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욱의 '음악의 날개 위에' ②
가사 잊어버린 무대 위 대처방법도 제각각
『국제신문』 2006. 8. 7
음악평론가
주위에는 노래를 찬미하는 노래가 많다. '노래는 즐겁다'는 동요도 있고, '노래의 날개 위에'라는 리트(가곡)도 있으며, '노래하는 곳에 사랑이 있다'는 대중가요도 있다. 이들은 한결같이 노래가 갖는, 혹은 노래하는 기쁨과 즐거움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노래를 직업으로 하는 성악가들에게 있어서 노래는 즐거움인 동시에, 때때로 고통스런 일이 되는 경우가 없지 않다. 가령 무대에서 고음이 올라가지 않아 화려한 클라이막스를 망쳐버리거나, 갑자기 가사를 잊어버림으로써 노래가 중단되는 때가 그렇다.
이럴 때 객석에 앉은 청중의 반응은 여러가지로 표명된다. 대개의 청중은 숨 죽이고 침묵한다. 그런 다음, 성악가가 이후의 상황을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마음 졸이며 무대를 살핀다. 그런가 하면, 실수의 안타까움을 이기지 못한 청중(아줌마일 가능성이 크다)은 대개 다음과 같이 외친다.
"에그머니나, 저를 어쩌나!"
무엇보다 가장 적극적인 청중은 오히려 어느 때보다 큰 박수로 화답한다. 여기에는 성악가의 실수에 면죄부를 주고자 하는 동양적 정서가 짙게 깔려 있다.
이처럼 성악가의 실수에 청중의 반응이 조금씩 다르듯 실수를 저지른 성악가의 대처방법도 제각각 다르다. 아마추어적 성악가는 금세 붉게 물든 얼굴로 객석을 향해 소박하게 말한다.
"가사 까먹었습니다. 다시 하겠습니다."
그러나 조금 경력이 있는 성악가라면, '누구나 실수할 수 있는 것 아니예요?' 하는 표정으로 잊어버린 가사에 해당되는 프레이즈를 쉬고, 그 다음 패시지로 구렁이 담 넘듯 넘어간다.
가장 뻔뻔스런 것은 노회한 프로 성악가들이다. 그들은 오랜 경험을 통해 자유로운 콘트라팍툼(노래가사 바꿔 부르기)을 가능케 하는 능력을 배양해 왔다. 그런 까닭에, 그들은 즉흥적으로 붙인 자의적인 가사로 청중의 귀를 깜쪽같이 속일 줄 안다. 그것이 이탈리아나 독일 등 외국노래일 때 더욱 그러하다.
그런데 프로 성악가 가운데서도 대처방법이 극히 초보적이거나, 성악가의 실수에 보편적인 안타까움을 전혀 표명하지 않는 정직한 청중도 있다.
과거 70~80년대만 하더라도 '가곡과 아리아의 밤'이 매우 즐겨 열렸다. 여러 명의 성악가가 차례로 등장, 관현악 반주에 맞춰 노래하는 옴니버스 식의 음악회였다. 여기서는 한국가곡과 오페라 아리아 중에 폭넓은 대중적 호소력을 가진 노래가 주로 불려졌다.
70년대 어느 날 저녁, 부산시향이 반주를 맡은 '가곡과 아리아의 밤'에 테너 팽재유(彭宰宥)가 나섰다. 그는 검은 색 연주복에 흰 나비넥타이를 맸다. 그리고 번쩍거리는 구두를 신고 무대에 등장했다. 의기양양하고 위풍당당한 몸짓으로 무대에 선 그는 한국가곡에서 그의 탁월한 연주역량을 가감없이 보여주었다. 타고난 미성, 특히 고음처리가 일품이었다. 그런 다음, 소프라노 가수와 베르디의 '축배의 노래'를 2중창으로 노래했다.
현란한 오케스트라의 전주에 이어, 먼저 그(알프레도)가 유창한 이탈리아어를 구사했다.
"자, 이 잔을 마시자. 이 순간의 기쁨에 이 몸은 설레인다…"
그러자 곧바로 소프라노(비올레타)가 다음을 노래했다.
"쾌락이야말로 인생, 즐깁시다. 이 순간의 사랑에…"
다음은 그가 노래할 차례였다.
"………”
너무나 자신만만한 탓이었을까. 갑자기 불러야 할 노래가사가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노래를 멈추었다. 노래가 단절되자 뒤이어 오케스트라 반주도 멈추었고, 소프라노 노래도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일순 객석은 깊은 침묵 속에 빠져 들었다.
바로 그때였다. 객석 저편에서 중학생 쯤으로 보이는 관객 하나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쳤다.
"까불 때 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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