 만난 안코니나 밀류브코바는 28살의 모스크바 음악원 제자였다. 9살 연하의 여성이었다. 안토니나의 열렬한 구혼 끝에 결혼했으나, 2개월 만에 파경을 맞고 말았다. 극심한 선천적 우울증을 겪고 있던 차이코프스키는 모스크바 강에서 얼음을 깨고 자살을 기도하기도 하고, 페테르부르크로 도망치기도 했다.
사실 동성애자였던 차이코프스키는 세간의 비난과 가책을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안토니나와 결혼한 터였다. 그는 폰 메크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아래와 같이 고백하고 있다.
"내내 뭐라 할 수 없는 고통이 나를 괴롭힙니다. 천성적으로 결혼을 기피하는 기질의 제가 서른일곱의 나이에 별로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와 갑자기 결혼하기란 정말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제 양심은 순수합니다. 저는 사랑 없는 결혼을 합니다. 주위에서 그렇게 하도록 요구하고 있으며, 저로서도 달리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차이코프스키가 자신의 심경을 낱낱이 고백할 정도로 신뢰했던 이는 무엇보다 폰 메크 부인이었다. 그녀와는 끝까지 순수한 우정을 지켜 왔다. 36살에 만난 부유한 철도 엔지니어 나데즈다 필라레토브나의 미망인 폰 메크는 11명의 자식을 거느린 어머니이자, 자신의 음악에 감동했던 여인이었다.
폰 메크와 차이코프스키가 급격히 가까워지게 된 것은 그녀가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음악을 그에게 작곡해 달라는 편지를 보내면서부터였다. 그들의 교제는 15년 동안 지속되었는데, 그 사이 차이코프스키가 그녀에게 보낸 편지가 무려 1,204통에 이르렀다. 여기에는 자신의 사생활은 물론, 종교와 철학 등 다양한 내용이 포함되었다. 그녀는 이 기간동안 그에게 매년 6,000루블의 연금을 지급했다. 그것은 음악원 교수 초임 연 600루블의 10배에 이르는 거액이었다.
이 무렵 그는 교향곡 제5번을 썼다. 48살에 작곡한 것이다. 1980년대 가수 민해경의 「어느 소녀의 사랑 이야기」의 "그대를 만날 때면, 이렇게 포근한데~"의 선율을 닮아 한국에서는 흔히 '민해경 교향곡'이라 지칭되기도 한다.
그런데 폰 메크와 교제 15년째가 되는 어느날, 차이코프스키는 그녀로부터 뜻밖의 편지를 받았다. 오랜 후원으로 자신이 엄청난 손실을 입었으므로 이후 졍제적 지원은 물론, 친교를 완전히 중단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갑작스런 소식에 놀란 차이코프스키는 몇 차례의 편지를 그녀에게 썼다.
"나는 당신을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내 마음은 언제나 당신을 향해 열려 있습니다. 나만큼 당신을 사모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아 주십시오."
그러나 폰 메크로부터 더 이상 답장이 없었다. 이후 그들은 평생 한 번도 만난 적도 없었다.
1893년, 차이코프스키는 53살의 나이로 페테르부르크에서 죽었다. 병명은 콜레라. 최후의 교향곡 제6번 「비창」을 초연한지 꼭 1주일 뒤였다.
들으면 좋을 음악
가곡 「그리움을 아는 자만이」
피아노곡 「6월-뱃노래」
관현악곡 「슬라브 행진곡」
서곡 「1812」
「바이올린 협주곡」
「피아노 협주곡」 제1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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