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문화

다시 읽기: 악당의 출현

浩溪 金昌旭 2017. 7. 28. 07:05


김창욱의 '음악의 날개 위에'

현수막에 관현악당 출현 정신없이 덧칠

국제신문 2006. 7. 17 (19)


음악평론가


부산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민간 오케스트라라면 단연 부산관현악단이 손꼽힌다. 과거 숱한 오케스트라가 거창한 명분 아래 결성되었지만, 창단연주회가 곧 해단연주회가 되는 경우가 한 둘이 아니었다. 이런 전례에 비추어 부산관현악단은 척박한 토양을 일구며 명맥을 이어온 민간 교향악운동의 산 역사라 할 만하다.

 

19783, 신라대 유호석 교수의 주도로 창단된 부산관현악단은 지난 200311월 제50회 정기연주회를 끝으로 25년 간의 긴 여정을 마무리할 수밖에 없었다. 재정 문제 때문이었다. 그러나 악단은 그동안 매년 빠짐 없이 두 차례의 정기연주회를 가졌다. 뿐만 아니라 청소년을 위한 음악회를 통해 역량있는 신인들을 발굴, 협연무대를 제공하는가 하면, 재부 작곡가들의 신작을 초연함으로써 지역 창작음악 활성화에도 이바지한 바 적지 않다.

 

산이 높으면 산 그림자도 길듯이 역사가 깊으면 곡절도 많은 법이던가. 아마도 10년은 지난 일이리라. 부산관현악단의 연주회가 열리던 어느 날이었다. 오후 4시가 되자 공연장소인 부산시민회관 대강당으로 연주자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저녁 730분의 본 연주를 위한 리허설 때문이었다. 모두들 제 자리를 잡고 튜닝을 끝냈다.


이윽고 지휘자가 등장했다. 지휘자의 지시에 따라 서곡에서부터 다양한 협주곡에 이르기까지 당일 연주곡을 차례로 훑어내렸다. 연주직전, 다시 없을 최종 연습이기에 지휘자는 물론 단원들은 어느 때보다 열심히 리허설에 임했고, 협연자들의 표정도 사뭇 진지했다.

 

두어 시간이 지났을까. 마침내 총 연습은 깔끔하게 갈무리되었다. 파이팅을 외친 연주자들은 악기를 챙겨 각자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때였다. 갑자기 단원 가운데 하나가 소리쳤다.

 

"저것 좀 봐!"


그가 가리킨 곳은 무대 위에 설치된 현수막이었다.

 

"도대체 뭔데?"


누구라 할 것 없이 고개를 치켜 들고 그가 가리킨 쪽을 올려다 보았다. 거기에는 대단히 유려한 글씨체로 다음과 같이 씌어져 있었다.

 

'부산관현악당 ○○연주회'

 

큼직한 붓글씨였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조금 작은 글씨로 다음과 같이 씌어져 있었다.

 

'출현 : ○○○ ○○○ ○○○'

 

말대로라면 당일 시민회관 무대에 '악당''출현'하는 셈이었다. 연주자들은 한결같이 낄낄거리며 손가락질을 해 대고, 지휘자는 "누가 이따위 장난을 친 거냐?"며 담당자인 장극태 총무를 불러 타박했다.

 

요즘에야 현수막이 컴퓨터 실사 출력으로 간단히 제작되지만, 당시에는 업체에서 페인트 통을 들고 사람이 나와 내용을 직접 붓으로 써서 만들었다. 제작비도 오늘날 7~8만 원 정도에 비해 당시는 20만 원이 넘었다. 적잖은 비용에도 불구하고 업체에서 이런 실수를 하다니, 총무는 불현듯 화가 치밀어 올랐으나, 무엇보다 현수막을 끌어내려 다시 손 보는 일이 급선무였다.

 

남포동 제작업체에 부랴부랴 연락을 취했다. 핸드폰이 거의 없던 시절이라 부득이 공중전화통을 부여잡고서. 그런데 업체 전화는 신호음만 울릴 뿐 응답이 없다. 어느덧 저녁 6시를 훌쩍 넘겼다. 연주 때까지는 1시간도 채 남지 않았다. 설령 업체에서 사람이 나온다 해도 시간이 빠듯했다. 에라, 모르겠다. 간판을 내린 총무는 떨리는 손으로 글자를 고치기 시작했다. ''''''''에 흰색을 덧칠하기도 하고 검은색 싸인펜으로 글자형을 약간 바꾸기도 했다.

 

곧 연주가 시작되었고, 총무는 허기진 배를 움켜잡고 무대에 올라야 했다. 그런데 객석 여기 저기서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름대로의 눈속임에도 불구하고, 흐릿한 글씨는 여전히 '악당''출현'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면, 악단 총무는 민간 오케스트라의 운명과 닮아 있다. 늘 바쁜 것도, 늘 할 일이 많은 것도, 늘 욕을 먹는 것도, 늘 굶주리는 것도 닮았다. 그러면서 끝내 음악을 버릴 줄 모르는 것까지도 그 둘은 너무나 똑같이 닮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