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날들

독거소녀 삐삐

浩溪 金昌旭 2022. 5. 25. 21:13

최정란(崔貞蘭) 시인께서 근작시집 '독거소녀 삐삐'(상상인, 2022)를 보내주셨다. 시집에는 총 4부에 걸쳐 60여 편의 시가 실려 있다. 

 

먼저 눈길이 가는 것은 표제였다. '독거노인'이 아닌 '독거소녀'에다 '삐삐'도 '말괄량이'가 아닌 까닭이다. 의도가 무엇인가?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다. 때론 가볍게, 때론 무겁게. 그러나 밤늦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오민석 평론가의 해설을 훔쳐 보기로 했다. 과연! 평론가의 해석은 남달랐다. 

 

그는 서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었다. "이 시집엔 깔깔대며 세계의 지붕에서 미끄럼 치는 명랑, 발랄한 소녀들의 언어가 있고, 그것들의 배후에서 사선(射線)으로 내리는 비처럼 우울한 슬픔의 언어가 있다. 이 두 개의 언어는 별개가 아니라 상호내주(perichoresis)*하는 언어이며, 이 시집을 끌고 가는 두 개의 벡터**이다. 이 두 가지 벡터들은 서로 꼬이고 엉키며 다양한 주름들을 만들어낸다."

 

   편집자註

* 상호내주(相互內住): 기독교의 삼위일체 교리에서 하나님을 설명하는 핵심용어. 즉 성부(하나님) 안에 성자(예수님)와 성령(하나님)이 인격체로서 함께 계신다는 의미임

** 벡터(vector): 심리학 개념으로 개체 내부의 긴장으로 생기는 추진력을 뜻함

 

평론가의 친절한 해설을 읽으며, 나 또한 시나브로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이를테면 시집 전편에 흐르는 두 가지 개념, 즉 '명랑'(발랄·상쾌·소녀)과 '우울'(슬픔)이 콘트라스트(contrast)를 이룬다. 이상을 바라보며, 현실을 비판·냉소·풍자하고 있는 셈이다. 다시 말해 시인은 기표(記表, 시니피앙, 빙산의 일각)인 '명랑'을 앞세우지만, 기실 기의(記意, 시니피에, 빙산)인 '우울'을 이야기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시니컬하다.

 

그러나 나는 평론가가 미처 간파하지 못한 사실 하나를 발견했다. 바로 ‘언어유희’(言語遊戲)다. 물론 이것은 시집 전편에 걸쳐 나타나고 있으며, 특히 표제작 ‘독거소녀 삐삐’에서 현저하다(104쪽).

 

   늦은 밤 골목을 돌며 논다 노인이 리어카를 끌며 논다 불 꺼진 빈 상자를 펼치며 납작납작 논다 비탈진 오르막을 밀며 비틀비틀 논다 노세 노세 노동요를 노새처럼 끌며 논다

 

   노래하는 새들이 노인을 놀리며 논다 밥이 노인을 차리며 논다 노는 입이 거미줄을 치며 논다 이 빠진 노래가 노인을 읊조리며 논다 흘러간 앨범 속 파노라마가 노인을 펼치며 논다 슬픈 일 기쁜 일 아픈 일이 노인을 논다

 

   시간과 잘 노는 사람, 시간을 잘 놀려야 하는 사람, 지나간 시간을 천천히 되새김질하는 사람, 시간이 날 때마다 병원놀이를 하는 사람, 병과 정들이 병원놀이도 마음대로 못하는 사람, 노을이 깊어 놀 일이 바쁜 사람

 

   노인이 가장 잘하는 놀이 기다리는 놀이, 기약 없이 하염없이 바쁜 놀이, 한가해서 더 바쁜 놀이, 노인이 논다 오지 않는 뼈와 살을 기다리며 논다 미처 오지 않은 먼 바깥을 기다리며 논다

 

우선, 시가 경쾌하다. 리드미컬하다. 게다가 시인은 “논다”와 “놀이”를 집요하게 반복시킨다. 매우 ‘명랑'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우울'하기 짝이 없다. 집요하게 반복되는 “논다”와 “놀이”가 실은 '어쩔 수 없이 살아가는 일'이기 때문이다.

 

노인이 늦은 밤까지 빈 박스를 줍고, 주운 박스를 실은 리어카를 끌며 비탈길을 오른다. 노인은 죽지 않기 위해 밥을 먹고, 앨범을 뒤져 과거를 추억한다. 노인들 가운데는 현실에 적응하거나,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 적응할 수 없어 유한한 생명의 시간을 애써 죽이는 사람도 있다. 게다가 이들은 모두 병원에 갇혀 있다. 바깥과의 소통이 불가능하다. 다들 인간 세상에서 소외된 채 겨우겨우 살아가는 절대 고독의 존재들이다. 그들은 바깥 세상을 내다보며, 하루하루 죽음만을 기다린다. 요컨대 시인은 오늘날 노인들의 삶의 이야기(우울)를 유쾌하게(명랑) 그려내고 있다!

 

더구나 이 시는 표현방식도 유별나다. 가령 “납작납작” 놀거나, “비틀비틀” 논다. “노세 노세”가 “노새”가 되고, “노”래하는 새들이 “노”인을 “놀”리며 “논”다. 이 빠진 노인이 노래를 읊조리는 게 아니라 “이 빠진 노래가 노인을 읊조”린다. 노인이 앨범 속 파노라마를 펼치는 게 아니라 “앨범 속 파노라마가 노인을 펼”친다.

 

시인은 현실적 삶에서의 ‘명랑’을 ‘우울’하게 표현하거나, 혹은 ‘우울’(비극적)을 짐짓 ‘명랑’(희극적)으로 포장하고 있다. 궁극적으로 언어를 줄곧 희롱하고 있는 시인은 이미 빼어난 ‘언어의 연금술사(鍊金術師)’라 감히 말해도 될지 모르겠다. 2022. 5. 27 들풀처럼

 

스캔 바이 들풀처럼. 시집 표지

 

스캔 바이 들풀처럼. 시인의 친필. 내 이름이 큼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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