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날들

패랭이꽃은 아직도 들에 핀다

浩溪 金昌旭 2018. 2. 17. 18:46


이기철(李起哲 1943-  )


전쟁이 오면 지상에는 달콤한 것들이 사라진다

달콤한 말들과 향기로운 올리브와 달콤한 입술과 부드러운 손이 사라진다

밤이 길고 아침 이슬에도 장미가 피지 않는다

사랑의 편지를 쓰던 사람들의 손이 멎고

책상에는 긴 침묵의 잉크가 놓인다

아침에 보이던 사람들이 보이지 않고

캡을 쓴 시인이 시집을 버리고 화약을 사러 간다

 

빨리 오너라. 아마릴리스 향기와

포도와 젤리와 칠면조의 식사를 마치면 너무 늦으리라

빌로드와 우단의 의상을 입고

발 편한 부츠와 마차를 타면 늦으리라

저 많은 빌딩들과 휴게실과 공원들도

어쩔 수 없다.

대학 노트와 부피 큰 책 갈피에 써둔 것들은

가지고 오너라

네가 家長으로 고민하던 집

도장 찍힌 문서 주식과 보험 증서는 두고 오너라

가지를 잘라내고도 아픔 없이 살 수 있는 나무가 아니고서는

한 시대를 튼튼히 쌓아 올리기는 힘든다.

 

라일락은 라일락과 더불어 잠들고

모래는 모래와 더불어 잠든다

강물은 강물과 더불어 바다에 이르고

별들은 별들과 더불어 하늘을 수놓는다

시간은 시간과, 여름은 여름과

오랑캐꽃은 오랑캐꽃과 더불어 잠들지만

상실과 허위, 저주와 전쟁은 언제나 혼자일 뿐이다.

  

나비와 노가주나무들이 전쟁 없는 봄을 연장할 수 있다면

비타민과 채소들이 폭력 없는 밤의 편안함을 연장할 수 있다면

포성을 음악으로 길들이고

초토에서 샘물을 긷고 용암을 비료로 만들 수 있다면

그때 우리는 딸기꽃과 패랭이꽃, 새로 듣는 잔디빛과 가시 달린 장미원을 노래할 수 있겠지

어제 헤어진 친구들의 이름과 상냥한 지붕들을 노래할 수 있겠지

전쟁이 그 긴 팔과 큰 입을 벌리지만 않는다면

전쟁이 꽃밭과 시가지를 국방색 트럭으로 뒤덮지만 않는다면.

 

이기철, 『전쟁과 평화』(문학과지성사, 1985), 12-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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