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날들

소싯적 시

浩溪 金昌旭 2021. 1. 22. 17:31

 

이별

 

파도 높은 만경창파(萬頃蒼波)

저 편 강기슭으로 떠나는 배

뱃머리에 펄럭이는 흰 옷자락

바람에 흩날리는 목소리

 

이별이란

다시 만날 수 없다는 것

다시는 사랑할 수 없다는 것


풍경에서

 

겨울 문턱에 다다랐을 즈음,

가을은 저만치서

고추잠자리를 날리고 있었다.

 

강물 따라 하류(下流)로 흐를꺼나

지난 겨울

잃어버린 지연(紙鳶)을 찾으러

 

풍경같은 마을마다

빈 가지에 열린

노을은

저녁햇살에 익어가는 능금


겨울행

 

겨울을 걷는다

살얼음의 강(江)을 건너듯

 

아내의 수술(手術)은 끝났을까

눈이 맑은 아이의 얼굴이

웃는다

흔들린다

 

병원(病院)을 나서며 걷는

서툰 남편(男便)의 보행(步行)

봄은 아득히 먼데,

무심코 바라보는 분만(分娩)의 가지 끝에서

 

모람모람

내리는


울 아부지

 

나는 아부지한테

나쁜 소리 들어 본 적 없네

 

나는 아부지한테

싫은 소리 들어 본 적 없네

 

나는 아부지한테

회초리 한 번 맞아 본 적 없네

 

내가 원하는 거 사 달라 했을 때

아부지 사 주지 않은 적 없네

 

내가 필요한 돈

아부지 주지 않은 적 없네

 

주고 나서,

울 아부지

나쁜 내색 하신 적 없네

 

두 발로 짜박짜박 걸어 다니실 적이

행복이었다는 것

나는 몰랐네

 

맛 있는 거 오물오물 잡수실 때

그게 행복이었다는 것

차마 나는 몰랐네.


울 엄마

 

울 아부지 돌아가시고

조문객을 맞았지

입관을 하고,

발인을 하고,

화장을 하고

장지에 모셨지

 

그날 밤

울 엄마

연신 문 쪽을 바라보며

혼잣말로 되뇌었지

 

올 때가 됐는데

늦을 턱이 없는데

오늘 본 일

오늘 들었던 일

말해야 하는데...

 

그러나

울 아부지 오시지 않았지

아무리 기다려도

오시지 않았지

영영 오시지 않았지.


울어봐

 

울어봐,
맘껏 울어봐

창밖엔 바람 불고 비 내리는데
적막한 풍경 속에 나 홀로 갇혔네

거리 지나는 누구도 내겐 말 걸지 않네
내 곁을 지나는 그 누구도 눈길 한 번 주지 않네

그래, 울어봐
맘껏 울어봐

네 속의 슬픔 녹을 때까지
네 속의 외로움 사라질 때까지

난 오늘도 차디 찬 혼밥 먹네
난 오늘도 쓰디 쓴 혼술 마시네

그래, 울어봐
맘껏 울어봐.


갑과 을

 

세상에는

甲과 乙이 있고

丙과 丁도 있다

 

그러나

甲이라 해서 늘 甲이 아니고

乙이라 해서 늘 乙도 아니다

 

甲은 더 큰 甲의

乙이고

더 큰 甲은

더 더 큰 甲의

乙이다

 

乙은 더 작은 乙의

甲이고

더 작은 乙은

더 더 작은 乙의

甲이다

 

세상의 甲들이여

지나치게 乙을 다그치지 마라

세상의 乙들이여

지나치게 甲에 주눅 들지 마라.


혈세(血稅)

 

우리나라

동회 공무원은 동장부터 섬기고

구청 공무원은 청장부터 섬기고

도청 공무원은 도지사부터 섬기고

시청 공무원은 시장부터 섬기고

국가 중앙공무원은 대통령부터 먼저 섬긴다

 

그러나

국가 중앙공무원이 국민부터 섬기고

시청 공무원이 시민부터 섬기고

도청 공무원이 도민부터 섬기고

구청 공무원이 구민부터 섬기고

동회 공무원이 동민부터 먼저 섬겨야 하지 않는가

 

왜냐하면,

동회 공무원은 동민들의 혈세로 먹고 살고

구청 공무원은 구민들의 혈세로 먹고 살고

도청 공무원은 도민들의 혈세로 먹고 살고

시청 공무원은 시민들의 혈세로 먹고 살고

국가 중앙공무원은 국민들의 혈세로 먹고 사니까.


먹이

 

"모든 먹이 속에는 낚싯바늘이 들어 있다. 우리가 먹이를 무는 순간에 낚싯바늘을 동시에 물게 된다. 낚싯바늘을 발라내고 먹이만을 삼킬 수는 없다. 세상은 그렇게 어수룩한 곳이 아니다. 낚싯바늘을 물면 어떻게 되는가. 입천정이 꿰여서 끌려가게 된다."(김훈, 돈)

 

낚싯바늘에 입천정이 꿰여

끌려갈 수밖에 없네

먹잇감을 얻기 위해서는

 

나와 너,

그리고 우리의 슬픈 숙명이여

손끝을 스쳐 지나는 바람이여.


아내의 동화

 

아내가 펼쳐놓은 地圖에는

눈 시리게 파란 바닷물이

넘실넘실

밀물쳐 들어와 내 발을 적셔 놓는다

 

그의 무릎에 머릴 누이고

잠시 눈 감아 파도소릴 듣는 동안

아내는 머언 나라의 童話를

가만가만 들려준다

 

아내가 꾸민 童話는

매양 흔들리는 나의 마음을 똑바로 세워주곤 했지만

항용 다친 마음으로 直立步行이 어려운 내

感性의 뜨락에는

어느새 자꾸만 잎이 지고 있었다

 

그는 나의 잎을 조심스런 손길로 주워

흙을 파고 묻어 주거나

책갈피 속에 꽂아 꿈을 엮었다. 그리고

떨어진 열매보다 작은 씨앗을 심고

물을 뿌렸다

 

아내가 들려주는 童話에 귀 기울이던 내가

머언 나라로 아련히 멀어져 가면

자장가를 부르며 그는

갈라진 나의 感性을 바느질했다

 

지나온 나날을 기우려고

다가올 세월을 기우려고

한 올 한 올

바늘귀에 실을 꿰었다.


돌무덤

 

산길을 내려오다 길가에 띄엄띄엄 쌓인 돌무덤을 보았다

꼭대기까지 거의 다 쌓인 돌더미도 있고,

이제 막 쌓아올리는 것도 있다

틈새에는 제법 큰 돌이 있는가 하면

아주 작은 돌멩이도 끼어 있다

 

누군가 한 사람이 돌을 놓자,

뒤따라 오던 또 다른 사람도 돌을 놓았을 거다

어른이 놓자 아이도 놓고,

여자가 놓자 남자도 놓았을 거다

오랜 시간동안 많은 사람들이 하나씩의 돌을 놓으면서

마침내 돌무덤이 생겼으리라

 

이때 돌은 그냥 돌이 아니다

여기저기 아무렇게 나뒹구는 돌이 아니다

그것은 누군가의 간절한 소망(素望)과 비원(悲願),

그 총화(總和)다.


산길

 

산길을 오른다

쭉 뻗은 길도 있고 꼬불꼬불한 길도 있다

평평한 길도 있고 가파른 길도 있다

흙길도 있고 돌길도 있다

한 갈래 길도 있고 여러 갈래의 길도 있다.

 

길 하나가 만들어지려면,

오랜 세월 많은 사람들이

산을 오르내려야 한다

할아버지가 걷던 길을

아버지가 걷고

그 위에 아들도 걸었으리라

 

산길을 오른다

할아버지의 발자국이 낙엽으로 덮이고

아버지의 발자취가 눈으로 지워진 산길을

무수한 사람들이 오르내릴 그 산길을.


어느 저녁

 

겨울 저녁길,

가게마다 훤하니 불이 밝혀져 있다

 

어떤 곳은 두엇

어떤 곳은 서넛의 손님이 자리잡고 있다

 

또 어떤 곳에는 손님 하나 없이

부부 둘만 달랑 자리에 앉아 있다

 

남편은 연신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아내는 TV 화면에 눈길이 꽂혀 있다

 

이따금 그들은 출입구를 힐끔거릴 뿐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지 못한다

차마 바라 볼 수 없다.


발자취

 

해 뜨고 달 지는 것이 쉬운 일이랴

사람이 산다는 것도 그와 같은 일이다

걸음을 옮겨 자취를 남기는 것 또한

어찌 두려운 일이 아니랴?


졸업

 

맏딸 다슬이 초등 졸업 때도 그랬지

둘째딸 다봄이도

달랑 졸업장 한 조각뿐이었어

 

남들은 6년 개근상이나 우수상,

하다못해 아차상 같은 것도 받는다던데...

 

남달리 받은 상이 없었으므로

상장이나 상품, 혹은 상금이 있을리 없었지

빛나는 졸업장이 유난히 빛났어

 

그러나 생각해 보면

우리네 삶이란 것도

결국 한 조각 구름이 아니던가?

 

초등을 졸업하면 중학교,

중학교 졸업하면

머잖아 고등학교

대학도 졸업하게 되겠지

 

우물쭈물하다

어느새 인생을 졸업해야 할 때가

성큼 다가서겠지.


산에 들에

 

산에 들에

꽃들이 만발하네

피기 어려워도 지는 건 잠시라지

 

누구나 봄날은 있지만,

잠시라네

아주 잠시라네

 

머잖아 꽃 지고 봄날도 갈 거니까

가뭇없이 날아간

지난 겨울 지연(紙鳶)과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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