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날들

동아시아 유학생이 본 근대: 홍난파

浩溪 金昌旭 2017. 11. 29. 21:27


일본 벤세이출판사(勉誠出版)가 보낸 책이 오늘 도착했다. 『〈異鄕としての日本』이라는 타이틀이다. 우리말로는 '타향으로서의 일본' 쯤이 되겠다. 부제는 '동아시아 유학생이 본 근대'인데, 근대 시기 중국·조선·대만에서 일본으로 유학한 문화예술가들의 유학 경험과 그 의미를 탐색한 것으로 동아시아 연구자들의 공동저작이다. 


제3장 '조선반도의 시선에 비친 일본'에는 작가 이광수(李光洙), 여류화가 나혜석(羅蕙錫), 아동문학가 마해송(馬海松), 추리작가 김내성(金來成), 시인 정지용(鄭芝溶)과 윤동주(尹東柱) 등의 문화예술가들이 사계 권위자들에 의해 소개되었다. 그 가운데 꼽사리로 낀 나는 '홍난파-일본 유학시절의 근대음악가'를 썼다. 


벤세이출판사는 일본에서 식민지 관련 연구서나 인문학 연구서 및 자료를 다수 펴낸 출판사이고, 내 글을 옮긴 이는 고려대학교 일어일문학과 유재진 교수다. 그는 이번 프로젝트의 편집위원이기도 하다. 책값은 6,200엔, 한화로 59,903원이다(금일 21:40 현재). 이 페이지 말미에는 일본어를 해독하기 어려운 분들을 위해 내가 쓴 원본을 그대로 올려둔다. 2017. 11. 29 들풀처럼.


스캔 바이 들풀처럼. 『〈異鄕としての日本』 표지.



스캔 바이 들풀처럼. 내가 쓴  '홍난파-일본 유학시절의 근대음악가' 첫 쪽. 




스캔 바이 들풀처럼. 책 말미에 소개된 내 프로필.


스캔 바이 들풀처럼. 판권.



홍난파(洪蘭坡, 본명 洪永厚 1898-1941)는 식민지 근대를 살았던 서양음악가이다. 이것은 근대 식민지 조선이라는 시간적·공간적 조건이 홍난파의 삶은 물론, 나아가 그의 음악활동에도 직·간접적인 영향으로 작용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서구의 근대화가 진행되던 개화기, 그는 근대의 첨병이라 할 수 있는 기독교의 찬송가 문화를 통해서 처음으로 서양음악에 접촉했다. 이후 황성기독교청년회 학관 중학부 시절, 김인식으로부터 바이올린을 배우면서 서양음악에 깊이 빠져들었고, 조선정악전습소 서양악부에 들어가면서 본격적으로 음악에 입문했다.


조선정악전습소를 졸업한 그는 김인식의 후임으로 그곳에서 잠시 교편을 잡았으나, "최고의 음악교육"을 받기 위해서 도일(渡日), 일본 유일의 관립인 동경음악학교에 입학해서 1년 후에 예과를 수료하게 된다. 그러나 때마침 일어났던 1운동에의 참여는 그의 본과 진학을 거부당하는 구실이 되었다.

 

부득이 귀국할 수밖에 없었던 그는 매일신문사 기자로 활동하는가 하면, 소설창작과 번역에 몰두하면서 문학에 뜻을 두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민간음악기관인 연악회를 조직해서 음악교육과 음악회 개최, 악보집 발간 등 다양한 음악활동을 펼쳤다. 이같은 그의 활동은 서양음악을 통해 조선을 계몽시켜야 한다는 근대주의자로서의 사명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의 음악계몽운동은 다시 도동(渡東), 동경고등음악학원을 마친 이후에도 계속된다. 연악회 사업을 재개하는 한편 중앙보육학교 음악주임 교유로 정착하면서 『조선동요백곡집상편 50곡을 창작·출판했기 때문이다.


 

유일무이한 이상의 정점, 동경음악학교

 

홍난파에게 동경음악학교는 수준높은 음악교육을 받을 수 있는 "최고 이상"이자, "유일무이한 이상의 정점"이었다. 이것은 1879(明治 12) 문부성 내에 '음악취조괘'(音樂取調掛)라는 부서가 설치되면서 생겨난 것인데, '음악취조괘'가 발전적으로 개편됨으로써 동경음악학교의 창립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특히 이 학교는 당시 일본 국내에서 서양음악을 본격적으로 가르치는 유일한 교육기관인 동시에, 역사적인 관립학교라는 점에서 그 권위와 지위가 명실공히 최고 수준임을 과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동경 유일의 관학은 조선인의 입학을 거의 허용하지 않았다. "오원이란 불소(不小)한 수험료와 땅팔고 밭팔아 만든 막대한 여비를 써서 관학에 응시하려 오는 학생이 매년 십명 내외나 되면서도 아직껏 한 사람도 입학치 못한 것"은 바로 그러한 까닭이었다. 따라서 그는 19184, 어렵사리 이 학교 예과에 입학했다.


개인적으로 일본유학을 감행한 홍난파와는 달리, 소프라노 윤심덕(尹心悳)은 일선융화(日鮮融和)의 목적으로 조선총독부가 실시했던 관비유학생(官費留學生) 시험에 당당히 합격함으로써 입학하게 된 경우이다.


그런데 홍난파는 그토록 열망하던 동경음악학교 예과를 19192월에 수료하고, 갑자기 3월에 그만 두고 말았다. 당시 신문기사에 의하면, 난파는 "무엇의 타격을 밧아가지고" 귀국했으며, 자신의 글에 따르면, "못처럼 들어간 東京音樂學校本科進級하자마자 一身上 事情으로 中途退學"하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으로는 그가 학교를 중퇴한 까닭을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19193월 당시 난파가 '어떤' 사건으로 말미암아 정신적, 혹은 육체적으로 엄청난 충격을 받았음에 틀림없다는 사실이다.


난파는 또 다른 글에서 "모처럼 드러갓던 東京音樂學校만 하더라도 萬歲통에 튀여나오지만 안앗던들 官立學校란 끔찍한 看板 밋헤서 大道橫步햇슬 것"이라 말한다. 그것은 그가 31운동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했음을 짐작케 한다. 특히 그가 '만세통'에 튀어나옴으로써 관립학교 간판을 얻지 못했음을 크게 후회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가 학교를 중도에 그만 둔 일이 결코 자의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31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 때문에 19201월 하순경 그가 동경음악학교 본과에 진학하려 했으나, 학교측에 의해 거절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동경음악학교에서는 조선학생은 환영치 않는다는 것은 연래의 품평이다. 또 그 원인은 과거에 그 학교에 재적했던 수삼의 조선학생이 성적이 불량하고 교칙을 준수치 않아서 학교 당국으로부터 최후 일분의 신용까지도 모두 잃어버렸다는 품평도 종종 듣는다"는 난파의 언급은 당시 조선유학생들의 반일적 감정이 적지 않았다는 사실과 일본 관립학교가 조선학생들에 대해 이미 호의적(好意的)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동시에 보여준다. 31운동의 도화선이 됐던 191928일의 28선언이 재일유학생의 주도에 따른 것이었기 때문에 31운동 후에도 당국의 감시와 간섭은 극심했다. 이것은 19206월 현재 일본유학생 총수 828명 중 '요시찰'151명에 이르고 있었던 점으로 알 수 있다.


1919년 동경음악학교에서 퇴학당한 홍난파는 "집에 돌아와서 一後 가깝게 놀고" 지냈다지만, 사실은 매우 분망한 시간을 보냈다. 다양한 음악활동은 물론, 문학에도 깊이 탐닉했던 까닭이다.

 

1919년에 그는 경성악우회(京城樂友會) 1회 음악연주회(10.13 중앙기독교청년회관)를 열어 바이올린피아노독창 등으로 음악보급활동을 꾀했고, 그 해 12월에도 악우회는 음악회(12.29 중앙기독교청년회관)를 개최했으며, 이왕직양악대와 경성양악대(京城洋樂隊)의 후신인 경성악대(京城樂隊)의 음악회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홍난파는 1924119일 제1회 바이올린 독주회를 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여는가 하면, 연악회(硏樂會)의 남녀학생이 60여명에 이르러 경성 서대문정 150번지 새문안예배당 내에 회관을 새로 준공, 그 해 113일 낙성식을 가지기도 했다. 나아가 1924년 서울구락부가 후원한 음악회(6.20 중앙기독교청년회관), 19254월에 『음악계』의 창간기념연주회(4.28 중앙기독교청년회관), 춘기음악연주회(6.21 중앙기독교청년회관), 1926년 그랜드 콘서트(2.11 중앙기독교청년회관) 등을 연악회 주최로 잇따라 열었다. 그리고 홍난파는 연악회 회원으로서 양금·단소 등 전통악기와 자신의 바이올린으로 선양합주(鮮洋合奏)를 시도하기도 했다.


또한 홍난파는 1925427일 연악회의 잡지 음악계』를 창간, 192621일 제4호까지 발행했으며, 바이올린 독주곡 哀愁朝鮮(1924), 夏夜星群(1924), -만스(1924), 東洋風舞曲(1933) 및 『世界名作歌曲選集』(1926), 『朝鮮童謠百曲集』 상·하편(1931), 『朝鮮歌謠作曲集』(1933), 特選歌謠曲集』(1936) 등을 연악회에서 잇따라 펴냈다.

 

 

조선 음악청년의 일대광명, 동경고등음악학원

 

1925926, 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제2회 바이올린독주회를 열었던 홍난파는 19269월 사립 동경고등음악학원 본과에 입학한다.


사실 그는 이곳에 진학하기 전, 미국과 독일에의 유학을 심각하게 고려한 적이 있었다. 1919년 봄에 미국유학을, 2년 후인 1921년에는 독일유학을 각각 계획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이같은 계획을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무엇보다 그에게는 양행(洋行)을 현실화할 만큼의 경제적인 여건이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는 부득이 차선의 방법, 곧 일행(日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동경고등음악학원은 1926(大正 15) 4월 동경시 사곡구(東京市 四谷區, 현재 新宿區)에서 창립, 같은해 11월 무사시노(武藏野)의 쿠니타치(國立)로 이전했다. 당초 교원수는 23명으로 입학자는 본과가 27, 예과가 74, 고등사범과 19, 사범과 12명 등의 진용으로 그 역사가 시작되었다. 초대 학장이 된 와타나베 이사무(渡邊敢)를 비롯, 나카다테 코오조(中館耕藏야타베 게이키치(矢田部勁吉타케오카 쯔루요(武岡鶴代사카키바라 나오시(榊原直) 등이 창립한 이 학원은 참된 인격의 음악가와 음악교사 양성, 가정·국가 및 국제의 진전에 따라 본무(本務)에 진력할 수 있는 정신의 배양, 적실(適實)한 독창력을 계발하고 생활에 순응하는 실제적인 인재를 양성을 건학이념으로 출발했다.


당시 동경고등음악학원의 교사들로는 1930(昭和 5)의 교원명부에 따르면, 성악과에 야타베 게이키치·타케오카 쯔루요·오쿠다 료오조오(奧田良三) , 피아노과에는 홍난파의 입학 당시 보증인이었던 사카키바라 나오시, 제3대 학장을 지낸 쯔치가와 마사히로(土川正浩파울 숄츠, 바이올린과에는 시바 수케하로(芝祐泰니콜라스 쉘브라토, 첼로과에는 하인리히 웰크 마이스텔 등 외국인 교수도 찾아 볼 수 있다. 또한 타무라 토라조오(田村虎藏, 교수법)와 모로이 사부로오(諸井三郞, 작곡 및 화성학) 그리고 학장인 와타나베도 윤리학 교수로 이름을 올렸다.


관립 동경음악학교와는 달리, 동경고등음악학원은 설립 당초부터 조선 등 국외 출신의 학생에게도 차별적인 제도를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간의 평판이 높았고 일본 전역은 물론, 조선이나 대만 등지에서도 우수한 학생들이 대거 몰려 들었다. 동경고등음악학원은 매년 예과 90, 본과 1년 약간명을 신입생으로 받아들였다. 홍난파는 이 학교가 천재 양성주의와 '예술에 국경이 없다'는 이상 아래 창설되었을 뿐만 아니라, 각과의 전임교수가 사계의 일류 권위자로 포진되어 있다는 이유에서, 과거 동경음악학교 예과 수료라는 학력을 근거로 스스럼없이 본과에 편입했다. 제적생이었던 그에게 있어 이 사립학교는 "조선 음악청년의 일대광명"이었음은 물론, "동경음악학교와 같은 관립 음악학교에 비해 전혀 난색(難色)이 없었".


홍난파는 1927년 동경 심포니오케스트라, 이듬해 1928년에는 동경 신교향악단(新交響樂團, NHK교향악단의 전신)의 제1바이올린 주자로 활동하는 동시에, 자신에게 '천재일우의 호기'를 준 동경고등음악학원이 요구하는 교과과정을 나름대로 착실히, 그리고 성실하게 따랐다.


그 결과 그는 1927년 본과 2학년 때 윤리 83, 창가 86, 피아노 78, 바이올린 163, 화성학 90, 일본어 88, 영어 93점의 평점을 얻어 급제판정을 받았고, 1928년 본과 3학년 때는 윤리 82, 창가 86, 피아노 77, 바이올린 164, 화성학 95, 미술 77, 음악사 92, 일본어 83, 영어 86점을 각각 획득함으로써 졸업판정을 받았다. 그의 성적표에 따르면, 난파는 자신의 전공인 바이올린에 매우 열성적이었을 뿐 아니라, 화성학·음악사 등 이론과목에도 큰 관심을 쏟았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창가·피아노 등의 실기과목에서는 상대적으로 소홀했음을 보여준다.


1929322일 그는 수업연한 3년의 동경고등음악학원(원장 渡邊敢) 본과 졸업장을 마침내 손에 쥐게 되었다. 홍난파의 학사학위 취득은 그의 본격적인 음악활동을 위한 기초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문명개화 시기, 근대주의적 음악론

 

홍난파가 일본에 유학했던 1920년대의 조선은 바야흐로 문명개화의 시기였다. 그는 자신이 살던 당대 조선이 근대 문명을 이루지 못했으므로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조선이 식민지배로부터 벗어나 국권을 되찾기 위해서 서구의 근대 문명을 받아들여 하루바삐 실력을 양성해야 한다고 믿었다. 특히 그는 조선이 독립함에 있어 음악적 실력을 양성하는 일도 매우 긴요하다고 여겼다. 음악이 곧 "국민의 실력"이며, "이풍역속"(移風易俗), 즉 풍속을 보다 좋게 고쳐 바꾸는데 음악만큼 효과적인 것이 없다고 그는 보았다.


홍난파의 근대주의적 음악론은 그가 동경 유학시절에 처음 씌어진 것으로 보인다. 동경음악학교 재학 중이던 19192, 그는 『삼광(三光)을 통해 자신의 세계관과 음악관을 적극적으로 피력했다. 『삼광의 창간사라 할 수 있는 "창간의 변"에서 그는 조선과 서구를 대칭적 개념으로 설정한 뒤 조선의 것은 열등한 것이라 전제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서구의 앞선 문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만 조선이 문명화(근대화)가 될 수 있고, 그럼으로써 식민지배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실력을 배양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는 당시 조선을 "깨는 때"라고 보았다. 물론 "깨는 때"는 문명개화 시기를 말한다. 즉 그는 이 시기를 서구의 문명과 사상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하는 때로 인식했다. 왜냐하면, "우리네의 사상, 우리네의 욕망, 우리네의 생각하는 것"이 모두 다 "정신의 응고(凝固)한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서구의 "초월한" 문명과 "고상한" 야심, 그리고 "위대한" 사상을 깨달아야 함은 주장했다. 급기에야 그는 "우리의 선조는 오랫동안 잠자셨지만은 우리는 깨인 사람인즉 깨인 사람의 일을 하자"면서 당대 엘리트 지식인들에게 사회계몽을 촉구하고 있다.


또한 그는 「서울에 계신 K형께」라는 글에서 당시 서울을 "부화경박(浮華輕薄)한 곳"이라거나 "황무한 산야"라거나 "미개한 사회"라고 타인의 입을 빌어서 말한다. 그리고 선배 음악인 K형을 내세워 "형님! 이 아우들을 위하여 수고를 아끼지 마십시오. 황무한 산야를 개척하시기에, 미개한 사회와 민중을 깨우치시기에 조금도 주저하지 마십시오"라는 적극적인 부탁의 말도 잊지 않는다.


홍난파의 이같은 인식은, 당시 경성이라는 곳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지저분"하고, "세상에서 가장 염증이 나는 도시"라고 표현한 미국 기독교 선교사들의 인식과 매우 흡사하다. 나아가 그는 프로테스탄트의 청교도적 정신으로 조선의 민중을 '부화경박'한 '미개한 사회'로부터 구해야겠다는 계몽적 사명감에 사로잡힌다. 그것은 곧 '미개'한 조선 민중을 '문명'인으로 계몽시켜야 한다는 사명감이었다.


따라서 그는 "깨는 때"에는 "퇴폐(頹廢)한 구습(舊習)과 고루한 사상을 타파하고 새 정신, 새 사상, 훌륭한 욕망, 위대한 야심을 불어 넣어야 할 것"으로 믿었고, "우리의 실력을 건전하고 충실하게 양성하여야 할 것"으로 생각했다. '깨는 때'가 '계몽기'이라면, '새 정신'은 서양의 정신이며, '우리의 실력'은 서양음악 실력을 각각 의미한다. 즉 그는 서양음악 실력을 배양함으로써 당시 조선을 계몽시켜야 할 것으로 인식했다.


음악가로서 홍난파는 먼저 조선을 계몽하기 위해서는 스스로가 계몽되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계몽을 도와줄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장소를 물색해야 했다. 그곳이 바로 일본이었다. '근대'라는 이름의 제국주의가 정신적인 이념과 함께 제도적 장치로서 선명히도 아시아지역에 확립된 곳은 상해(上海)와 동경(東京)이었다. 상해는 31운동 이후 임시정부 수립과 더불어 한국 지식인의 메카 노릇을 한 곳이지만, 동경은 19세기 말부터 한국 지식인의 지적(知的)인 메카였기 때문이었다.


또한 홍난파는 그의 음악론에 있어서도 서양음악 지향성을 일관되게 보여준다.

 

그는 "음악은 국민의 실력"이라는 서양철학자의 말과 "移風易俗에는 없다"는 동양학자의 말을 인용해서 새삼 음악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동시에, "음악의 청아함은 고저에 있고 장쾌함은 장단에 있으며 활발(活潑)함은 강약"에 있으므로 "악곡은 그 고저, 장단, 강약 등 변화에 따라서 희노애락과 경악공포의 감을 주는 것"이라 주장한다. 곧이어 그는 '완전한 음악'이란 "전술한 원소 이외에 일정한 음조(Tone)와 박자(Tact)와 선율(Melody)과 화성(Harmony)이 있어야 한다"며 서양음악의 3요소가 구비되지 않은 음악을 '완전하지 않은 음악', 혹은 '불완전한 음악'임을 암시했다.


1920년 「音響二大區別」에서 그는 음향을 "樂音噪音二種類"로 구분한다. 악음이 "發音體正規的으로 振動하야 귀에 快感을 줄 만한 音"인 반면, 조음은 "振動이 불규칙하던지 또는 一時的으로 突發하야 귀에 不快을 주는 者"라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未開人種이나 上古時代에 잇어서는 純全噪音만으로 音樂한 때도 잇다. 그러고 본즉 不快複雜精神作用過敏性이오, 往昔, 頭腦가 그다지 發達되지 못하엿던 種族에게는 뚜드려 하면 다 이오, 뛰놀기만 하면 고만 愉快하엿던 것"이라 파악함으로써 악음이 유쾌한 음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러한 홍난파의 서양음악 지향성은 1930년대 들어들면서 급기에야 서양음악의 타자(他者)로서 조선음악(혹은, 동양음악)을 설정하고, 양악의 잣대로 조선음악을 비교판단평가하기에 이른다. 그는 조선 민요에 대해 부정적 인식과 조선음악이 서양음악에 비해 열등한 이미지를 드러내기도 한다. 즉 "우리나라의 민요는 가정에 들여올 만한 것이 별로 없고 교육상으로나 도덕상으로 보아서라도 자라나는 어린 아이들에게 들여 줄만한 것이 못"될 뿐만 아니라, "(조선음악은) 대체로는 동적(動的)이람 보다도 정적(靜的)이요 진취적(進取的)이람 보다는 보수적(保守的)이며, 적극적(積極的)이람 보다도 오히려 소극적(消極的)"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東西洋音樂比較」에서는 한걸음 더 나아가 조선음악의 적극적으로 비판한다. 여기서 홍난파는 이미 1919년에 밝혔던 그의 음악관, 즉 리듬·멜로디·하모니가 서양음악의 세 요소이며, 3요소가 삼위일체되지 않을 경우 그것은 '완전하지 않는' 음악, 나아가 '원시적'인 음악임을 확신했다. 상고시대 화성을 연주하는 악기도 없이, 단지 '타격악기'(타악기) 만의 합주는 '미개한 인종간'의 음악일 뿐이며, 조선의 '매구'같은 것이 바로 그러한 음악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의 논리를 따르면 화성없이 타악기로만 합주하는 '매구'는 '원시적' 음악이며, '미개한 인종간'의 음악에 지나지 않는다. 아울러 그는 이러한 음악은 '극히 원시적'이며 '지방적'인 음악이므로 언급의 대상조차 되지 않는다고 폄하하기도 했다.


더구나 그는 서양음악이 대개 경쾌하고 장중한 성격을 갖고 있는 반면, 조선음악은 대부분 '극히 지완'하므로 '해이하고 퇴영적 기분'에 싸여 있는 음악이라고 평가했다. 심지어 그는 동양음악이 아무런 '구체적 내용'을 갖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조선악의 서양식 편곡도 '사이비 혼혈아'라고 지적하기까지 했다.


홍난파의 조선음악에 대한 잇단 비판은 근원적으로 이들에 대한 그의 이해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가 양금·단소 등 전통악기와 자신의 바이올린으로 선양합주(鮮洋合奏)를 시도한 사실이 있기는 하지만, 그의 전통음악 내지 전통악기에 대한 경험이란 조선정악전습소에서의 피상적인 것이었을 뿐, 그가 줄곧 천착한 쪽은 서양음악과 서양악기였다. 1912년 조선정악전습소 서양악부에서 1년 간 배운 것도 서양의 성악과 바이올린이었고, 이후 동경음악학교와 동경고등음악학원에서 배운 것도 서양음악이었다.

 

한편 홍난파의 노래 가운데는 일본 음계를 사용한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즉 일본 전통음계인 미야꼬부시 음계(都節音階, 라·시·도·미·파의 5음 음계)가 사용된 경우가 그러하다. 가령 신민요 망향곡(望鄕曲)한양추색(漢陽秋色)에서 모두 이 음계를 사용하고 있다. 또한 영화 애련송의 제1주제가 서곡과 제2주제가 방랑곡에서도 미야꼬부시 음계를 사용함으로써 당시 일본 유행가의 성격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이들 일본식 음체계로 만들어진 노래가 당시 수용자 대중에게 깊이 뿌리내릴 수 있었던 것은 당대 조선의 레코드음악이 일본의 문화적 자장(磁場)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극히 드문 경우지만, 그의 동요 가운데서도 이 음계가 쓰여진 것도 있다. 그의 『조선동요백곡집』의 첫곡 속임이라는 노래가 그것이다. 일본 미야꼬부시 음계는 1920년 전후 엔카(艶歌)의 등장으로 즐겨 사용되었고, 이후 1930년대 초 한국에서 트롯트(trot)이라 불린 유행가의 한 양식으로 정착하였다. 이를 미루어 볼 때 홍난파의 이 동요는 작곡 초기 무의식 중에 일본 유행가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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